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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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지수는 : ★★★★ (8/10점 : 그래, 이게 소설이지!)

지속되고 축적되는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름은 물빛처럼, p.80)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하룻밤보다 많은 밤들이 필요합니다. (동면하는 남자, p.187)

칠성사이다는 1초에 서른세 개씩 팔린다지. 장담컨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인간이 매분 매초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죽고 있을 것이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p.220)

표제작 <유령의 마음으로>에서 '나'는 어느 날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을 만나게 됩니다.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악마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p.11)'라고 이야기하는 이 친구는 뜻밖에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데요.

러한 유령 이야기와 함께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이야기들에서는 해파리로 변하는 인간들(<빛이 나지 않아요>), 자신을 산에 묻어달라고 하는 남자(<동면하는 남자>) 등 일상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독특한 존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주인공들의 기묘한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섬세한 관찰력에 강렬한 상상력 한 스푼

임선우 작가님의 단편집 <<유령의 마음으로>>입니다. 작품 내에는 총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각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평범한 일상 속에 판타지인 사건들이 예고 없이 등장합니다. <유령의 마음으로>에서는 남들이 아닌 나만 볼 수 있는 '유령'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름은 물빛처럼>에서는 전 여자 친구의 집에 찾아갔다가 나무가 되어버린 남자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판타지적인 소재들은 난데없이 이야기에 등장하며, 눈앞에 나타난 기묘한 사건에 놀라면서도 거기에 적응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 첨가된 강렬한 타지는 작품 내에서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작가는 일상 소재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기반으로, 자칫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었던 비일상적인 소재들을 일상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은 물빛처럼>에서 등장하는 '나무가 되어버린 남자'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는 '극장 카운터에서 가만히 일을 하는 '나'', '화분에 놓인 망고 씨앗'과 같은 일상 소재와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이로써 예고도 없이 등장하는 비일상적인 소재들을 작품의 매력으로 살려냈으며, 작가 특유의 관찰력을 기반으로 탄탄한 단편을 꾸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정적인 감정 속에서 스스로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단편들은 각기 다른 색채를 띠며 독자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선사합니다만,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처음에 겪는 감정은 무기력과 좌절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들은 꿈을 포기할 뻔하거나, 소중한 반려동물을 잃어버려 찾아다니거나, 하던 일로는 돈을 벌지 못해 부도덕한 일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러한 모습은 일상에 지친 우리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습니다.

좌절 직전의 상황에서 이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지도 알 수 없게 된 위태로운 그들 앞에, 앞서 언급한 비현실적인(혹은 독특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에서는 바닥에 난데없이 구멍이 뚫리며, <동면하는 남자>에서는 겨울 산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하는 남자가 등장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주인공을 직접 좌절에서 구원해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단편집 현실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단편집의 매력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산이 된 남자, 빛이 나는 해파리 등에 의해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큰 영향을 받긴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들에 의해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들을 보면서 스스로 무기력에서 버티는 자세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 점이 현에서의 우리의 모습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해요. 부정적인 감정을 벗어나게 해주는 데에 타인의 조언, 타인의 경험도 분명 영향을 주긴 하지만, 감정들에서 억지로 벗어나려고 해서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감정들이 지나가기까지 버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헤어 나오는 경우들이 많으니까요.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게 하는 '유령의 마음으로'

사실 단편집을 다 읽은 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빛이 나지 않아요>가 가장 임팩트 있는 작품이었고, 정작 표제작인 <유령의 마음으로>가 조금 맛이 부족한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집의 표제를 '유령의 마음으로'라고 설정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각 단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주제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 로 표제인 '유령의 마음으로' 였기 때문입니다.

첫 단편인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다 보면, 유령이 스스로 유령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부분, '나'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답변해주는 부분 등을 토대로, '유령'이라는 존재가 '나'를 바깥에서 바라보게 해 주고, 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른바 자아성찰의 역할을 돕는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나'는 '유령'에게서 자신의 감정을 전해 듣고,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유령'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그제야 '완전한 이해'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작품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위로해주는 장면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단편들은 궁극적으로 '유령'이 '나'를 끌어안듯, '내가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자야지>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을 깨운 것은, 주변 사람이었던 조나 정우가 아닌, (어쩌면 유령의 목소리와도 닮아 있는)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 였습니다. 그밖에 단편들에서 비현실적인 존재들은 '나'의 옆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나'를 직접적으로 돕지 않습니다. <낯선 밤에 우리는>에서는 다소 현실적인 존재인 '초등학교 동창'이 등장하지만, 현실의 괴로움에 버틸 수 없어진 주인공은 직접 그녀가 사는 곳을 찾아가서 능동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즉, '나'가 좌절하지 않을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주변의 사물, 사람이지만, 결국 주인공인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언제나 '유령'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요컨대 이 단편집은 타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구원을 받는 허무맹랑한 서사구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인 혹은 자아를 보면서 스스로를 부정적인 감정에서 구원하는 것도 아닌,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유령의 마음'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를 전달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무언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디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그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낯선 밤에 우리는, p.138)

