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 특이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보통 그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블랙홀같은 경우를 물리학에서는 특이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한히 수축한 점과 같지만 동시에 중력이 무한대에 달하여, 그 어떤 물리학 이론도 그 지점에서는 갈기갈기 찢기고 만다. 또다른 특이점이라면 역시 태초에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빅뱅의 시초점을 들 수 있으리라. 물론 스티븐 호킹은 우주에는 시작도 없었다, 라는 주장과 함께 허수시간을 도입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빅뱅의 이미지는 하나의 무한하게 작고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점이다. 이 시초점에서도 우리는 어떠한 이론도 적용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론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기술하고, 그 기술한 모델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예측을 가져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저런 특이점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내 이론은 완벽하다, 라고 눈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실제로 현실에는 블랙홀이 존재하고, 거의 확실히 빅뱅이 일어났으리라고 높은 확률로 예측되어지고 있다. 이런 모순으로 가득찬 것도 현실의 일부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물리학에서는 이런 특이점들을 기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섭동의 방법을 쓰기도 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통합을 통하여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물리학에서는 특이점이 일종의 해소해야만 하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덩어리이다.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을 돌리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데 이런 특성은 기술사학에서 쓰이는 특이점, 이라는 용어가 가진 특성과 매우 흡사하다. 기술사학과 물리학의 특이점은 그 쓰이는 용도 자체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성은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기술사학에서의 특이점은 인간의 기술이 너무나 발전하여, 이윽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상태를 가리킨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이 스마트폰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작동을 하게 되는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직업적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는 한 말이다. 아니, 설령 만들더라도 분업화된 현재 산업체계에서는 그 기술의 산물에 대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특이점을 모른체 넘어가고 싶고, 특이점에 대하여 신경도 쓰지 않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 특이점에 둘러싸여 있고, 따라서 어디에 눈을 두더라도 우리는 그 산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특이점은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위의 특이점이 온다, 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의 경우 긍정적으로 특이점을 여긴다. '미래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노기술들과 인공지능은 스스로를 보수하고 더 발전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긍정적인 전망을 물리학자인 미치오 카쿠도 이어받아, 자신의 저서 미래의 물리학에서 마음껏 그 전망을 펼친다. 심지어 마지막에 이르면 소설까지도 쓰고 만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지만 자신의 예측에 따라 찾아오리라 짐작되는 일상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하지만 미래는 정말 이렇게 장미빛일까? 두려움은 없다, 에 나오는 수많은 미래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은 위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식으로든 여기서 노력을 해나가야만 한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이들이 말하는 위기나 파국은 '이런, 위기에 빠졌어, 파국을 맞이했으니 우리는 멸망할거야'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원 그대로 (파국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시절의 전차경주에서 가장 위험한 주로를 가리킬때 쓰이는 용어에서 왔다고 한다.) 운동상태에서 어떤식으로든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도 완전히 부정적으로 미래를 보지는 않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노력에 따라 미래는 장미빛이 될 수도, 우중충한 구름에 뒤덮힐 수도 있다는 것이 저 책의 미래학자들의 요지이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미래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노력해야 한다, 올해가 변곡점의 해이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만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들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다. 협력을 늘리고, 자연을 생각하라, 라고.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협력을 하고, 어떻게 자연을 생각하라고 하는지는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서 미래학자들은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해야만 한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똑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이들은 환원적 방법을 비판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환원적 방법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야 만다. 이럴바에야 그냥 특이점이 찾아오더라도 그 산물을 그대로 즐기고 머리아픈것은 잊어버리는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말하자면 두려움은 없다, 에 나오는 미래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정답을 이야기하지만, 그 정답이 받아들여질만한 때가 아니다. 환원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왜 그런 비판을 받으면서도 의학이나 생리학 등의 과학에서 그 방법을 사용하겠는가? 왜 구조의 특성을 밝히고 새로운 단백질, 유전자 등을 조사하겠는가? 그냥 아,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고 유기체이다, 전체를 살펴보아야한다, 라고 말하면 과학자들도 얼마나 편하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왜 그럴 수가 없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를 다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쁜 꼬마선충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저 꼬마선충을 해부하고 유전자 서열 분석을 한다고 해서 그게 꼬마선충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꼬마선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냥 선충이네, 길쭉하네, 눈에 안보이니 신경쓰지 말자, 라는 지식만 얻고 싶은가? 

 

아직 환원적 사고방식을 비판할때가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환원적 사고방식이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를 경우 전체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아직은 답지를 미리 넘겨볼때가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다, 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위치에 당면한 두 가지 큰 문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하나는 빈부격차이고, 하나는 지구환경문제이다. 그 어느 것도 미래의 물리학, 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자각이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어떤 식으로든 특이점을 맞이하였을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살자, 와 같은 태도가 아니라, 그 특이점에서 이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와 같은 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특이점에서 발전된 기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환원적 사고방식으로 계속 과학 지식을 쌓아올리도록 놓아두자.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 인간의 감성, 존엄과 관련된 - 제대로 주장하고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던져버린다면 우리는 기술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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