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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난 필립 로스의 책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작가가 어느만큼 뛰어난 사람인지 알 지 못하고, 이 작품이 그의 저작물중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이 책에 아무런 감명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은 아래의 한국이 싫어서, 와 동시에 받은 '신간평가단' 평가 도서인데, 아래의 한국이 싫어서, 도 겨우 끄적거렸는데, 감명조차 받지 못한 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마침 마지막 도서라는 점도 겹쳐서 이렇게 오래 방치해두다가,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실 너무 너무 졸린데, 갑자기 끄적거리고 싶어서, 몇 자 끄적거리다가 잠들 생각이다.
한국이 싫어서, 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면 - 정제된 리뷰를 쓰는 것 보다, 이왕 쓰는 거 편하게 여담을 늘어놓으면서 진행할 생각이다 - 솔직히 아래 소설 형식 비슷하게 쓰긴 했는데 원래 쓰여질 글은 저런 형식이 아니었다. 사실 한국이 싫어서, 의 내용 하나하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으로 리뷰가 가닥이 잡혔었다. 순전히 저런 글이 쓰인 것은 그야말로 감정적인 일이었고, 밤기운을 빌려서 쓴 것이다. 아니, 책을 읽으면서 아예 다른 입장의 글을 두 개 쓸 수 있다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느 책을 읽든 나는 일종의 자기분열을 경험한다. 한 명의 나는 괜찮네, 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 명은 이건 생각해봐야.. 라고 머뭇거린다. 중심에서 어느 쪽으로든 글을 쓰는 것은 순전히 글을 쓰는 때의 감정 상태랄까.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반쯤 억지로 읽어나가면서 역시 나는 소설과는... 하고 이렇게 리뷰쓰면서 몇 번이고 털어놓은 말을 다시 입에서 주워담고 있었다. 역시 나는 신간평가단을 하고 싶었다면 그나마 과학을 했어야 했다, 라고. 아니 더 나아가서, 이렇게 리뷰쓰는 것도 이제 귀찮기도 하거니와 - 참고로 말하자면 이 책은 신간평가단의 지원을 통해 받은 책이다 - 또한 그럴 시간도 없어지고, 우울한 감정이 심해져서 컴퓨터 앞에 앉기도 어려우니 - 그래서 이번엔 신간평가단에 지원조차 하지도 않았다 - 더이상 글이든 뭐든 끄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묵혀두었다.
여담이지만 신간평가단을 지원안하니 이렇게 홀가분할수가 없다. 늘 모집할때면 아, 왠지 해야되나? 이랬었다. 그건 모두 책 욕심때문이었고, 그 욕심을 내려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줄여나가게 되었으니 짐이 하나 날아간 것 같다. 원래 신간평가단을 시작했을때의 나는 너무 외로웠다. 나는 아직도 그 밤을 기억한다. 어떻게든 더듬다가 지원하고 시작했던 그 밤을. 그렇게 몇 번의 신간평가단을 하고 난 지금은 이제 신간평가단이 버겁다. 지금의 나는 그날 밤 처럼 여전히 너무 외로운데도, 이젠 그 외로움을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어하니, 책 욕심과 엉켜있는 리뷰도서들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러니 이 글은 일종의 깔끔한 마무리를 위한 글이다.
이제 이 책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네메시스라는 제목이 붙은 책인데, 중심 소재가 소아마비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복잡계 과학부터 떠올렸다. 물론 여기서 벌써 일반적인 소설 리뷰와는 차이가 몇만 광년인데, 왜 전혀 뜬금없는 과학을 끌어들이냐고? 닐 존슨의 최근 발간된 책을 보면 서문에서 닐 존슨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한다 - 이 닐 존슨이라는 사람은 복잡계 과학의 별이라고 하는데.. - 이 세상 모든 것의 해답을 줄 (정말 이런 문장은 아니다) 과학이 바로 복잡계 과학이라고. 그러니 네메시스에서 일어난 소아마비 사건도 복잡계 과학으로 어쩌면 접근가능한 것이 아니었을런지.
네메시스에서는 강직한 한 주인공이 자기가 본의아닌 소아마비의 매개체가 되어 멘탈이 붕괴되는 모습을 그린다. (실제 이 주인공이 매개체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 주인공이 있던 커뮤니티에서, 이 주인공은 산골로 일종의 '도약'을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산골에 있던, 청정지역에서도 소아마비가 창궐하게 된다. 먼저 의학적인 지식을 살펴보자면, 소아마비의 경우에는 보통 fecal to oral, 직역하자면 항문에서 입으로 향하는 감염 경로를 따른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oral to oral경로도 있지만 이는 위에 포함된 것이다.
