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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의 식량생산량은 60억 명의 지구 인구의 두 배인 120억 명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왜 굶는 사람이 생기는가? 물론 단기적으로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하여 국지적인 기아가 발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간 기후 등의 이유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120억 명을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데, 굶는 사람이 많다면 그 잉여 식량은 어떻게 처리 된다는 이야기인지 잘 모를 일이다. 과잉생산되는 식량은 선진국에서 폐기처분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농산물 가격을 하락을 막음으로써 자국 농민들의 수입을 보존해주기 위해서이다. 즉 식량의 기격이나 생산량의 결정, 유통 등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 이윤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는 말은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남한은 북한에 식량 및 비료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이것은 북한 사람들에게 풍족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기아선상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나머지 국가에서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나 세계식량계획(WFP, World Food Programme)과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전 세계의 기아지역에 식량 등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2005년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그러면 1분에 12명, 1시간이면 720명, 하루에 252,800명이라는 의미, 상상이 안 간다),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한 명꼴이라고 한다. 뭔가 통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끔찍하게 보이는 통계수치가 사실이라고 하니, 뭔가 심각한 문제가 이 수치 안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전쟁보다도 무서운 것이 기아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 통계수치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주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주범은 바로 ‘세계 경제 질서’라고 한다. 아니 질서라고 하기에는 무질서한 것 아닌가? 과연 이것은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 질서의 중간에는 바로 세계화가 있다. 세계화를 움직이는 동인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의 목적인 바로 이윤인 것이다. 이윤은 결코 도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덕이나 윤리조차도 이윤에 방해가 된다면 이윤은 그것들을 과감히 버릴 것이다. 세계화의 그늘 속에서 빈곤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들을 보면 거의 가 농업 국가들이다.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떡장수는 떡을 하나 더 먹을 수 있는 것인데, 농업을 하면서도 식량이 없다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구상에서 곡물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인 브라질에서도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살인적인 금융과두제’ 가 모든 중요한 물품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브라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정부가 제대로 정책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의 원인은 바로 금융 즉 자본인 것이다. 한 나라의 행정권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고 있는 금권, 즉 자본의 힘 앞에 행정은 무릎을 꿇고 있는 금권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이게 브라질만의 문제인가? 이는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세네갈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세네갈은 농업국가로 땅콩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주식은 쌀이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주식인 쌀을 경작하지 않고 땅콩을 생산하고 있는가? 그것은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가 필요한 땅콩만을 키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한 지금도 땅콩을 생산해 유럽으로 수출하고 그 돈으로 외국에서 자신들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입도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있어서 자신의 나라에서 쌀을 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네갈은 식민지 지배의 유산과 공직자들의 부패로 인해서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기아로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도태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선진국들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놓았던 사회진화론이 아닌가! 즉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약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약육강식의 장에서 사라진다고 하는 이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아로 인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지구의 인구밀도를 조절하는 자연의 메카니즘으로 생각한다고 하니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차별주의가 아직도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하다.
기아에는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한다고 하며,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즉 경제적 기아는 단기적인 기아현상이고 구조적 기아는 장기적인 문제이다. 특히나 ‘구조적 기아’는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하고 하니 오히려 해소하기 쉬운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아는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고 있다고 한다.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수백만의 엄마들이 수백만의 건강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육식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이 부유한 나라에서 소들이 먹는다고 한다. 미국 갤리포니아주에 있는 소 사육시설(피드 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의 연간 필요량보다 많다고 한다. 이 소는 선진국 사람들의 식탁으로 올라가고 그들은 영양과잉섭취로 인하여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그 옥수수조차도 먹지를 못해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비만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일은 소고기의 소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미국에서 수입해 오는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겠다.
원인을 알았다면 아마 해결책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라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나! 자유로운 시장 경제에 저항해야 하고, 현재의 경제 지배자들이 각성하고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며, 세계 여론이 동원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아마 달성되지도 않을지 모른다. 슬픈 현실이다.
이 책의 저지인 장 지글러는 실제 전 세계 기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2000년도부터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형식은 저자가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들에게 조곤조곤 쉽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쉽게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을 몸으로 실천해야할 의무를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