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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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이자 생물학, 물리학, 화학, 음악에 까지 넘나드는 멀티사이언티스트 칼 포퍼. 우리에게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2006)는 포퍼의 강연과 기고한 글이 실린 책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고찰은 칼 포퍼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글들이고, 제2부는 포퍼의 과학철학 즉, 과학적 방법론이 주제인 글들의 모음이다. 글들이 발표된 시기와 강연 내용이 다르다 보니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있는 글들이지만, 그 안에는 뚜렷한 줄기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과학에 대한 입장이다.

 

제1부에 소개된 글들을 통해서 보자면 그의 가치관 중에 대표적인 것은 자유주의, 낙관주의 등이다. 그런 그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나와 있는 책이 바로 위에 소개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고 생각이 된다. 칼 포퍼의 별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와 포로이트 살인자(The murder of Marx and Freud)'이다. 즉 포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반대는 그가 실제로 경험한 마르크스의 세계에 대한 부분도 있었고, 또 마르크스의 이론이 과학방법론에 위배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운동을 마치 뉴턴의 천체 역학이 일식을 예측하듯 과학적으로 예견하고 논거를 제시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도덕적으로 중대한 위험 요소를 앉고 있다.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청년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당위성에 설득 당하면, 그 젊은이는 자신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에 사로잡힌다.(64~65쪽) 라고 포퍼는 한때 마르크스의 추종자였다가 마르크스의 사상과 결별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정확한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이론은 경험과학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검증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는 앞서 예로 들었던 백신 접종 이론과 상반되며, 무엇보다 모든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이론들과 대조된다(189쪽)라고 말하며 프로이트의 이론을 사이비 과학으로 보고 있다. 이런 포퍼의 태도를 보면 자신이 주장하는 과학철학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다.

 

제2부는 포퍼의 과학적 방법론이 주제로 그러니까 그가 주장하는 과학 철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학적 방법의 절차는

첫 번째 단계, 기존의 문제

두 번째 단계, 시험적 가설들 세우기

세 번째 단계, 실험적 검증을 포함한, 비판적 논의를 통한 제거의 시도들

네 번째 단계, 가설의 비판적 논의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문제들 (183쪽)

 

이 절차가 그의 과학 철학의 핵심 내용으로 보여진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2006년)이란 책을 읽었더니 다산이 지식을 추구한 방법과 아주 유사한 데에 놀랐다. 포퍼는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거나 단계를 뛰어 넘어가면 그것은 사이비 과학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현상이다. 본질적으로 동적이며,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목표에 완전히 도달하는 시점이란 없다.(185쪽)

이 부분을 읽고는 수전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사이언스북스.2005년)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났다. 일생 동안 뇌를 연구한 학자도 많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느끼곤 한다. 이것은 머리 하나를 자르면 자리에서 다시 일곱 개의 머리가 자라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히드라와 비슷한 점이 있다.그렇기에 포퍼는 자신의 연구 결과 조차도 의심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현재 세계적인 추세는 과학이 중세 시대의 종교의 권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과학 만능주의에 빠져있는데 이를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포퍼의 과학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지식론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진화론을 그의 이론의 중심에 두고 있다. 책의 제목도 이지만 모든 생명체는 문제 해결 중에 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확히 포퍼의 뜻에 따르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글 제목인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도 어느 정도 통하지만 내가 보기엔 제가 제시한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포퍼가 가진 진화론 지식은 '유전자 결정론'돠 같이 보여지는 면도 있다.

 

나에겐 전체적으로 어려웠던 책이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나드는 포퍼의 광범위한 지식에 독자들은 아마 대단히 놀랄 것이다. 나도 그 독자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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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
기류 미사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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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축복 속에서 새로 태어나서 아기들도 있으며, 주위의 슬픔을 뒤로하고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탄생과 죽음은 인간들의 일상들과 가까이에서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탄생과는 달리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아마도 인식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탄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고, 죽음에 있어서는 본인이 직접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은 당사자가 일생을 살며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경혐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죽음에 대해서는 과연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모르기에 더욱 무서울 것이다. “인간은 삶이 무서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삶도 두려웠지만 죽음은 더욱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 <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노블마인.2007년)에서 보면 죽음이 그리 무섭지 않고, 어찌 생각하면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 책 속에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와 함께 수록된 많은 명화들은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죽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죽음이란 주제 하에 ‘죽음과 에로스’, ‘죽음과 욕망’, ‘현세에 대한 집착’, ‘자살을 둘러싼 기담’, ‘임종의 미학’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살로메와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고 많이 알려진 것이다. 특히나 유명한 화가들이 두 사람에 대한 유명한 그림이 있기에 더욱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그림 <세례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를 보면 살로메와 요한이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없으나, 티티안 베첼리오의 그림인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나 카를로 돌치의 그림 <살로메>를 보면 살로메가 죽은 요한의 머리를 안고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그림들로 이 책의 첫 번째 주제인 ‘죽음과 에로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성유물(聖遺物)은 기독교 성인의 신체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성유물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것은 성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일부나 그가 사용하던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과 욕망’이라는 두 번째 주제에 소개된 글 중 하나의 이야기이다.

