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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ㅣ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이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이는 뇌의 팽창에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언어의 기능은 일단 서로의 의견을 ‘말’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또한 바디 랭귀지도 하나의 언어 수단이다. 이는 다른 동물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수단은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중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시각적인 표현을 통해서 남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미술이고, 청각을 통해서 하고자 한 것이 음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음악에 대한 오래된 유물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미술은 남아있다. 선사시대에 바위나 동굴에 그려진 그림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이 된다. 울산광역시 울주 지역에도 바위위에 그려진 선사시대 암각화가 존재한다.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주술적이고 교육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즉 그려진 동물을 더 많이 잡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신에게 부탁하는 종교적이고도 주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고, 또한 이 그림에 나와 있는 동물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시대 이후에 미술은 선사시대와 의미가 다르게 변했을까? 사실 미술은 문외한들에게 결코 쉽게 그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특히나 추상화나 현대 미술의 경우에는 일반인들이 해석을 하기에는 너무도 난해하다. 그렇기에 잘 아는 사람들의 해설이 필요하다. 그 해설을 들어야만 우리는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에드바르트 뭉크의 유명한 작품인 <절규>(The scream)를 보면 우리들은 작가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서 뭉크의 가까운 가족(어머니, 누나)의 죽음과 또한 뭉크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규>라는 그림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 뭉크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미술작품을 일반인들이 읽어내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미술평론가 혹은 미술비평가라고 부른다. 평론가들의 기본적인 역할은 미술작품들을 시대별이나 혹은 유형별로 구분해서 일목요연하게 분류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주제에 맞추어 대상들을 분류해서 비슷한 것끼리 짝지우고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본능적인 부분이다. 평론가들은 우리 인간이 그동안 지구상에서 쌓아올린 시각언어인 미술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만큼 그들의 연구결과는 작품의 의미를 판단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항상 미술 작품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평론가들은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각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아울러 그 작품의 작가에 대한 개인 정보, 혹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나 공간에 대한 정보를 통해서 그 작품의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해당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평가의 견강부회도 있을 수 있고, 작품에 어떠한 큰 의미가 없음에도 괜스레 부풀려 무언가 중대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해설을 듣는 다면 우리는 그래도 최소한 작품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서양 미술사 1>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많은 미술 비평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비평가들은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미학’으로 무장하고 있는 또 한명의 미술평론인 진중권이다. 그가 소개하는 대로 들어가 보자.
첫째 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비례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해 준다. 비례나 균형은 인간이나 동물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에서 비롯해 뒤러의 작품을 통해 비례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미술에서 비례가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회화에 대한 시대의 관념이 바뀌면서 비례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 이유를 진중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회화의 본질을 사물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에서 찾게 되자,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례론이 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바로크는 어차피 형보다는 색에 주목하는 시대였다.”
여섯 번째 장에 나오는 ‘트롱프뢰유’는 아주 재미있다. 트롬프뢰유(trompe l'oeil)는 ‘눈을 속이다’라는 뜻의 불어다. 미술사에서 최초로 트롬프뢰유를 사용한 화가는 바르바라인데, 그의 그림 <자고새가 있는 정물>을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마치 자고새가 정말 화살에 맞은 채 벽에 걸려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상으로 착각을 한다고 하니, 정말 글자 그대로 ‘눈을 속이는 것이다’. 트롬프뢰유는 성당의 천장화로 연결되어 로욜라 성당의 천장화는 마치 환영의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한스 제들마이어의 저서를 토대로 고전예술의 이념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화보수주의자로서 제들마이어는 현대 예술의 건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인간상의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진중권은 “신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예술이 영원한 인간의 상을 추구하던 시대는 아마 되돌아 올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제들마이어의 의견에 대해 반대하며 이 책을 끝맺고 있다.
저자는 <서양미술사 1>로 시작된 이미지의 역사를 매년 한 권씩 출간하여 총 4권짜리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니, 상당한 공력을 들여 좋은 책을 만들려고 한다는 느낌이 든다. 진중권의 멋진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