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더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과 끝이 난 그 시점에서, 이미 격렬하게 그 사람을 미워했고, 미움이 끝난 뒤에는 그 반작용으로 그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었으며, 이윽고 지금에 이르러 쓸쓸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더이상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을. 반년전에 울면서 쓴 여기 서재글을 보면서 많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버린 것, 끝나버린 것을 다시 손에 쥐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짓은 없는데도.

 

내가 계속 그 사람의 뒤를 쫓았던 것은 내 마음속의 그 사람이었다. 그러니깐 이상화된 그녀. 내 마음속의 그녀는 누구보다도 착했고, 똑똑했고, 예뻐보였다. 거기에 나와 함께 보냈던 추억들까지 조미료로 더해지니깐 그 후에 누구를 만나도 마음에 안차는거야. 실제로는 그 사람은, 그렇게까지는 예쁘지 않았고, 솔직히 나빴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하거나 현명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은근한 허영심이 있었고, 어린애같이 고집부리기를 좋아했다. 말로는 나에게 선택을 맡긴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내어 그 마음에 맞춰주어야만 했다.

 

그녀를 잊지 못해서 여전히 지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통해서 카톡프로필을 가끔씩 확인한 적이 있는데, 원래 그 사람이 사진빨이 잘 안받는 편임을 감안해도 매번 놀라기 시작했다. 사귈땐 그렇게 이뻐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까지 예뻐보이지는 않았고, 종국에는 흐음.. 정도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마음을 속이고 '이 아이는 여전히 예뻐' 라고, 애처로울 정도로 그녀를 옹호했고, 그러다보니 더욱 그녀는 - 적어도 나와 사귀었던 당시의 그녀는 - 이상화된 모습으로 내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았다.

 

저때 내 마음을 완전히 접었어야만 했는데, 하지만 나는 정말 바보같게도 스스로를 더욱 속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녀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깐,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거야, 라고. 이 무슨 망발인가. 그럴리가 없잖는가. 화학적으로 낭만적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박증'과 구별하기 어렵기에 화학적 물질을 그대로 구현시킨다면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아마 나는 저런 강박을 가지고 계속 그녀에게 집착했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왜 그때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 아마 이렇게 질문하면 그녀는 당신의 상처는 날이 지나면 아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곪아가는군요, 라고 다시 힐난할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힐난했으니 이번이라고 다르겠는가.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내 마음가짐인데, 사실 이젠 상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장에 상처가 났다고 몇 번이고 주절거렸는데, 그 상처가 곪고 썩어서 가슴한가운데 뻥- 하고 구멍이 뚫렸다. 그래서, 음.. 그래서 이제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렇지가 않다. 감정이, 그렇게 격렬하게 사랑했던 그녀를 격렬하게 미워하던 그날 밤, 울면서 운전대를 잡고 반쯤 정신나간채로 도로를 달리던 비오던 그날 밤, 끝났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고 믿었는데, 그건 그녀와 있을때 계속 미친듯 내 심장이 뛰었던 기억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은 이제는 없지만 아직 머리는 남아있어서, 손을 잡았을때 멍청하게도 심장이 뛰던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렇게 기억이 남아있으니 나는 계속 내가 그때, 아직 심장이 있었던 때에 머물러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야 내 가슴을 내려다보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을 자각하고서야,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아, 이미 예전에 없어졌지, 라고. 다만 나에게 미련이 있다면, 하루 하루 나쁜 놈이 되어가는 스스로를 보면서 과거의 나는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잖아' 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나의 기억들, 선하고 상대에게 푹빠져서 사랑할 줄 알았던 나는, 다른 상대들에게도 그렇게 해야만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럴 원동력을 찾아내라고 시키면 그저 그 팔을 들어 과거의 그 사람을 가리킨다. 저기 있으니, 저기 모든게 남아있으니, 저기 가서 가져오라고. 그래, 나는 그녀에게 내 모든 선함, 착함, 그리고 순수함을 다 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서 돌려받든지, 아니면 완전히 폐기해버리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결혼은 조건맞춰서, 결혼할 시기에 만나는 사람이랑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사람은 '내가' 좋아해야 좋은 사람인거다. 그럴바에야 이런 사랑같은 파괴적인 화학적 작용은 그만두는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항상 사랑이 파괴적인 화학적 결함이라고 주장했는데 직접 증명해줘서 고맙군.

 

BBC드라마 셜록을 꽤 많이 봤는데 - 이놈의 셜록때문에 정장도 사고, 안에 받쳐입을 와인색 남방도 사버렸다. 이렇게 입는다고 해서 셜록처럼 핏이 나지는 않을텐데. 나에겐 키가 없으니깐. 그래도 어쨌든 혼자 만족하면서 키키키 웃고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화를 꼽으라면 시즌2의 1화다. 아이린 애들러가 나오는. 거기서 마지막에 셜록이 아이린 애들러의 손목을 잡으면서 저런 이야기를 한다. 맞다. 정말 맞는 말이다. 끝내 사랑이라는 감정을 버리지 못한 아이린 애들러는 셜록에게 패하고 만다. 물론 셜록에게서 The woman이라는 칭호를 얻긴 했지만, 어쨌든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감정조차 초연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국엔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셜록은 이런 말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안그래?

그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사과가 지구를 향해 떨어지듯,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하듯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머리가 차가워진 지금에야 그녀의 수많은 단점들이 보이지만, 그리고 그녀는 나의 수많은 단점을 나보다 더 먼저 발견했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녀를 사랑했다.

 

이제 내가 질질 끌어온 400일 남짓한 썸머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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