보통 진단은 척수천자를 통해서 척수액으로 lymphocyte, elevation of protein 등의 수치를 보고, (이게 또 척수천자를 통해서 각 성분이 얼마나 증가했느냐에 따라 가이드라인을 참조할 수 있다.) 바이러스 질환인지를 감별하고 임상적인 증상으로 판단하거나, 인두 등의 swap을 통해서 바이러스를 culture해서 파악한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척수천자만 남아있다. 사실 스왑해서 컬쳐하면 쫌 오래걸리거든. 항체 검사를 통해서 파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먼저 임상적으로 의심될 경우 - 척수천자를 통해서 감염이 의심되고 임상적인 증상이 확실할 경우에 실험실 결과를 기다리기보다는 치료를 먼저 시행한다. 문제는 이 치료가 정말 골때리는데, 사실 conservative한 치료를 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
치료가 없다면 어떻게 소아마비를 이겨낼 수 있을까? 어렸을때 모두 소아마비 백신을 맞았을 것이다. 예방접종이 싫다, 고 생각하시는 분이 만에 한 분이라도 있다면, 꼭 마음을 돌려먹고 예방접종 스케줄대로 유아를 맞히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이 백신으로 인하여 우리는 소아마비를 이겨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백신과 그 예방접종덕분이다. 예방접종의 기술도 많이 발전해왔다. 네메시스, 의 배경이 되는 미국에서도 만약 이렇게 백신이 보급되었다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리라.
소아마비 백신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우리 손에 들어왔다. 꽤나 주목받는 젊은 - 70년생이면 젊다 - 바이러스 학자인 네이선 울프가 네이처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현재 있는 대부분의 감염병들은 동물에서 온 것이다, 라고 한다. 잘 안와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말라리아는 정말 끔찍한 병이다. 이 말라리아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이 글을 모조리 채울 수 있을 것이다. DDT와 카슨, 과연 DDT를 써서 말라리아의 숙주인 모기를 없애는 것이 나쁠까? 의 주제로 한 단락, 말라리아와 진화, 겸형적혈구빈혈증과 그 유전 한 단락. 그러나 이런 주제는 생략하자. 앞으로도 기약이 없다. 의욕이 없거든. 그럼 여기서는? 말라리아는 사실 우리가 여러 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말라리아 녀석들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달라붙게 된걸까, 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언젠가 네발로 기어다니고 나무에서 갓 내려왔을 무렵, 오랑우탄, 고릴라, 인간, 침팬지, 보노보는 진화의 가지에서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녀석들이 다른 유인원들에게도 있을까? 당연히 있다. 유인원 원충이 적어도 수십 종류는 알려져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라리아 원충과 그 유인원 원충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현재의 연구 결과는 이렇게 말한다. 유인원 원충 중 일부가 인간이 분화될 시기에 같이 따라서 분화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노라고.
그 겁나는 HIV는 어떨까? 이 HIV에 대해서도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못된 지식과 더불어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생각보다 단호하게 그 기원을 밝혀내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침팬지와 불타는 밤을 보낸 사람들 때문에 HIV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뭐.. 글쎄, 과연 침팬지와...? 침팬지 악력은 인간보다 몇 배는 강력하다. 인간이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접근하겠는가? 뭐, 물론 하고자 한다면 마취시켜놓고... 하려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뛰어난 진화생물학자인 월리엄 해밀턴마저도 HIV에 대해서 이상한 가설을 세우고 열대우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열병을 앓아 작고하고 말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여튼 학계에서는 대략 이렇게 이야기한다. 침팬지는 잡식성이고, 같은 원숭이를 잡아먹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과 네안데르탈인이 살아있었을때, 서로 동등한 지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을까, 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다시 본래로 돌아가서) 우리가 볼땐 같은 원숭이라도 자기들은 다르다고 여길 것이니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침팬지에 의해 식사거리가 되는 녀석들은 두 종류다. 흰코원숭이, 붉은머리 망가베이. 침팬지녀석들은 이 녀석들을 아주 잔혹하게 - 적어도 인간의 눈에는 - 잡아먹는다. 내장을 뽑고 등등. 그런데 문제는, 침팬지 녀석들은 불을 쓸 줄 모르는 것에 있다. 불을 쓸 줄 모르니 그냥 생고기를 씹어 먹는다. 그리고 생고기와 피에 접촉한다는 것은 바이러스들이나 박테리아들에게는 하이패스를 뚫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래 흰코랑 붉은머리에게는 유인원면역결핍바이러스가 자생했다. (원래, 라는 말이 매우 거슬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침팬지가 게걸스럽게 처묵처묵하다보니 두 종류의 SIV(simian immunodeficien..) 가 침팬지 안에서 섞이고는 아주 사악한 녀석으로 변모한 거다. mosaicism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나 뭐 전공자가 아니라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구, 그 침팬지를 우리 인간이 또 별미랍시고 먹고, 혹은 사냥하고, 그러다보니 그게 인간에게 옮겨진거다. 이게 학계에서 말하는 HIV의 기원이다. 정리하자면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넘어온 바이러스가 매우 많다는 이야기다.