남극 탐험가 스콧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사람들을 숙연하게 해준다. 그가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덴마크 국가가 남극점에 꽂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탐험대가 최초로 남극점에 가서 대영제국의 국기를 꽂아 남극을 영국의 영토로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실패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물론 그의 멋진 죽음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즉 스콧의 죽음은 멋진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의 화랑 관창은 어린나이 임에도 백제와의 전투에서 죽음으로 신라군에게 사기를 올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신라를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역시 그의 죽음도 멋진 것이었다.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 주제인 '임종의 미학’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거주지 부근에 납골당이나 화장터가 들어서는 것에 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을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표면에 들어난 반대 이유는 ‘다이옥신 등 공해문제, 부동산 가격의 하락문제’라고 한다. 공해문제는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면, 주민들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런던 같은 도시에 가보면 도심지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또 도심에 있는 교회 내에 묘지도 있는 형편이니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삶과 죽음을 극명하게 갈라놓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기독교 문화의 영향인 것 같다. 이 책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저자가 일본인이지만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주로 외국의 사례이다. 아마 저자가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것이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 책에는 죽음을 에로스와 연결시키고 또 아름다움(미학)까지 연결하는 등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삶과 죽음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일상사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좀 덤덤해 줄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준다. 다 읽고 나니 죽음이 이 책에서의 표현처럼 아름답지는 못할지 모르더라도 그렇게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대상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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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장의 역사 -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욕망, 그 매혹의 세계
베아트리스 퐁타넬 지음, 김보현 옮김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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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에서 떠오르는 붉은 아침 해를 바라보고, 또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가 안개가 자욱이 낀 산 아래를 처다 보면 우리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지른다. 감히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자연의 색과 모양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경외감까지도 느끼게 된다. 즉 ‘아름다움’은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인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의 몸도 아름다움이 가장 찬사를 받는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끄는 최대의 무기인 것이다. 특히나 얼굴의 아름다움은 몸 전체의 건강함과 균형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이 <치장의 역사>(김영사.2004년)라는 책 속에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여성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는 화장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런데 화장이나 치장은 여자들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종족들은 남자의 얼굴이나 몸에 치장을 한다. 물론 남자들의 치장은 적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강한 전사로 보이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치장은 아름답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렇듯 남자와 여자는 치장의 목적도 다르다. 이 책에서는 주로 유럽 여성들의 치장에 관한 내용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과 닮기 위해 화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는 화장을 한 여자는 당연히 악마의 피조물, 또는 조물주가 준 외모를 바꾸려 하는 오만한 여자로 받아들여졌다고 하니 화장의 의미는 시대나 공간에 따라서 그 목적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또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 이후 눈두덩에 발랐던 아이새도는 사막에서 눈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고 시력을 강화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는 말은 화장이 실제 생활에 도움을 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화장에는 아름다움을 위한 목적이외에 건강한 몸을 위해서도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에 여자들은 얼굴에 수은이나 은이 포함된 광천수나 화장품을 발라 피부를 그런 광물처럼 빛나고 탄력 있게 만들고 싶어했다. 수은을 얼굴에 발랐으니, 그 결과 수세기 동안 여성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이 됐을 것이다. 아니 위협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즉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저당 잡히기 까지 했으며, 아름다움을 대가로 그들은 생명을 잃기까지 했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수반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여인들은 창백해 보이기 위해 벨라돈나 풀에서 추출한 마약과 동공을 확장시키는 아트로핀을 복용했고, 또 눈 밑에 기미를 만들려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기도 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성형 수술도 하고 있다. 성형수술은 어쩌면 화장하는 것처럼 보편화된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성형 수술한 것을 감추려고 했으나 지금은 당당하게 표현한다. 여성들은 보통 성형을 하는 이유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여자들이 부정할 수도 있지만 멋진 상대를 만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성형을 한 거짓 미인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요즘은 워낙 기술이 좋아져서 수술한 티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하니, 남자들이여 예전에는 화장발만 조심하면 됐지만, 이제는 수술발도 조심해야 진정 미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화장과 몸치장에 관한 책이라서 그런지 중간에 주제와 관련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그린 멋진 명화들도 많이 나와 읽는 내내 즐거웠으며, 화장이란 것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보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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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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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이 문학사에서 비중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 ‘롤리타 신드롬’이나 ‘님펫’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만큼 유명해졌을까? 아마도 금기시되어온 소아성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사회 속에서는 소아성애가 널리 행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애써 시치미를 떼는 그런 부분을 과감히 수면위로 터뜨려버린 나보코프의 동기(?)때문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법률적으로는 소설의 두 주인공인 험버트와 롤리타는 부녀간이 아니었는가? 이런 금기를 깬 소재를 가지고 책을 냄으로써 출판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단 출판된 이후에는 전 세계에 1500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문학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한 책이다.

