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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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발칙한 유럽산책>(21세기북스.2008년) 표지에는 “공공장소에서 읽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을 붙였어야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를 잊었다. 나는 이 대가를 전철에서 톡톡히 치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분명히 이 책도 웃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웃음을 참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작과 함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도 지하철 안에서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정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읽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웃음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1990년대 초에 유럽을 여행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책의 중간에 그가 처음 유럽여행을 할 때의 상황도 함께 그의 기억 형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2002년)을 읽은 사람들은 기억을 할 테지만, 브라이슨의 친구인 스티븐 카츠가 이 책에서도 나온다. 나는 카츠란 이름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빌 브라이슨은 그의 나이 20대 초에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한다. 그리고 친구인 카츠와 두 번째 여행을 하고 1990년대 초 그러니까 브라이슨이 40대 초반에 이 책의 주요 내용이 되는 여행을 한다.

일단 이 여행의 시작은 ‘함메르페스트’다. 아마 이 도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함메르페스트는 지구상에서 위도 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부동항으로 지리시간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 있는 이 도시로 브라이슨은 오로라를 보러간다.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거쳐 마지막에는 터키까지 가서 그의 여행이 끝이 난다.

빌 브라이슨은 이 긴 여정에서 지도책과 열차시간표만을 가지고 다닌다. 호텔이나 교통편 예약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자유롭게 다닌다. 한 도시에서 관광을 하다가 언제라도 실증이 나면 바로 다른 도시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미국 중부 지역에 있는 아이오와 주 출신인 그에게 유럽은 결코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유럽 여행을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근사한 대륙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만 가면 주민들의 말도, 음식도, 업무시간대도 다르고, 주민들은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면서도 묘하게도 비슷한 곳, 나는 이런 근사한 대륙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57쪽)

 

빌 브라이슨이 프랑스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으로 겪고는 이런 말을 한다. 영국기업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 세 가지를 질문했는데, 그 대답이 아주 재미있다. ‘정원에 두는 못생긴 요정 조각상’, ‘자동차 유리에 매다는 주사위’, 그리고 ‘프랑스 사람’이었다고 말을 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원한 앙숙인가보다. 영국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을 싫어하지만 ,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람들도 자신의 나라를 점령했던 독일보다는 오히려 영국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빌 브라이슨은 여행하는 여러 나라의 사람이나 문화에 대해서 신랄한 평가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브라이슨이 마치 인류학자 같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빌 브라이슨이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전역을 여행한다고 영국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까 그들은 브라이슨에게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는지를 되물었다. 그런데 실제 브라이슨은 영어밖에는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도책만 가지고 예약도 없이 유럽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는 그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해당국가의 언어를 못하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중간 중간에 투덜거리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또한 여행지에서 무시당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죄충 우돌 하면서 해결하는 모습을 아주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욕도 잘하고, 성에 관한 농담도 아주 재미있다. 정말 요즘처럼 웃을 일이 없는 때에 웃음을 유발할 수 있도록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시대 최고의 기행문 작가라는 명성을 듣고 있는 빌 브라이슨,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주는 책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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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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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묘하다. <무지개를 풀며>(바다출판사.2008년)라니 이 책은 분명히 과학책이 분명하지만, 제목이 쉽게 와 딛지 않는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8년 펴낸 책이다. 먼저 제목에 담긴 의미를 먼저 알아보자.

‘무지개를 풀며(Unweaving the Rainbow)'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그의 시 <라미아>에서 아이작 뉴턴이 분광학을 통해 무지개를 풀어헤쳤기 때문에 무지개에 대해 낭만적 시성(詩性)이 사라져 버렸다고 이야기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키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뉴턴의 분광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의 비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실제적인 우주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위대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다.”

도킨스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좋은 사회를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로서 DNA 구조발견으로 인한 법정에서의 활용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또한 사이비 과학이 마치 과학인양 탈을 쓰고 대중을 현혹하는 현실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 특히나 점성술과 마술, 텔레파시, 신비주의 등에 대해 통계를 이용해 그것들의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계를 이용해 설명을 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사이비과학에 대한 질타는 동료 과학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연계된다. 동료 생물학자였던 스티븐 J. 굴드를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질타하고 있다. 굴드가 사망했기에 지금은 둘이 논쟁을 벌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생전에 진화라는 큰 테두리에서는 서로간의 다정한 동료였지만, 진화의 메커니즘과 많은 부분에서 크게 대립했음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굴드가 2002년 60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을 때 도킨스는 그를 기리는 헌사를 신문에 게재했으며, 또 도킨스는 자신의 책 <악마의 사도>(바다출판사.2005년)에서도 굴드에게 진한 존경과 동료애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알아낼 수가 있다.