소아마비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라서, 원래 유인원 사이에서 놀던 녀석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 (웃기게도 그 반대 사례도 일어나서 급하게 침팬지들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맞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종간 장벽은 생각보다 넘는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가 크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여튼 고기는 꼭 구워드시라. 가 아니라,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가지고 백신을 만드는 과정도 정말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아마 학부모들은 민감할 생백신 그리고 사백신의 발전은 절대 거저 일어나지 않았다. 사백신, 소크 백신과 생백신, 사빈 백신은 - 둘 중 뭐가 더 낫니 이런 말은 여기서 안할 것이다, 소아과선생님께 물어보시라! - 각각 개발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이 백신들은 계대배양이라는 기술을 통해서 독성을 약화시킨 균주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
굳이 의학적인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실제로 백신 안에는 보존제가 첨가되어 있다. 이 보존제를 첨가하는 이유는 S. aureus때문이다. 요녀석들은 박테리아인데, 슬금슬금 백신에 기어들어가서 오염시키는 경우가 있거든. 그걸 보존제가 막아준다. 그런데 이 보존제에 수은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안맞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수은이 Hg그대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거니와 화학결합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이 오늘 먹은 라면에도 연필심과 똑같은 탄소가 들어가 있잖는가. 물론 결합한 화합물이 수은만큼이나 독한 녀석일 수 있다. 이 수은은 티메로살Thimerosal이라는 화합물의 형태로 첨가되는데, 실제로 이 티메로살은 매우 독한 놈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백신을 맞으면 자폐증이 생긴다더라,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과학적 조사가 시행된 적이 있고, 그 결과 저 주장, 티메로살을 넣어서 자폐증이 생긴다, 라는 주장은 증명되지 않음이 드러났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일차 출처까지 달아놓겠다. Immunization Safety Review: Vaccines and Autism, 2004. Immunizations and autism: a review of the literature, 2006. 덧붙여서 이 글도 읽어보라. The Vaccine-autism Connection: A Public Health Crisis Caused by Unethical Medical Practices and Fraudulent Science, 2011
하지만 여전히 찜찜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현대의학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고, 다른 화학물질로 보존제를 사용한다던가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겁내지 말기 바란다. 특히나 이런 증명되지 않은 주장때문에 백신을 맞기를 거부한다면 생길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집단 면역 문제다. 집단 면역을 획득하려면 R0, 역학에서는 이것을 기본 재생산 숫자, 멋지게 영어로 다시쓰면 basic reproductive number라고 한다. 이는 자연상태에서 감염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수를 말한다. 역학의 목표는 이 R0을 1미만으로 만드는 거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전염자가 1명이 안되게 만든다는 이야기인데, 1명이 안된다는 말은 결국 고립된 섬처럼 결국 감염을 유발하는 미생물이 전파가 안된다는 이야기이고, 전파가 안되면 결국 사멸되게 된다. 이 원리를 넓게 적용한 결과,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의 천연두의 사멸이 일어났다. 일부 인구를 접종시키되, 역학적으로 감염자들을 둘러싸서 고립시켜버리고, 감염자들을 치료해버리면 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프리카에서 페이지가 이 방법을 써서 6퍼센트의 인구만 접종시켜서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우리가 예방접종을 잘 맞고 다니면 위에서 말한 것 처럼 병이 전염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 하나 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맞지 않기 시작한다면? 전염이 쉽게 일어날 것이고, 이윽고 전염이 사회 전체에 만연하여 유행될 것이다. 미국의 디즈니 홍역사태를 아는가? 궁금하면 검색해보라.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다. 심지어 2015년, 올해 일이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질병 때문에 한번 크게 사회적으로 휘청거린 적이 있지 않은가? MERS말이다. MERS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너무 이야기가 멀리 튀어가니깐.