이 책은 내 경우에 결코 쉽지 않았다. 분량도 400쪽이 넘지만 어찌 보면 지루하기까지 한 부분도 있는 책이다. 다만 내가 끝까지 읽은 이유의 하나는 이 책이 세계명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책을 내가 끝까지 읽지 못한다는 것은 최소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뒤로 가면서 무언가 이 책이 주는 어느 정도의 메시지를 파악할 만큼 이 책은 추리소설과 같은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 저자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단어 조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원서를 본 것은 아니지만, 번역자의 각주의 해석에 의한다면 그는 자신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독자들에게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다. 역자의 친절한 해석이 없다면 아마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인 중년의 험버트는 정말로 롤리타를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롤리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했다. 과연 사랑이란 상호교감과 마음속의 교류가 있어야만 사랑인가? 그러면 외사랑은 사랑도 아니란 말인가? 이 정의에 의한다면 험버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병적인 집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사랑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험버트의 사랑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평론가 트릴링은 이 소설을 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얘기인 것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험버트의 경우도 사랑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은 포르노 소설인가?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책이 단순한 포르노 소설이 아니란 증거는 포르노그래피적인 구체적인 성적 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포르노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또 다른 그림은 아닐까? 어쩌면 저자는 이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상업적인 성공의 비결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배심원들에게 자신을 변호하거나 과거를 회고하는 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인공인 험버트의 심리묘사 위주로 되어있다. 상황묘사보다는 심리묘사에 비중을 두다보니 이런 점이 독자들에게 어려움을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다른 소설과 차별화되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대단히 많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우만 한 번 살펴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66세의 영조와 혼례를 올릴 때에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 나이차가 51년이니 할아버지와 손녀와 같은 관계였다.

로크놀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서른 살의 나이에 열네 살의 프리실라와 결혼했다.

코미디 배우 찰리 채플린은 스물아홉 살 때에 16세의 여배우 밀드레드 헤리스와 결혼했으며, 36세 때에 역시 16세의 여배우 리타 그레이(릴리타)와 결혼했으며, 54세 때엔 18세의 우나 오닐과 결혼했다. 그리하여 소설 롤리타의 주인공이 혹시 채플린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는 어린 소녀와 결혼을 여러 번했다.

미국 영화감독이자 영화배우 우디 앨런은 열여섯 살의 순이와 결혼함으로써 아내인 영화배우 미아 패로우와 헤어졌다.

1977년 깐느 영화제에서 열다섯 살의 여배우 나스타샤 킨스키를 옆에 끼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어주 어린 소녀들이 좋아요”. 이 사람이 바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다.