비록 예상치 못한 무기력과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직전에 놓인 우리들입니다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고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후기에서 작가님이 '고빌라트론을 구한 것이 고빌라트론이었다는 사실이, 뜨거운 생각이 마침내 근사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좋았다'(p.261)고 이야기하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 분들도 만약 자신의 마음이 얼어 있다고 느끼신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을 안아주는 '유령의 마음'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간만에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나는 늘 생각이 너무 많았고, 한때는 그것을 고쳐야 할 단점으로 여겼다.'(p.261)고 작가님께서 후기에서 밝히신 바 있는데, 저는 오히려 작가님께서 좀 더 많은 생각들을 들려주셨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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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 - 고민 상담부 나의 괴물님 YA! 1
명소정 지음 / 이지북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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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지수는 ★★★★☆ : 구성은 촘촘하고, 스토리는 촉촉합니다



"그걸 판단해야 하는 사람은 너야. 직접 부딪쳐 보고 판단해.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는 일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테니까." (p.71)

"너를 위한 선택을 해.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모두 만족할 만한 선택을. 지금의 너만 만족할 방법을 선택하면 다른 시점의 네가 널 원망할 수도 있으니까." (p.159)

온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을 믿는 삶. 그 길을 걸을 수 있으려면 자신의 꿈을 쟁취해야 함을, 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p.163)


소개

화괴. 이야기를 먹고사는 괴물.

도서부장인 '세월'은 어느 날 밤, 괴물이 도서관 책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알고 보니 그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잘생긴 남학생 '혜성'! 그의 정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잡아먹는 '화괴'입니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세월은 화괴의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민상담부를 만들어 혜성이 다른 학생들의 걱정과 고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꿈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학생, 짝사랑의 기억을 잊고 싶어 하는 학생 등 다양한 친구들의 고민을 접하면서 점차 그들은 감정을 익혀나가게 되고, 그런 그들 또한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이게 되는데......


이야기를 먹는 요괴, 독자를 이끌다

기억과 이야기를 소재로 한 웹툰, 웹소설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만, 이처럼 이야기를 먹는 요괴가 전면에 등장한 소설은 적어도 청소년 소설에서는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소재가 참신하게 느껴진 것은 '화괴'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허락을 받아야만 타인의 기억을 먹을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그에 얽힌 사연들도 매력적입니다.

어찌 보면 화괴는 이야기를 만들고, 또 읽음으로써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는 작가와 독자를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괴인 혜성이 점차 성장해나가는 과정은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책을 폭식 아닌 폭독해본 사람이 있다면) 단순히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다만 화괴의 설정이 워낙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보니, 주인공 중 다른 한 명인 '세월'에 대한 이미지가 초기에 옅다는 것이 단점입니다.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세월과 혜성이 각자 감정을 익히며 성장하는 과정이므로 두 인물의 서사가 거의 대등하게 발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중반부에 들어서야 세월이라는 인물이 스토리 상에서 눈에 띄기 시작해 아쉬웠습니다. 이 인물이 지니고 있는 사연이 작품 전반에 걸쳐 설득력 있게 다가오려면, 초기에 보다 많은 서사를 부여해줄 필요는 있었다고 봅니다.

주체적으로 고민을 해결해나가는 등장인물

고민을 상담하러 오는 서브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고민은 등장인물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며, 주인공들은 '고민을 지우는' 데에만 열중하지 않고, 그들의 고민을 지워주는 것이 과연 상대방을 위하는 일인지를 계속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고민하는 데에서 어중간하게 끝맺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결론을 내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때로는 과거의 선택에 후회하면서, 그로 인해 반성을 하기도 하지만, 당면한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을 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합니다. 독자들은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함에도 회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등장인물들을 응원하게 됩니다.