계대배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딴 이야기만 하고 있다. 여튼 결론은 예방접종 잘 맞고, 손 잘 씻고 기침할때는 팔꿈치로, 등등. 딴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니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꼭 유념하길 바란다. 그리고 계대배양인데,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이 이 바이러스들을 계대배양했다는 이야기까지 한 것 같다. 보통 배양을 할때, 우리는 페트리 접시 - 동그란 접시 - 에 한천이든 뭐든 그런거 깔고 - 배지 -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그걸 먹고 살라고 놓아둔다. 바이러스는 혼자서 못사니깐 세포에 넣어줘야 된다. 기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 또 이야기가 옆길로 샌다, 바이러스는 계란에 넣는 경우가 많다. 계란은 그 자체가 커다란 세포니깐 말이다. 예방접종할때 의료인들이 달걀에 알러지 있냐고 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배양은 먹고 살다보면 끝이 오게 된다. 계대배양은 이 미생물을 계속 살리기 위해서 먹이를 계속 바꿔간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오늘은 한천, 내일은 계란, 모레는 빵조각.. (실제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대배양을 하면 자연의 법칙이 하나 작용한다. 바로 자연선택의 법칙이다. 자연선택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이야기할테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때문에 점차 독성이 약해지거나 하는 그런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독성이 약해진 녀석이 생기면, 이제 백신을 만들기 위한 중간주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워낙 발달한터라 별의별 방법으로 백신을 개발하지만 - 심지어 바이러스를 파쇄해서, 갈아서 백신만드는 경우도 있다 - 적어도, 처음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할때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런 백신이 이 네메시스에서는 아직 없었던 모양이다. 주인공은 건장한 체육교사인데, 앞서 짧게 줄거리를 요약했듯 자신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마가 도시를 감싸더라도 건강한 육체로 이겨내자, 라고 판단하여 아이들에게 열심히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사실 분명 소아마비는 감염병이고 어떤 감염병이든 우리 몸의 면역계가 건강하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 그 악명높은 에이즈를 제외한다면, 심지어 에이즈도 충분한 수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 그러나 도시 전체가 소아마비의 광풍에 휩쓸려 가는 때에 무리하게 운동을 시키고 계속 학교에 나오게 한 것은 문제가 있다. 소아마비의 전염력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비판받을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복잡계 이론을 들먹여보자. 많은 사람들이 복잡계 이론이라는 이름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그들은 카오스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프랙탈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세태는 사실 잘못되었다. 카오스 이론은 분명 복잡계 이론에 속할 수 있으나 복잡계 이론은 카오스 이론이 아니다. 프랙탈은 복잡계가 전개되어나가면서 나타날 수도 있는 단면 중 하나이다. 말하자면 질서와 혼돈, 그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같은 임계점을 가르키는 부분이랄까.
문제는 복잡계 이론은 초끈 이론과 매한가지라서, 그 이론을 한 눈에 조명할 수 있는 모델이 없다. 복잡계 이론 과학자들은 이런 특성을 복잡계 이론은 '메타 과학' 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고 변명하지만, 사실 잘못된 말이다. 모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과학을 어디다가 쓸 생각인가?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진화론에서 자연선택의 수준에서 결국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유전자 중심 시각이다. 왜 유전자 중심 시각이 받아들여지는가? 모델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유전자 문화 공진화 분야가 앞으로의 진화생물학계에서 전도유망하리라고 여겨질까, 이것도 모델을 수학적으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델을 구축하지 못하고, 경험적인 관측을 반영하지 못하면 그 분야는 사장되기 마련이다. 지금 복잡계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고, 초끈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초끈이론과 비교하자면, 둘 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공식이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초끈이론은 경험적 관측을 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복잡계 이론은 모델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미묘하게 다르긴 하다. 모델을 구축하려면 근사를 해야 되고, 때로는 섭동, 근사 등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역설에 빠져들게 된다. 복잡계라면서 충분히 복잡하지만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단순화시켜야된다니 얼마나 웃긴 일인가.
