녹지대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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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고통이 없었다면, 문학을 껴안지 못했을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또 다른 걸작

 

올초 몇 년을 책장에 오래 꽂아둔 토지를 완독하며 토지문학관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비록 작은 규모지만 작가의 토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곳입니다. 이번에 박경리 타계16주기 추모 특별판 <녹지대>가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어 좋은 기회에 읽었습니다. 원전을 충실하게 살린 편집과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수어줄 디자인으로 이 소설에는 한국 전쟁이 끝나고 폐허와 상처가 가득했던 1960년대 서울의 명동 거리를 배경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린 적도 없고 현실을 변혁할 능력도 없는 한국의 비트족의 이야기입니다

 

한국문학의 어머니, 박경리가 196461일에서 1965430일까지 부산일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녹지대는 명동에 있는 음악 살롱의 이름으로 주인공 하인애가 시인의 꿈을 키우며 같은 꿈을 꾸는 부류들과 어울리는 곳이고 자신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갈 사랑을 만나고 그와 어긋나 버리는 장소입니다.

 

젊은 세대들의 치명적인 사랑 그리고 녹지대라는 탈출구

 

<녹지대>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슈를 배제한 채 2세대의 꿈과 사랑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녹지대'라는 단어 역시 그 신세대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인애는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바람이 키워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한국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집에서 기거하며 비록 숙모에게 눈칫밥을 먹는 처지지만 소신껏 행동하는 당차고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늘 인기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바로 김정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는 안개에 쌓인 것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습니다. 만날 수 있을 듯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이 닿은 듯하다가도 이내 멀어집니다. 그 이유는 인애와 정현 사이에 '그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현은 그 여자의 마수에 걸려 자유를 속박당한, 마치 새장에 잡힌 새와 같은 꼴입니다. 왜 벗어나지 못하는지 참으로 안타카웠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아우라만으로도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 여자'의 정체와 정현과의 관계는 이야기의 후반에 가서야 충격적인 사연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면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뭔지 모르지만 묻혀서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어. 부자가 된다는 얘기는 아냐. 남몰래 일해서 내 힘으로 산다는 게 아주 소중한 것 같애.

조용히 말이야.˝

 

 

 

더 이상 갈곳이 없는 남자는 자신을 옭아 매어 두었던 끈을 풀고자 선택한 방법이 사랑하는 여인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육촌 동생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무기로 무서운 여자는 자신에게 벗어나려는 남자들 잡아두고 싶습니다. 그 남자로 인해 다른 한 남자는 악마같은 여자에게서 숨통이 트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은자를 사랑 하지만 은자가 가진 자의식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한철, 구름같이 한오라기도 손에 잡히는 않는 바람같은 남자 민상건, 사랑하는 인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늘 어긋나기만 한 김정현 , 주인공 인애, 인애의 사촌 숙배, 양공주였던 엄마의 그늘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엄마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힘들어 하는 인애친구 은자 이렇게 세여자와 세남자의 각기 다른 생각과 다른 색깔로 1960년대인들의 심리 및 의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녹지대에도 이제 종말이 온다.” 안경잡이가 유행가의 가락처럼 뽑으니 겨울이 와서?”

하고 키 작은 치가 맞장구를 친다. “! 녹지대에도 세대 교체는 필요해. 우린 늙었어.”

굵게 때린다.”

 

 

이들은 6·25 전쟁이 부른 죽음과 폭력과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고, 때문에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체념과 그 현실에서 떠나고자 하는 도피 욕구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을 빚었으며, 그러면서도 그러한 모순적 심리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의미를 정관하고자 하는 정신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경리 저자는 한 수필에서 나는 일생 동안 못다 쓸 만큼 소재는 많이 있지만 내 능력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기술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험한 세상을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견뎌온 작가이자 인생이 곧 문학이었던 작가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6·25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는 불행을 겪었으며 황폐한 세상을 여자의 몸으로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병마와 싸우기도 하면서 이러한 시련은 오히려 인간과 세계,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이어졌고 예술혼으로 승화해 방대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내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 협찬 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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