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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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지수는 : ★★★★ (8/10점 : 그래, 이게 소설이지!)

지속되고 축적되는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름은 물빛처럼, p.80)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하룻밤보다 많은 밤들이 필요합니다. (동면하는 남자, p.187)

칠성사이다는 1초에 서른세 개씩 팔린다지. 장담컨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인간이 매분 매초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죽고 있을 것이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p.220)

표제작 <유령의 마음으로>에서 '나'는 어느 날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을 만나게 됩니다.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악마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p.11)'라고 이야기하는 이 친구는 뜻밖에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데요.

러한 유령 이야기와 함께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이야기들에서는 해파리로 변하는 인간들(<빛이 나지 않아요>), 자신을 산에 묻어달라고 하는 남자(<동면하는 남자>) 등 일상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독특한 존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주인공들의 기묘한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섬세한 관찰력에 강렬한 상상력 한 스푼

임선우 작가님의 단편집 <<유령의 마음으로>>입니다. 작품 내에는 총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각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평범한 일상 속에 판타지인 사건들이 예고 없이 등장합니다. <유령의 마음으로>에서는 남들이 아닌 나만 볼 수 있는 '유령'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름은 물빛처럼>에서는 전 여자 친구의 집에 찾아갔다가 나무가 되어버린 남자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판타지적인 소재들은 난데없이 이야기에 등장하며, 눈앞에 나타난 기묘한 사건에 놀라면서도 거기에 적응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 첨가된 강렬한 타지는 작품 내에서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작가는 일상 소재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기반으로, 자칫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었던 비일상적인 소재들을 일상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은 물빛처럼>에서 등장하는 '나무가 되어버린 남자'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는 '극장 카운터에서 가만히 일을 하는 '나'', '화분에 놓인 망고 씨앗'과 같은 일상 소재와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이로써 예고도 없이 등장하는 비일상적인 소재들을 작품의 매력으로 살려냈으며, 작가 특유의 관찰력을 기반으로 탄탄한 단편을 꾸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정적인 감정 속에서 스스로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단편들은 각기 다른 색채를 띠며 독자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선사합니다만,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처음에 겪는 감정은 무기력과 좌절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들은 꿈을 포기할 뻔하거나, 소중한 반려동물을 잃어버려 찾아다니거나, 하던 일로는 돈을 벌지 못해 부도덕한 일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러한 모습은 일상에 지친 우리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습니다.

좌절 직전의 상황에서 이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지도 알 수 없게 된 위태로운 그들 앞에, 앞서 언급한 비현실적인(혹은 독특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에서는 바닥에 난데없이 구멍이 뚫리며, <동면하는 남자>에서는 겨울 산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하는 남자가 등장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주인공을 직접 좌절에서 구원해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단편집 현실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단편집의 매력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산이 된 남자, 빛이 나는 해파리 등에 의해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큰 영향을 받긴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들에 의해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들을 보면서 스스로 무기력에서 버티는 자세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 점이 현에서의 우리의 모습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해요. 부정적인 감정을 벗어나게 해주는 데에 타인의 조언, 타인의 경험도 분명 영향을 주긴 하지만, 감정들에서 억지로 벗어나려고 해서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감정들이 지나가기까지 버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헤어 나오는 경우들이 많으니까요.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게 하는 '유령의 마음으로'

사실 단편집을 다 읽은 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빛이 나지 않아요>가 가장 임팩트 있는 작품이었고, 정작 표제작인 <유령의 마음으로>가 조금 맛이 부족한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집의 표제를 '유령의 마음으로'라고 설정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각 단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주제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 로 표제인 '유령의 마음으로' 였기 때문입니다.

첫 단편인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다 보면, 유령이 스스로 유령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부분, '나'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답변해주는 부분 등을 토대로, '유령'이라는 존재가 '나'를 바깥에서 바라보게 해 주고, 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른바 자아성찰의 역할을 돕는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나'는 '유령'에게서 자신의 감정을 전해 듣고,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유령'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그제야 '완전한 이해'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작품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위로해주는 장면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단편들은 궁극적으로 '유령'이 '나'를 끌어안듯, '내가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자야지>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을 깨운 것은, 주변 사람이었던 조나 정우가 아닌, (어쩌면 유령의 목소리와도 닮아 있는)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 였습니다. 그밖에 단편들에서 비현실적인 존재들은 '나'의 옆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나'를 직접적으로 돕지 않습니다. <낯선 밤에 우리는>에서는 다소 현실적인 존재인 '초등학교 동창'이 등장하지만, 현실의 괴로움에 버틸 수 없어진 주인공은 직접 그녀가 사는 곳을 찾아가서 능동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즉, '나'가 좌절하지 않을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주변의 사물, 사람이지만, 결국 주인공인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언제나 '유령'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요컨대 이 단편집은 타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구원을 받는 허무맹랑한 서사구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인 혹은 자아를 보면서 스스로를 부정적인 감정에서 구원하는 것도 아닌,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유령의 마음'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를 전달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무언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디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그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낯선 밤에 우리는, p.138)

비록 예상치 못한 무기력과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직전에 놓인 우리들입니다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고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후기에서 작가님이 '고빌라트론을 구한 것이 고빌라트론이었다는 사실이, 뜨거운 생각이 마침내 근사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좋았다'(p.261)고 이야기하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 분들도 만약 자신의 마음이 얼어 있다고 느끼신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을 안아주는 '유령의 마음'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간만에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나는 늘 생각이 너무 많았고, 한때는 그것을 고쳐야 할 단점으로 여겼다.'(p.261)고 작가님께서 후기에서 밝히신 바 있는데, 저는 오히려 작가님께서 좀 더 많은 생각들을 들려주셨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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