덧붙여 복잡계 과학이 제대로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그 힘을 발휘하려면 그 복잡계 특유의 창발, 이라는 현상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대하여 수학적인 근사 모델이 - 미분방정식은 일반적인 해법이 없다 - 완벽하게 설정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하나 더, 삼체문제부터는 일반적인 해가 없다. 다체 문제의 해결은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진다. 이게 안되는 이상, 복잡계 과학은 전망을 밝게 보기는 어려우리라. 근사 모델이 있다고? 여기서부터는 다시 오차를 줄여나가야만 한다. 항 몇개의 생략이 도저히 감당불가능한 미래를 시뮬레이션 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졸지에 복잡계이론에 대해서 날선 소리만 늘어놓게 되었는데, (특히 복잡계 이론 서적을 보면 창발이 일어날만큼 충분한 수, 를 미리 가정을 하는데,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수가 모였을 때 현상이 나타나느냐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계 이론에 대해서 나는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주변을 떠다닌다고 하여도, 그 아이디어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이론은 흔치 않다. 바로 그 이론이 이 이론이다. 괜히 만물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 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 딴소리로 넘어가는데, 나는 지식인(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 냉소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대중 서적을 읽은 사람보고 '대중 서적은 말그대로 쉽게 풀어서 언어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부족하다, 그거 몇 권 봤다고 아는 척 하지 마라' 라고 이야기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이론은 이제 한 물 갔다. 요즘 학계 추세는 이런 걸 공부하는 거다 라고 이야기한다. 난 솔직히 비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정작 그런 사람들 중 정말 관련 전공인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왜? 관련 전공인 사람들은 모두 바쁘거든. 실험하느라, 아니면 논문쓰느라. 정작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대중서적에서 대부분의 지식을 얻었을 것이란 말이다. 아니면 기껏해야 학부생이거나. 대학원은 인터넷에서 키배할 정도의 시간을 줄 수 있을만큼 편한 곳은 아니다. 여기서 반 정도가 이미 걸러져 나간다. 대부분 저 지식인들은 전공자가 아니라는 거.
물론 가끔 대학원생이나 스탭이 그러는 경우가 있다. 난 이것도 이해못하겠다. 주제가 뭐길래? 프로그램짜고 그거 돌리고 통계내고 이런 작업만 해도 시간이 다갈텐데. 난 대학원생이 모두 옳다, 라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학원생이나 스탭들이 그만큼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길게 키배를 뜰 정도로 여유가 넘칠 리 없다. 그리고 하나 더, 대학원생들이나 스탭은 자신이 연구하는 그 분야에서만 옳을 뿐이다. 자기 분야를 넘어가면 - 예를 들어 파리 뒷다리를 공부하는 박사에게 파리 앞다리를 물어보라. 그 답이 옳을까? - 그들도 사실 확실하게 뭐가 옳다, 그르다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지나친 전문화의 폐해랄까. 글쎄, 여기서 또 반이 걸러져나간다. 대부분의 대중서적을 비판하는 전공자들은 실제로 그 대중서적을 비판할 전공이 아니라는 것.
그럼 이제 그 전공을 거친 사람들만 남았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키배를 뜬다. 예를 들어 앨러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글을 올린 사람과 그 글에 정말 초끈이론으로 박사과정을 진행중인 사람이 댓글을 달아서 키배가 일어났다. (물론 이런 경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럼 초끈이론으로 박사과정인 사람이 무조건 이겨야 될까? 그런 대중서적으로 오해하지말라, 이렇게 말하면 비전공자들은 무조건 입을 닫아야 할까? 아니다, 아니다. 여기서 전공자는 그런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모르면 가르쳐줘야지, 왜 자신의 지식의 우위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가?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 초끈이론 전공자는 진화론과 자연선택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이다. 위의 소아마비 치료법도 모를 것이다. 마찬가지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자신이 정말 전공자라면 전공자라고 밝히고 소속을 밝힌 뒤 가르쳐주면 된다. (이것의 이유는 은근히 각 소속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에 학파를 아시는지.) 그러나 대개는 그 설명은 너무 오래 걸리고, 양 측의 의지는 모두 닳아없어지고 만다. 그러니 서로 그러려니 하고 대화를 그만두게 된다. 그러면 다시 대중 과학서로 넘어간다. 대중 과학서라도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두 분야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오해로 점철되었더라도.
독자들은 날카로운 변호사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전약력의 통일을 이뤄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탄 스티븐 와인버그가 자신의 대표적 저서 최초의 3분에 남긴 말이다. 사리에 맞게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주제에 있어서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전공자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왜 내가 전공자, 라는 부분에 자꾸 강조를 하느냐면, 전공자와 전문가는 또 다른 의미다. 암묵지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실험대옆에서 계속 실험에 힘쓰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현실같은 것. 이 방향이 옳을 것 같다고 느끼는 운명같은 예감. 그런게 있다. 아마 문과계열도 비슷하리라. 그래서 전공자를 존중하는게 맞다. 그러나 전공자가 무조건 옳으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변호사같이 날카롭게 그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의문이 있으면 물어야한다. 그런데 이 물음에서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만 한다. 상대방은 자신이 아니다. 나는 이정도는 괜찮더라, 그러니 상대방도 이정도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질문의 기본 자세가 안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지식을 구하는 사람은 허리를 구십도 넘게 굽힐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빳빳하게 서있으면서 어떻게 지식을 구하려고 하는가? 나이? 학력? 그런 것은 지식의 추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비꼬는 사람은 더 말할 가치도 없다.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전공자 또한 마찬가지로 너랑 이야기하려니 네가 모르는게 너무 많네, 난 이야기 안할래, 와 같은 태도는 정말 웃긴 일이다. 그건 회피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기 싫으면 아예 말을 하지 말던가. 상대방이 말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시하는게 옳다. 뭐하러 몇 자 더 적으려고 하는가? 상대방이 말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시간이 모자라면 답을 하지 말것이지 굳이 저렇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이든 아예 말을 하지 말던가, 아니면 제대로 이야기하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는게 옳다고 본다. 혹시 상대방이 자신을 존중하는 자세로 제대로 접근했는데도 네가 모르는게 많다, 운운하면서 무시한다면, 이건 본인이 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착각 속에 빠져있으니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는게 옳다. 독자들은 이 사람들에게는 연민을 느껴야 한다. 아는 것을 고작해야 몇 줄의 현학적 말로 포장해서 끄적거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전공자이긴 한걸까, 의심과 더불어.