또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에 대한 부분을 보자. ‘가이아 가설’에서 러브록은 지구가 마치 유기체처럼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지구 대기의 공기가 적정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한다. 이 공기는 박테리아가 메탄가스를 생산해서 대기의 화학적 조성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러브록은 박테리아가 마치 지구를 위해서 메탄가스를 생산해내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고 도킨스는 비판한다. 도킨스의 비판은 ‘이기적 유전자’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자면 박테리아는 지구를 위해서 메탄가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를 위한 행동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생명체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대기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은 12장 ‘마음의 풍선’이었다. 이 부분에서 도킨스는 인간의 뇌의 폭발적인 진화를 설명하면서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공진화에 비유하는 내용은 가장 도킨스 다운 것이었다.

 

도킨스 만큼 비유와 상징을 잘 쓰는 과학 저술가는 흔하지 않다. 정말 키츠가 살아 돌아와 도킨스의 저서를 본다면 아마 키츠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도킨스에게 사과할 것 같다.

 

항상 도킨스의 책에서 느껴지는 지적 오만은 이 책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 학문적인 자신감 때문일 테지만, 때로는 읽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거만하게 사이비과학이나 유사과학을 질타하는 그의 목적은 바로 그의 과학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이다. 어쩌면 도킨스는 과학을 신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과학예찬론은 한계가 없다.


과학으로 무지개를 풀어 헤친 것이 낭만주의를 없앴다는 키츠의 주장에 대해 도킨스는 오히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시정은 더욱 풍부해졌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책 전체에 걸쳐서 논증을 한 후 이렇게 말한 후 이 책을 맺음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키츠와 뉴턴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우주의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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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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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이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이는 뇌의 팽창에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언어의 기능은 일단 서로의 의견을 ‘말’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또한 바디 랭귀지도 하나의 언어 수단이다. 이는 다른 동물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수단은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중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시각적인 표현을 통해서 남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미술이고, 청각을 통해서 하고자 한 것이 음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음악에 대한 오래된 유물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미술은 남아있다. 선사시대에 바위나 동굴에 그려진 그림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이 된다. 울산광역시 울주 지역에도 바위위에 그려진 선사시대 암각화가 존재한다.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주술적이고 교육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즉 그려진 동물을 더 많이 잡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신에게 부탁하는 종교적이고도 주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고,  또한 이 그림에 나와 있는 동물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시대 이후에 미술은 선사시대와 의미가 다르게 변했을까? 사실 미술은 문외한들에게 결코 쉽게 그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특히나 추상화나 현대 미술의 경우에는 일반인들이 해석을 하기에는 너무도 난해하다. 그렇기에 잘 아는 사람들의 해설이 필요하다. 그 해설을 들어야만 우리는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에드바르트 뭉크의 유명한 작품인 <절규>(The scream)를 보면 우리들은 작가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서 뭉크의 가까운 가족(어머니, 누나)의 죽음과 또한 뭉크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규>라는 그림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 뭉크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미술작품을 일반인들이 읽어내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미술평론가 혹은 미술비평가라고 부른다. 평론가들의 기본적인 역할은 미술작품들을 시대별이나 혹은 유형별로 구분해서 일목요연하게 분류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주제에 맞추어 대상들을 분류해서 비슷한 것끼리 짝지우고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본능적인 부분이다. 평론가들은 우리 인간이 그동안 지구상에서 쌓아올린 시각언어인 미술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만큼 그들의 연구결과는 작품의 의미를 판단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항상 미술 작품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평론가들은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각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아울러 그 작품의 작가에 대한 개인 정보, 혹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나 공간에 대한 정보를 통해서 그 작품의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해당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평가의 견강부회도 있을 수 있고, 작품에 어떠한 큰 의미가 없음에도 괜스레 부풀려 무언가 중대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해설을 듣는 다면 우리는 그래도 최소한 작품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서양 미술사 1>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많은 미술 비평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비평가들은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미학’으로 무장하고 있는 또 한명의 미술평론인 진중권이다. 그가 소개하는 대로 들어가 보자.

