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시간 전에 이 책을 다 읽었다. 따라서 이 리뷰는 갓 읽은 책에 대한 따끈따끈한 리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븐에서 갓 구어낸 빵을 설명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책의 경우에는 다 읽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긴 한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분량이 짧은 것도 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읽는데 짧게 걸린 편이다. 요즘 붙들고 있는 책들이 워낙 진도가 안나가서 나는 내가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지적하자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해석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들뢰즈와 라캉이 워낙 많이 나오기에, 그 두 축 중 하나를 이루는 라캉에 대한 엄밀성이 부족하다면 책 전체의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한 저자의 해석인데, 이 거울단계는 아기가 파편화된 자신의 육체를 거울로 비춰보면서 일종의 통일성을 찾아나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저자는 외모에 대한 글에서 아기는 거울의 완전한 상과 동일시하여 상상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외부에서 본 아기의 모습이 아기 자신이 느끼는 것 처럼 파편화되어있는가, 그러니까 아기의 팔이 다른 곳에 떨어져있고 다리가 구부러져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아기는 거울단계를 통하여 불완전한 아기가 완전한 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단계를 통하여 이미 상징적(사회적)으로는 완전하지만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아기가 상상계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완전한 상을 획득한다고 보아야 한다. 단순히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접어들고, 그 사이에 간극이 있는 그런 상태라 보기 어렵다. 

 

실재에 대한 해석도 의아하다. 실재는 불안으로 가득찬 곳이지 저자의 말대로 touch를 불러일이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징체계로도 편입되지 않는 장 뤽 낭시의 감각의 터치, 라고 말할때의 저 '상징'은 라캉에서의 '상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상징체계에 균열을 내는 장 뤽 낭시의 파편, 또한 라캉에서의 실재의 파편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에 실재의 파편을 보게 된다면 감동touch가 아니라 두려움 - 어쩌면 이 또한 일종의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다만 제목은 참 마음에 드는데, 서문에 저자는 몽타주로서 자신의 짤막한 사유가 적혀진다면 그것이 바로 약도, 지도에 가깝다고 적는다. 그리하여 생각의 지도, 라는 제목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이 책을 완벽히 규정해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은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과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저자는 이성적인 사고의 화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다. 저자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좋든 나쁘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데, 그리하여 군중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본다면, 모순적이지만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용기가 그에게 군중속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 빼면 - 하나의 글에 적어도 서넛은 있는데, 예를 들자면 첫번째 글인 델포이의 신탁의 경우 글이 막바지에 이르면 각 문단마다 사상가가 하나씩 튀어나오는 (첫 문단부터 마지막문단까지 각각 데카르트, 하이데거, 푸코) 위엄을 자랑한다 - 이 책은 나무랄데없는 타임-킬링용 책이다. 저자가 이 책 안에서 자기 책을 빌려서 읽는 독자들을 (거기에 더하여 자기 책을 빌려보면서 비난? 혹은 비판하는 독자들을) 디스했으니 왠만하면 책을 사서 읽어주도록하자. 아, 물론 나는 반값할인이라 구입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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