고백하자면 나도 별반 다를바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쥐꼬리만한 자부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도저히 글을 쓸 자신이 안생겼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글을 쓰는 김에 핑계를 다시 대겠다. 나도 실컷 복잡계 이론에 대해서 날선소리를 했지만, 나도 전공자가 아니다. 나는 의학을 전공했다. 의학이 복잡계 이론과 만나면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루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 또한 복잡계 이론과 진화 이론에 의학을 접목시킨다면 멋진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예감하지만, 그래서 이렇게 복잡계 이론을 붙들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이 글 자체도 거대한 농담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난 내 글이 옳다, 라고 옳다, 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며 대중 서적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할 일이 아예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대부분의 내용은 대중서적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니 말이다. 물론 또 변명하자면 뒤의 reference를 하나 하나 찾아서 읽어보기도 한다. 여기서 또 대중서적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맹점이 드러나는데, 은근히 대중서적이라고 해서 부실하고 그런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에 스티븐 핑커는 우리 시각의 편향된 모듈에 관련된 실험에서 자신의 책에서는 그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psychological science에 Tarr와 함께 1990년에 실은 논문과 그 부분을 비교해보면 필요한 내용은 모조리 적어두었다. 결국 논문을 읽으나 책을 읽으나 conclusion은 같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거의 모른 채 어설픈 사람들은 그저 대중서적이라고 하면 고개를 내젓는다. 대부분의 경계를 접목하는 작업은 대중서적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고개를 젓지 마라. 너무 이르다. 여기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된다 : 대중서적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제 다시 복잡계 이론으로 넘어가보자. 복잡계 이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 재귀과정. 둘, 한정된 자원에서의 경쟁. 이 두 개의 부분은 서로 연합하면서 거대한 메타과학의 윤곽을 그려내고, 무한한 확장을 시도한다. 재귀과정은 뭘까? 괜히 어렵게 써놓았지만, 자신을 참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런 거 말이다. 러셀의 역설에서 등장하는 자신의 머리를 깍는, 혹은 못깎는 이발사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 이 명제는 증명불가능하다, 증명가능하다 - 이런 것들 모두 재귀과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다. 복잡계 이론에서는 재귀과정이 좀 더 확장된 의미이다. 자신에게 다시 피드백을 주는 모든 과정, 이라고. 자신에게 다시 피드백을 주려면? 과거의 경험, 기억이 필요하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텐데, 나에게 다른 사람이 피드백을 해주면 안되냐고 말야. 그런데 난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feed - back 을 해주는게 feed - back인가? 그건 teaching아닌가?
이런 재귀과정 때문에 우리가 흔히 혼돈의 가장자리, 라고 불리는 특성이 일어나게 된다. 질서가 있는 것 같은데, 또 질서가 없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아마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를 많이들 읽어보았을 것이다. 특히 카오스 이론과 프랙탈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어려운 설명은 치우고, 갔다가 되돌아오고, 갔다가 되돌아오고. 그러면서 이 과정에 약간의 경향성을 주라 (이게 피드백이다). 꽤 그럴듯한 모습이 그려진다. 마치 산처럼. 완전히 무작위적이지는 않으나 동시에 질서정연한 모습과는 동떨어진, 그리하여 혼돈의 '가장자리' 에 있다고 일컫어지는 모습. 그것이 바로 프랙탈이다. 어떤 함수든, 자기 자신을 다시 변수로 만들게 되면 질서를 찾기 어려우면서도 질서가 있는 그런 모습이 드러난다. 여기서 적절한 계수를 곱해주면 아주 흥미롭게 저 혼돈의 바다를 건너가게 된다.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혼돈의 바다를 건너간 상황도 여전히 복잡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프랙탈은 그 복잡계의 현현 중에 나타나는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재귀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숫자야 다시 정의역에 놓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발사는 어떻게 다시 이발사자리에 설 수 있을까? 유형론? 아니면 가능세계?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주 길어질 것이다. 그걸 다 끄적거리다보면 너무 난삽해질 수 있기에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간단하게만 쓰련다. 거기에 두라, 그리고 가까이 가지 말라. 앨런 튜링과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을때,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을 허용하면서 저렇게 이야기했다. 나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있다. 가지 말라.