 

첫째 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비례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해 준다. 비례나 균형은 인간이나 동물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에서 비롯해 뒤러의 작품을 통해 비례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미술에서 비례가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회화에 대한 시대의 관념이 바뀌면서 비례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 이유를 진중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회화의 본질을 사물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에서 찾게 되자,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례론이 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바로크는 어차피 형보다는 색에 주목하는 시대였다.”

 

여섯 번째 장에 나오는 ‘트롱프뢰유’는 아주 재미있다. 트롬프뢰유(trompe l'oeil)는 ‘눈을 속이다’라는 뜻의 불어다. 미술사에서 최초로 트롬프뢰유를 사용한 화가는 바르바라인데, 그의 그림 <자고새가 있는 정물>을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마치 자고새가 정말 화살에 맞은 채 벽에 걸려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상으로 착각을 한다고 하니, 정말 글자 그대로 ‘눈을 속이는 것이다’. 트롬프뢰유는 성당의 천장화로 연결되어 로욜라 성당의 천장화는 마치 환영의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한스 제들마이어의 저서를 토대로 고전예술의 이념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화보수주의자로서 제들마이어는 현대 예술의 건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인간상의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진중권은 “신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예술이 영원한 인간의 상을 추구하던 시대는 아마 되돌아 올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제들마이어의 의견에 대해 반대하며 이 책을 끝맺고 있다.


저자는 <서양미술사 1>로 시작된 이미지의 역사를 매년 한 권씩 출간하여 총 4권짜리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니, 상당한 공력을 들여 좋은 책을 만들려고 한다는 느낌이 든다. 진중권의 멋진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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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라는 것 - 아내들은 알 수 없는 남편들의 본심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구계원 옮김 / 열음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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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결혼을 하면 당연히 남편이 된다. 그러나 남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남편 노릇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보통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남들도 하니까 결혼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의 역할이나 아내에 대한 배려나 대화에 대해 우리는 배운 바가 없다. 이런 상태이기에 부부사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을 한다. 연애할 때는 아주 좋았던 둘 사이의 관계가 생각지 못했던 문제로 삐걱거리기 시작함을 느낀다. 연애기간동안 보았던 아내의 모습과 집안에서 매일 마주치는 아내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 느낄 것이다. 마치 결혼 전과 후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남자와 여자는 아주 다른 존재하는 것을 가슴속 깊이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결혼해서 느낀 것들이다.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여자를 사귈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에 집중된다.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사랑에 있어서 남녀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있어서 외도는 당연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책 <남편이라는 것>(열음사.2008년)의 저자인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의사 출신의 작가로 의학적인 시각으로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추적하는 소설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얘기하기가 곤란한 부분이 있다. 겉으로 드러내 이야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남자의 외도와 여자의 외도에 대한 차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아주 원초적이고 직설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의 외도는 밖에서 배출하고 오는 것인데 비해 아내의 외도는 밖에서 받아오는 것이다.....특히 외도를 한 상대편 남자의 정자가 혹시 아내의 몸(질) 내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 남편은 주체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남자가 여자의 외도를 용서하지 않는 이유를 ‘부계 확실성’ 때문이라고 한다. 즉 아내가 낳은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남자는 외도한 여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훨씬 더 노골적이다.

책 속의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처가 식구들에 대한 남편의 생각과 행동은 분명 일본의 경우이다. 그러나 어쩌면 한국 사회와 이리도 닮아 있는지에 대해 놀랍다. 이렇게 닮아 있는 부분은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서 저자는 남자의 이중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이 다루고 있다. 아내와 맛 벌이를 하고 있기에 혼자서 벌 때보다 재정적으로는 훨씬 더 좋으나, 남자들은 아내가 항상 전업주부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집에 돌아와서 편하게 지내고 싶고 가사에서 해방되고 싶은 귀차니스트이가 바로 남편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고개가 끄덕여 졌다.