자! 나이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리 적지는 않다고 보이지 않는가!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여자의 어린 나이이다. 어리다는 의미는 남자를 위해 많은 자녀를 낳아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해보라 25세의 신부보다 15세의 신부가 남편의 아이를 10년이나 더 낳아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 때문에 인류는 오래전부터 나이 어린 여자를 선호했다고 생물학자들은 분명이 얘기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자들은 어리게 보이기 위하여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국내에서도 여자 연예인들의 데뷔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또 한국이나 일본에서 여학생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대가로 중년남자와 사귄다는 ‘원조(援助)교제’도 일종의 롤리타신드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는 과연 저자인 나보코프의 일생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이 소설의 내용이 혹시 그의 실제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저자의 후기에 보면 “그리고 님펫에 관한 것 말고도 내가 그(험버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많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소아성애자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철저히 픽션을 쓴 것임에도 독자들이 겸험이 뒷받침된 책이라고 생각할 만큼 나보코프의 리얼리티에 빠져 들어가 버린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나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아마추어 인시류학자(나비와 나방을 연구하는 사람)였다고 한다. 나보코프는 생물학 분야에서 정식 교육을 이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40년대에 이미 남아메리카의 가장 외진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나비 무리를 아우르는 명칭인 ‘블루’의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최근 나보코프의 이런 나비 연구결과를 보여주는 ‘나보코프 블루스’라는 책이 나왔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다. 나비란 동물이 어쩌면 사랑을 옮기는 동물이 아닌가!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가장 인시류학이 가장 나보코프다운 연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것은 나의 지나친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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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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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식량생산량은 60억 명의 지구 인구의 두 배인 120억 명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왜 굶는 사람이 생기는가? 물론 단기적으로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하여 국지적인 기아가 발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간 기후 등의 이유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120억 명을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데, 굶는 사람이 많다면 그 잉여 식량은 어떻게 처리 된다는 이야기인지 잘 모를 일이다. 과잉생산되는 식량은 선진국에서 폐기처분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농산물 가격을 하락을 막음으로써 자국 농민들의 수입을 보존해주기 위해서이다. 즉 식량의 기격이나 생산량의 결정, 유통 등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 이윤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는 말은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남한은 북한에 식량 및 비료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이것은 북한 사람들에게 풍족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기아선상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나머지 국가에서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나 세계식량계획(WFP, World Food Programme)과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전 세계의 기아지역에 식량 등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2005년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그러면 1분에 12명, 1시간이면 720명, 하루에 252,800명이라는 의미, 상상이 안 간다),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한 명꼴이라고 한다. 뭔가 통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끔찍하게 보이는 통계수치가 사실이라고 하니, 뭔가 심각한 문제가 이 수치 안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전쟁보다도 무서운 것이 기아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 통계수치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주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주범은 바로 ‘세계 경제 질서’라고 한다. 아니 질서라고 하기에는 무질서한 것 아닌가? 과연 이것은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 질서의 중간에는 바로 세계화가 있다. 세계화를 움직이는 동인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의 목적인 바로 이윤인 것이다. 이윤은 결코 도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덕이나 윤리조차도 이윤에 방해가 된다면 이윤은 그것들을 과감히 버릴 것이다. 세계화의 그늘 속에서 빈곤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들을 보면 거의 가 농업 국가들이다.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떡장수는 떡을 하나 더 먹을 수 있는 것인데, 농업을 하면서도 식량이 없다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구상에서 곡물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인 브라질에서도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살인적인 금융과두제’ 가 모든 중요한 물품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브라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정부가 제대로 정책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의 원인은 바로 금융 즉 자본인 것이다. 한 나라의 행정권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고 있는 금권, 즉 자본의 힘 앞에 행정은 무릎을 꿇고 있는 금권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이게 브라질만의 문제인가? 이는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세네갈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세네갈은 농업국가로 땅콩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주식은 쌀이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주식인 쌀을 경작하지 않고 땅콩을 생산하고 있는가? 그것은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가 필요한 땅콩만을 키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한 지금도 땅콩을 생산해 유럽으로 수출하고 그 돈으로 외국에서 자신들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입도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있어서 자신의 나라에서 쌀을 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네갈은 식민지 지배의 유산과 공직자들의 부패로 인해서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기아로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도태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선진국들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놓았던 사회진화론이 아닌가! 즉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약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약육강식의 장에서 사라진다고 하는 이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아로 인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지구의 인구밀도를 조절하는 자연의 메카니즘으로 생각한다고 하니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차별주의가 아직도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하다.

기아에는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한다고 하며,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즉 경제적 기아는 단기적인 기아현상이고 구조적 기아는 장기적인 문제이다. 특히나 ‘구조적 기아’는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하고 하니 오히려 해소하기 쉬운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아는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고 있다고 한다.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수백만의 엄마들이 수백만의 건강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육식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이 부유한 나라에서 소들이 먹는다고 한다. 미국 갤리포니아주에 있는 소 사육시설(피드 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의 연간 필요량보다 많다고 한다. 이 소는 선진국 사람들의 식탁으로 올라가고 그들은 영양과잉섭취로 인하여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그 옥수수조차도 먹지를 못해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비만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일은 소고기의 소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미국에서 수입해 오는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겠다.

원인을 알았다면 아마 해결책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라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나! 자유로운 시장 경제에 저항해야 하고, 현재의 경제 지배자들이 각성하고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며, 세계 여론이 동원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아마 달성되지도 않을지 모른다. 슬픈 현실이다.

이 책의 저지인 장 지글러는 실제 전 세계 기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2000년도부터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형식은 저자가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들에게 조곤조곤 쉽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쉽게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을 몸으로 실천해야할 의무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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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7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