다만 해원의 고민은 너무 이상적으로 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부분은 소설가에 대한 작가님의 경험이 많이 투여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튼튼한 기반이 가능하게 극적인 결말

무엇보다도 작품을 읽으면서 뻔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단순히 전래동화처럼 괴물이 소원을 들어주고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대가를 치르는 식의 플롯을 따랐다면, 소설의 맛은 한참 떨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기억을 먹는 요괴라는 설정과 그가 먹게 되는 기억들은 작품 내에서 맛깔나게 묘사되어 있고, 그 기반이 튼튼했기 때문에 세월과 혜성 앞에 놓인 최후의 선택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정과 사랑으로 설명할 수 없는 둘의 관계를 보고 무척 설레고 아팠습니다. 솔직히 결말 읽으면서 되게 아렸어요. '아니 여기서 끝내면, 아니 이게 제일 깔끔하긴 하겠지만, 아니 그래도...' 하고 굉장히 아쉬워했네요.


정리

명소정 작가님의 데뷔작인 <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입니다. 장르소설이 지니는 매력을 한껏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맛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인 청소년 소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존재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작가님께서 이야기를 통해 느끼신 '살아 있다는 감정'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시중의 모든 이야기가 살아 있다는 감정을 부여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생동감 넘치는 이 작품에 대해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이 책처럼 '살아 있다는 걸 실감시켜 주는' 이야기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이야기를 먹어 줄게>였습니다. 근데 그림 누가 그린 거예요? 너무 이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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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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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남이 던져준 답은 어차피 대증요법對症療法에 불과해. (p.48-49)

★ 이제는 알았겠지. 왜 자네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단점에만 집중하며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은 자네가 남에게 미움을 사고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일세. (p.79)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p.189)

★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p.261)

'인간은 오늘이라도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p.8)하는 철학자에게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 콤플렉스와 비관적인 인식으로 가득 찬 청년은 철학자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하는데요. 철학자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 중 한 명인 아들러의 심리학을 청년에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철학자,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열띤 대화 속에서 소년은 점차 자신을 둘러싼 고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데......

기존 위로 서적들에 반기를 드는 '거룩한 가르침'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입니다. 국내 출판될 당시 '미움'과 '용기'라는 다소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를 결합한 제목이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파격적인 제목만큼이나 이 책은 '괜찮다', '당신이 옳다'라고 이야기하던 기존의 힐링 서적들에 대해 부정하는 파격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불행에 대해서

'하지만 지금 자네가 불행한 것은 자네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p.55)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무리하게 자신을 바꾸지 않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문장 또한 뜻깊게 읽은 글귀 중 하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 책에서 나오는 청년이 완전한 타인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던 탓인지, 후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은 상당히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 책에 관해서 '허황된 이야기다', '현실에 맞지 않는 공상적인 이야기다'라고 이야기하시는 독자분들의 반응도 보았습니다. 철학, 심리학 책이 원래, 한 사람이 모든 진리를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에, 또 논리라는 것은 비논리로 가득 찬 현실에 언제나 통용되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에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후기를 붙인 데에는, 이 책이 기존의 서적들이 기피해 왔던 '싫은 소리'를 '논리적으로' 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던 기존의 위로들에 대해 아들러의 심리학은 '과거는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라고 단번에 위로의 여지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줌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위로를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거북한 문장'

그러나 상술한 호불호의 문제와 달리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단점은 사실 분명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열등 콤플렉스에 빠져 있고, 가정이 그다지 화목하지 않으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청년'과 그의 논리를 전부 뒤집어버리는 '철학자'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려운 내용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성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분명히 이러한 구조가 가독성의 측면에 있어서는 장점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헌데 대화 구조라는 형식을 갖추게 되면서 이 책의 문장들은 읽기에 디소 '거북해졌습니다'. 철학자는 '청년'이 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아들러의 심리학을 기반으로 뒤집어엎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청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논리가 부족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태도로 논쟁에 임하고 있습니다. 당장 청년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느낌표의 개수만 세어본다고 하더라도 이 청년이 얼마나 '아들러의 철학으로 갱생받아야 할 감정적인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철학자 또한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인데, 충분히 견제해줄 논리를 청년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철학자 또한 독자가 보기에 '어라?' 싶은 논지들을 마구잡이로 펼쳐나가게 됩니다때문에 서적에서 등장하는 논리에 반박을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 되어버리고 이 점이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비판점에 해당합니다.

작가가 설정한 두 등장인물의 토론 구도는 어떻게든 작가의 의도에 따라 승자가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대화 형식이 독자들에게 의미 있게 와닿으려면, '청년'과 '철학자'의 논리가 충분히 대등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채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집어삼켜지는 이와 같은 구도는 다음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화만큼이나 기성세대의 계몽주의 서적들과 닮아 있어, '거북합니다'.

철학자 : 젊은 벗이여, 나와 함께 걸어가지 않겠나?