또 이 책의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섹스에 대해서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저자가 마초가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삽입’이란 단어를 아주 쉽게 사용하고 있다. ‘삽입’이라는 단어는 대화에서 쉽게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저자는 아주 편안하게 이 단어를 말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남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저울추가 남성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부일처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아주 도발적이다. 저자의 의견은 일부일처제란 ‘인기 없고 약한 남성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로 보고 있다. 이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21세기 중반이 되면 21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일부일처제라는 제도가 옛이야기에서 나오는 말로 변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방문혼이나 주말부부, 별거 부부, 미혼모 등 다양한 결혼의 모습이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일부일처제가 여자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남성들을 위한 제도였기에, 앞으로는 여자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이런 다양한 결혼제도가 발생하리라고 보는 저자의 논지는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수천 년 이상이나 내려온 일부일처제가 그리 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일부일처제는 생물학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문제의 소지가 많은 제도 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변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튼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면서 정말 남편이란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에 대해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게다가 앞으로는 더욱 많은 어려움들이 남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살아간다는 것이 첩첩산중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혹시나 이 책을 다 읽으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읽기는 했지만 다 읽고난 기분은 좋은 남편이 되기는 결코 쉽지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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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카를로 페트리니 지음, 김종덕.황성원 옮김 / 이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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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내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해서 시끄럽다. 미국산 소고기가 위생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들은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에 걸려있을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왜 미국산 소고기에는 광우병이 있을까?

 

소는 초식동물이다. 초원의 풀밭에서 풀을 뜯어 먹고 살아온 소는 이나 위장 등은 초식에 맞게 적응되어 왔다. 그런데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적인 축산방법은 소에게 다른 소의 고기나 뼈로 만든 사료를 먹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유전자조작(GMO) 옥수수를 식용으로 도입한다고 하는데, 이는 큰 문제가 생길 개연성이 충분하다.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는 문제가 없으리라고 보고 있지만, 나중에 이것이 중대한 문제를 발생할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나? 마이클 폴란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진다.


21세기 현재 세계의 식량 생산량은 120억 명이 먹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음식물을 많이 섭취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비만으로 인해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다른 쪽에서는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한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다. 또한 충분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만 이 음식 모두가 우리 몸에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패스트 푸드를 비롯해 많은 먹거리에 문제가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미국산 소고기에서부터 GMO 식품들, 그리고 산업화된 식량생산 방식은 우리 몸에 해롭기까지 한 식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슬로 푸드 운동’이다. 슬로 푸드라는 단어 자체는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미국식 패스트 푸드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에 와서 ‘슬로 푸드’가 가진 의미는 크게 확장이 되었다.

이 책 <슬로 푸드, 맛있는 혁명>(이후.2008년)은 슬로 푸드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슬로 푸드 운동을 시작한 장본인이고, 국내 번역자인 김종덕은 대학의 교수로 2000년에 처음 우리나라에 슬로 푸드 운동을 소개한 사람이다.

 

저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우리가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첫째, 먹을거리가 건강에 이롭고 또한 맛이 있어야 하며. 둘째 먹을거리는 깨끗함과 동시에 환경에 염두를 두면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하며, 셋째 먹을거리는 공정해야 하며,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도 건강하고 질 높은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터전인 지구와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동식물도 건강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미식학(gastronomy)'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통해서 슬로 푸드 운동을 완성하고자 한다. ’미식학‘에 대한 정의를 보면, “미식학은 음식과 그것을 만드는 모든 자연적이며 인공적인 시스템에 대한 연구’라고 하고 있다. 이 정의에서 보자면 미식학은 매우 폭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미식학은 식물학, 유전학, 물리학,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여러 학문과 연관이 되어있고, 인류학, 사회학, 지정학, 정치경제학과도 깊이 연관이 되어 있는 다학문적 분야이다. 이런 미식학을 통해야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처해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식학’이 중요한 학문으로 연구되고, 또 이를 우리네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람들이 미식가로서 교육을 받아야 하며, 둘째 농부만이 아니라 소비자 또한 공동 생산자가 되어야 하며, 셋째 현대의 산업복합체와 전통 영농 방법과 문화 등 서로 다른 영역 간에 유기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산업혁명이후 불어 닥친 산업화를 통한 대량생산이나 극단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을 너무 빠르게 만들어 가고 있다. ‘빠름’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복음이고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빠름’에서 나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느림’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슬로 푸드를 비롯하여 생활 전반에 걸친 슬로 라이프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와 우리 후손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슬로 푸드와 슬로 라이프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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