위의 재귀과정은 복잡계의 일부일 뿐이다. 저게 모든 복잡계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심이 되는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할 부분인,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이다. 모든 복잡계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어? 한정된 자원? 경제학? 게임 이론? 내쉬 균형? 이렇게 떠올렸다면 당신은 여기에 관심을 많이 둔 사람.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게임 이론? ESS?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자연 선택에 이르게 된다. 자연 선택, Universal darwinsim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자면,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알고리즘을. 1. 복제한다. 2. 변이가 일어난다. 3. 적절한 존재가 남는다.
진화를 추동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실 자연 선택 하나만 있다, 라고 주장하면 편하겠지만, 자연 선택은 뭐랄까,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라 이게 근본 원인, 이라고 놓아두더라도 상황을 명료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차근 차근 설명하겠다. 사실 자연 선택은 좀 더 근본적인 법칙인 안정자 생존의 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적자생존이 아니다. 이는 과거를 향한 말이다. 생존자적자도 아니다. 이는 미래를 향한 말이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안정한 자가 오래 버틴다, 라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말이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동어반복에 가까운 말로 어떻게 세상 모든 진화를 명료화시킬 수 있겠는가? 저 말은 분명 모든 진화의 기저에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저 말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이라도 인슐린을 대장균에서 더 많이 뽑아낼 수 있는 균주를 배양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명료화하려면 다른 원인들이 필요하다.
내가 동어반복에 가깝다, 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라. 저 말은 사실은 동어반복은 아니다. 이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용어 중에 적합도, 라는 것이 있다. 이 적합도에는 우리가 다들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5가지 정도로 그 뜻을 나눌 수 있다. 포괄적합도, 개인적합도, 개체에서의 적합도, 유전자에서의 적합도.. 이렇게 나뉘게 되는 이유는 적합도, 적합한 녀석이 오래 살아남기 때문에 당연히 높겠지, 라는 명제에서 벗어나 의미를 확장하기 위함이다. 저 안정자가 오래 버틴다, 라는 말도 의미가 당연히 확장될 수 있다. 나누기에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는 더 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쓸 기약은 없다.
다시 원 단락으로. 그렇다. 명료화하려면 다른 원인들, 뉴클레오티드의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 그리고 병목 현상 등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중립설, 을 배격하지는 말고 한 번 훑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저 알고리즘과, 그 알고리즘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칙은 거의 맞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진화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다른 원인들을 여기서 어떻게든 도출하여야 한다. 이제 다시 복잡계로 돌아가자면, 복잡계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행위 주체들의 상호작용은 충분히 모델링할 수 있고, 이는 진화적인 아이디어를 통해서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연선택에서 돌연변이, 병목현상, 유전적 부동 등의 세부 원인들을 모조리 긁어모으듯, 복잡계에서도 분명 그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두 준거틀로 삼아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감히 말하건데, 결론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닐 것이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뭘까?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의 두 저서, 링크와 버스트를 보면 좋을 것이다. 복잡계를 다루면서 시공간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한쪽 날개만으로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이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따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시공간으로 이야기해야한다, 가 정설이 되었지만 이러면 너무 골치아프다. 그러니 시간, 공간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칸트 철학이 의외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야말로 유사성에 의거한 불합리한 논증에 그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장회익 교수같은 예가 있으니 마냥 불합리하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우리가 한참 이야기한 복잡계와 소아마비를 동시에 다뤄보자. 우왕, 너무 길어지다보니 나도 슬슬 빨리 마무리해버리고 싶은데, 원래는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적용시키면 좋을지 막막하니, 하나만 생각해볼 것이다. 마치 맹수가 목덜미를 물어 콱 깨물듯, 우리는 임계점에만 집중할 것이다. 앞서 내가 날을 세워 말했듯, 얼마나 많은 수가 모였을 때 창발이라는 것이 일어나는가, 에 대해서 일반적인 공식은 현재는 없다. 그저 이런 말, 2명은 너무 적다. 그리고 3명은 너무 많다. 이런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밖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이런 문제다. 최대한 쉽게 문제를 제시해보자.
