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실 거의 알라딘 서재에는 안들어온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개인적인 일때문에 안들어오게 되니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기가 힘들어졌다. 개인적인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런 개인적인 일들인데, 그 일들을 빼놓고 글을 쓰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 서재는 내 일상생활의 배출구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책 이야기만 하고 싶을 뿐이다. 서재에서 내가 무슨 일을 겪었다, 등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일은 너무 커서 나를 놓아주지를 않는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책을 최근에 그럭저럭 읽고 있는데, 너무나도 내가 모르는 것이 많기에 글을 쓰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예전에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책을 쓰고 대중이 그것을 읽었지만, 지금은 대중이 책을 쓰고 그 책은 아무에게도 안읽힌다. 이걸 오늘날에 적용시키자면 지금은 정보가 난무하지만 정작 제대로 읽'힐'만한 글은 별로 없다.
내 글도 그런 수준의 글에 그친다면, 과연 그런 글을 끄적거려서 인터넷공간의 바이트수나 차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정말 글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책은 무한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게 많다.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는 정말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 겉만 슬쩍 찔러보는 수준으로 아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많기에 항상 부끄럽다. 그래도 정말 가끔씩 이 책에 관한 내용은 조금 적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좋아하는 책이 항상 리뷰를 쓸만한 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마도 이런 내용은 그나마 공익적인 - 위의 '누구나 게임을 한다'에서 분석했듯 더 큰 목표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 책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읽어보았으면 한다는 그런 주제넘는 바람.
마크 트웨인이 인구에 정말 많이 회자되는 -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읽지는 않는 - 명언으로 고전을 정의한 바 있지만, 나는 고전에 있어서 좀 더 일반적인 정의를 적용하고자 한다. 고전, classic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읽힐만한 가치가 있고, 시대가 지나도 그 향이 변하지 않으며 각종 생각의 기초가 되는 그런 책으로 말이다. (classic이 내 기억으로는 언어학적으로 그 기원을 따져볼때 선박, 이라는 classis에서 온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선박이 왜 고전이 되었는가, 를 살펴보려면 당시 로마 시대의 시대상과 따져보아야 되는데, 자신의 돈으로 선박을 구입해 국가에 쾌척할 수 있는 사람을 classicus라고 부르고, 이들이 일종의 국가의 기초를 마련한다고 보아서 고전, 이라는 의미가 붙었던 것으로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근대의 가장 뛰어난 고전을 네 가지 들어보자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특수이론과 일반이론(논문을 말하는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에 대하여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을 말한다), 그리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들 수 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 바로 그런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위의 호모 루덴스 또한 고전이라고 부를만한 위치에 놓인 책이다. 부제를 보면 놀이와 문화에 대한 한 연구, 라고 적혀져 있는데,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문화의 부분이 놀이같은데 이 책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놀이'와' 문화다. 놀이와 문화가 서로 동등한 위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 놀이와 문화는 동등하며, 문화에 종속된 것이 아닌 한 형상이 바로 놀이다, 라는 것을 저 책 전반을 통하여 밝혀내고 있다. 그 접근법은 역사학적일수도 있고, 언어학적일수도 있으며, 그 둘다 일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가는 바로 머릿말에서 저자가 한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를 말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가 자신이 과감한 추론을 펼치는 것에 대하여 변명조로 이야기한 말이지만, 젠장, 너무 멋진 말이 아닌가?
그런데 하위징아는 스스로가 과감한 추론을 펼쳤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반향은 현대에 이르러 크게 울리게 되었다. 그 반향에는 몰입, 과 같은 긍정심리학이 있지만, 가장 크게 울리게 된 것은 바로 저 책, '누구나 게임을 한다' 에 이르었을때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분명 현대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이다. 고전의 의미가 기초, 의 의미에 가깝다고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책은 게임화Gamification에 대한 가장 뛰어난 책이며, 저자 스스로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우리 사회의 변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현대의 고전과 과거의 고전 - 호모 루덴스 - 사이의 연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놀이는 문화의 한 형상이고 문화 그 자체이며 인간 본질에 닿은 활동이다. 따라서 누구나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이 게임을 통하여 우리는 문화,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를 바꾸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감명깊은 것은 현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경제체제에 있어서, 게임을 통한 제 3의 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종말보다도 자본주의의 종말을 떠올리기가 더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렇게 생명력이 강하면서도 그 자신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끝끝내 대립항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과연 안티테제로서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치열한 대립들 - 인간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생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은 게임, 이라는 우리 본유의 활동에 의하여 해소된다. 피드백과 자발성이라는 게임의 요소를 통하여 말이다.
두 책에서 게임, 혹은 놀이를 정의하는 (편의상 게임과 놀이를 동일선상에 두겠다. 물론 여기에 반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약 하위징아가 컴퓨터 세대에 살게 되었다면 주저없이 컴퓨터로 즐기는 것들도 놀이에 넣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함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루덴스에서는 고정된 시공간에서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이해득실이 없이 특별한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을 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게임을 한다, 에서는 목표, 규칙, 피드백, 자발성, 이라는 네 가지 특징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규칙과 자발성이다.
규칙은 놀이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여러 제약과 규칙에 얽매여 살게 된다. 그런데 하나 현실에서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 제약과 규칙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제약하는 슈퍼맨에서 보통 샐러리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슈퍼맨이 될 수 없는가? 아니다. 어떻게든 샐러리맨에서 슈퍼맨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현실에 자발성을 도입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위의 두 고전, 현대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 공명하며 밝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