청년 : 걸어가지요, 함께! (p.321)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만큼이나 파격적인 이 서적이 좀 더 독자들에게 수용 가능한 형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두 사람의 관계를 '선생-제자' 등 협력 관계로 설정하든지, 혹은 저자가 전개하는 지식들이 지닌 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청년'의 태도를 다르게 설정하든지 등 나름의 객관성을 부여할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p.307-308)

이렇듯 형식의 측면에 있어서 일말의 거북함을 끌어안고 있는 <미움받을 용기>입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실린 '팩트 폭력'들마저 거북함을 이유로 그냥 넘길 이야기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독자분들께서 만약 이 책을 읽으신다면 거북한 구성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들만 취사선택'하시기를 권유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완벽한 방안이라는 것은 이 책에도 마찬가지로 없습니다만, 비논리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논리는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해줄 것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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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순례
사이토 하루미치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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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문장에 담긴 ‘진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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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순례
사이토 하루미치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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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지수는 ★★★★☆ (9/10점 : 말과 글에서 빛이 반짝반짝)

당시 내게, 말이란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었다. 지금은 안다. 말을 쓰고 버리는 것은 마음을 쓰고 버리는 것이라는 걸. 마음을 쓰고 버리다 보면 점점 터진 곳이 드러난다. (p.17)

'의미 있지만, 의미 없는 잡담'을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건네는 '말'에는 생기가 깃들지 않는다. (p.109)

그저 잠만 자는 아직 이름 없는 생명이 작은 공간을 더욱 맑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p.256)

선천적인 감음성 난청을 겪고 있는 저자는 농학교에 진학하여 현재는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로 인해 겪어왔던 차별과 폭력, 그리고 행복을 발견하기까지 저자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목소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는데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해서 저자는 갈고닦은 문장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들려줍니다.

★ 담백하게 담아낸 '들리지 않는' 이야기

사이토 하루미치의 <목소리 순례>입니다. 처음 읽었을 표지만큼이나 편안하게 읽히는 에세이라는 인상이 강했는데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수어의 매력과 그 동작을 담아낸 사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부드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그런 에세이였습니다.

물론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진'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해나가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담기는 한편, 어려서부터 청각장애를 겪은 저자가 학교와 사회에서 받아야 했던 차별, 그리고 폭력 또한 책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결코 가벼운 책은 아닙니다만,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저자는 오히려 담백하게 서술해나감으로써 술술 읽히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에세이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 '나'의 감정을 따라가며 '말과 글'을 다시 바라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조리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귀머거리'라는 말을 한 데에 대해 저자가 화를 내지 못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저자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조리장의 말을 처음으로 알아들은 것에 불쾌하게도 '기쁨'을 느'(p.103) 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때 기쁨과 증오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대해 독자들은 새롭게 접하게 되며, '나'의 처지가 되어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저자가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과정에서 겪은 일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저자는 처음에는 만능감에 빠졌으나, 점차 '주목이 사라지는 걸 쓸쓸해서 참지 못'(p.239)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반성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진짜 말'이란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한 번쯤 비슷하게 경험해 보았을 사건들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나'의 시선에서 '말과 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 빛나는 문장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목소리'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목소리', 즉 말과 글에 대한 세계를 저자가 새롭게 고찰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홋카이도의 설경 속에서 저자가 고요를 '운다'라고 표현한 부분, '소통은 의미 있는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p.108)'라, '쓸데없다고 여기곤 하는 잡담이 쌓여야'(p.109) 생기가 깃든다고 이야기하는 부분, 여러 대화 끝에 '진짜 말'에 대해 자신 나름의 결론에 다다르는 부분(p.123), '정적만큼 소리로 가득한 것이 없었다'(p.216)고 표현하는 부분 등 서평에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저자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새롭게 '목소리'를 낸 이 책은, '들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여태껏 '생각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좀 더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가 자신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참으로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란 행동이나 자연현상처럼 말이 없는 침묵 속에서 번뜩인 무언가를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p.91)

★ 내게 가장 기쁜 순간은 다양한 존재들과 만나서 '귀가 듣지 못하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라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볍게 뛰어넘는 '목소리'를 알게 될 때였다. (p.282)

이해, 공감, 이런 단어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주의해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해 알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거든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들리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또한 '진짜 말과 글'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만을 주제로 삼은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말과 글'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쉴 새 없이 대화하는 우리들에게, 갈고닦은 문장으로 쓰인 이 책은 담백한 맛을 간직하면서도 독자에게 보다 큰 울림을 선사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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