만명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여기서 소아마비가 '하루'만에 '이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려면 몇 명이 동시에 감염되어야 될까?
만약 간지나게 쓰고 싶다면 집단의 수 M에서 Y의 기간에 임계점에 도달할 N값은 얼마여야만 할까? 라고 쓸 수도 있겠지만, 뭔가 안와닿는다. 그러니 그대로 저렇게 질문을 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루'와 '이 커뮤니티의' 하는 부분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주어졌을때 한정된 자원이 생기며, 한정된 자원이 생길때 경쟁이 일어나고, 이 경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라바시가 자신의 저서, 버스트에서 소개한 것 처럼 '우선순위' 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만약에 바라바시가 밈이론 - 그래, 나도 안다. 요즘 밈이론이 거의 사장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그러나 이론적 틀로써는 꽤나 흥미롭다는 것마저 부정해서는 안된다 - 을 접한 적 있다면, 아마 우선순위, 라는 개념을 훨씬 빨리 떠올렸을 것이다. 수많은 작업들이 서로 경쟁해서 나를 먼저 처리해라 이놈아, 라고 서로 외치는 광경을 훨씬 쉽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제한 조건을 유념하면서 저 질문에 답해보자. 이상적으로는 1명이라도 가능하다. 왜? 소아마비 바이러스 백신을 맞지 않았다면 당연히 1명이라도 하룻동안 침이라도 퉤퉤퉤 만번 뱉으면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명이 만명에게 모두 침을 히드라리스크(..)처럼 뱉으며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만명에게 침뱉다보면 하루로는 모자랄 것이고, 만명을 쫓아다니려면 공간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1명이 2명에게, 2명이 4명에게 침뱉으면 되지 않냐고? 다시 시공간적 제한이 작용한다. 1명이 2명에게 감염했다고 하더라도, 이 2명이 바로 감염자가 되어 전염시킬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도 재생산 사이클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2명이라면? ... 처음부터 10명이라면? 도대체 몇 명이 임계점인거지?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하자. 1명은 2명에게 감염시킬 수 있고, n명은 2n+e명을 감염시킬 수 있다고 하자. 저기서 +e이 벌써 창발emergence이 일어난 부분인데, 소아마비의 사이클을 고려해서 이 부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의상 e를 1로 두고,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점화식을 밝혀내었다고 가정한다) 소아마비의 사이클을 1시간으로 가정하면 (물론 이는 실제와 거리가 있다) n시간이 지난 후에는 2^n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2^n이 1024에 도달할 경우 1명은 2명을 감염시킬 수 있다고 하자. 이때 n은 10이다. 즉, 10시간에 1명은 2명을 감염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10시간에 2000명이라면 4001명이 감염되었을 것이고, 다음 10시간 (하루가 24시간이므로) 에는 8000명정도를 감염시켰을 것이다. 대략 2500명 정도라면 - 간단하게 2n+1<10000/2 에 해당되는 n값을 구하면 되겠지만, 이정도라면 10000명 정도에 하루만에 퍼져나가리라.
저 부등식을 나누는 2는 그냥 2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4다. 24시간을 10으로 나눈. 그리고 이 10은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외부 감염이 일어날 임계수인 1024에 도달하기 위해서 2분법으로 도달할때 걸리는 시간이다. (굳이 virmeia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것에 유의하라) 이것들도 모두 변수다. 따라서 2500이라는 수치는 이상적인 상황이고, 아마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산을 통해서 생각보다 수치가 크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싶다. 그래서 결국 이는 소설의 주인공에게 약간의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아마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 후반부의 묘사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일부러 벌받는 심정으로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정말 소설의 주인공이 소아마비를 옮겼다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 중의 한 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본인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이다. 불쌍한 주인공을 위해 건배.
P.S.
글이 너무 길어지고 난삽해졌는데, 이는 매번 밤마다 열심히 쓰다가 졸고 잠자리에 들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서 그렇다. 어느 날은 불타올라서 마구 끄적였는데, 어느 날은 한 줄 쓰고 잠들었다. 그러니 들쑥날쑥하게 쓰일 수 밖에. 임시저장이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오늘에 이르러 글을 길게 쓰려니 슬슬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 같아서 급하게 끝내고 말았다. 어쨌든 아무렴 어떤가. 피날레인데. 그래서 이렇게 피날레인듯 피날레같은 리뷰아닌 리뷰를 끝내보련다. 이제 완전히 끝났다. 안녕,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