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인 Saeculum Aureum(황금의 시대)는 오현제, 다섯 명의 현명한 군주(five good emperors)가 로마를 다스린 시대를 뜻한다.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된 뒤에 여러 위기를 겪었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만큼 벼랑 끝에 몰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다섯 명의 군주가 차례로 나타나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끌었다. 그 군주들은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일컫는데, 로마제국 쇠망사, 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의 쇠망의 불씨를 품게 된 시대이기도 했다. 이 글의 목적은 다섯 명의 왕에 대해서 사료를 모으고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데 있으며, 각 황제에 대하여 개인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건 여담인데 사실 오현제에 대한 책이나 자료가 너무 없었다. 특히 왕조의 시작인 네르바, 그리고 자비로운 안토니누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쓰기를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그래도 조금 끄적여보련다.

 

 

 

1. 배경.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첫 왕조,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은 칼리굴라, 네로 등과 같은 폭군을 연달아 배출함으로써 삐걱거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황제들이 모두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저 왕조에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속하는데, 아우구스투스의 다음 제위를 계승한 티베리우스는 치세 기간 중 실적은 좋았지만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가 최악이었고, 클라우디우스는 건실하기만 했을 뿐 앞서 칼리굴라가 야기한 혼란을 수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황제라는 직업은 매우 특이하여 너무 건실하기만 하면 또 곤란하다. 게다가 클라우디우스는 나약하기까지 했으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보면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4명 중 3명이(아우구스투스를 제외하면) 모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황제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을 반쯤 속여가며 이룩해낸 제정이 그 시작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그나마 온화하고 괜찮은 황제였지만 그를 이은 것은 네로였다. 왼쪽의 책,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는 로마 초기 제정 시대의 사료를 모아서 소설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물론 어느 정도 야사를 참조한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로 이어지는 혼란의 과정,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충돌에서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가, 등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진실로 믿으면 또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네로 이후에 첫 왕조는 끊어지게 되고, 로마 제국은 내란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내란을 종식시킨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상당히 뛰어난 황제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왕조에서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로마인의 삶이 이어졌다. 오른쪽의 책은 고대 로마인의 24시간, 이라는 책인데, 음.. 오른쪽의 책에서 로마의 공중화장실을 소개하면서의 소변을 수거하는데 세금을 물렸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사실 너무 예전에 읽어서 내용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일어난 일이다. 그것으로 판단한다면 저 책에서 그려지는 로마의 하루는 대략 이 왕조(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아래에 다룰 오현제 시대의 왕조 정도까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있던 플라비우스 왕조도 그 날개를 도미티아누스 황제때문에 접게 된다. 황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상상해보면, 우리는 아무나 가볍게 처형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정치에서 그런 행위를 하면 꼭 역풍을 맞게 된다. 특히나 이 왕조까지만 하여도 황제의 권력이 완전히 반석 위에 올려지지 않은(아우구스투스의 이원집정제 ; 황제와 원로원이 권력을 나눠가지는, 때문에 황제 자신의 권력은 공고하지는 않았다.) 상태였기에 원로원의 힘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황제의 모습처럼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마구 남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원로원을 자극했고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암살당하고 만다. 로마제국에는 다시금 내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2. 네르바.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은 그들 나름대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하여 당시 노령(70세)인 네르바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황제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면 피의 숙청이 다시금 닥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권력은 원로원과 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황제는 양 쪽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껏 황제는 군의 힘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고(군이 없다면 내란에서 승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원로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때 원로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네르바였다. 네르바는 나이도 많았고 자녀도 없었다. 네르바는 제위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전에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공직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황제위가 비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로마에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제위 기간 동안 원로원들을 절대 처벌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으며 그것은 오현제 시대 전체를 통틀어 계속 지속된다. 사실 그가 오현제의 시작으로 꼽히긴 하지만 제위에 있었던 기간은 매우 짧았고, 설령 어떤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뜻을 펼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로원의 뜻에 따라, 전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잘못 처리한 부분들을 되돌리는 것 뿐이었다. 그가 한 정책으로는 농지개혁 정책 정도가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은 네르바 포럼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네르바가 오현제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후계자를 잘 지명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후계자를 지명한 것도 네르바의 뜻과는 어쩌면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군과는 사이가 좋았다. 비록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록 말살형(생전에 이룬 업적들을 모두 기록에서 지워버리는)에 처했지만 근위대와 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네르바를 유폐시키고는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을 잡아 복수를 하라고 요구하였고, 네르바는 위기에 빠졌다. 결국 네르바는 당시 군공이 높았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른다.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그는 원로원과 군 모두에게서 환영을 받을만한 인물이었고, 로마는 다시금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양자계승을 한 것 외에는 네르바가 제위에서 업적을 이룬 것은 사실 없다시피 했고, 요즘의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네르바는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은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의 제위 기간이 길지 않은 것이 도리어 다행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하지만 네르바 황제가 선량한 황제였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왼쪽의 데릭 손더스가 편집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네르바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네르바 시대에 살았던 율리우스 아티코스, 라는 사람은 가문이 몰락했었지만, 운이 좋게도 자신의 낡은 집 침대 밑에서 거액의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 보물은 황제의 몫으로 넘어가는게 그 시대에서는 일반적이었으나, 당시의 황제였던 네르바는 공명정대하게도 조금도 받지 않고 보물 전체를 율리우스 아티코스의 몫으로 건네주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아티코스는 황제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두려웠는지 거듭해서 물었다. 일개 개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거액이라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르겠노라고 말이다. 그러자 선량한 네르바 황제는 화를 내며 네 멋대로 사용하라, 그것은 너의 재산이니까, 라고 답했다. 율리우스 아티코스는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라, 자신의 재산을 열심히 불리고 그 대부분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3.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지고의 황제Optimus Princeps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초인이었고, 검소했으며 특히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난 황제였다. 트라야누스가 특히나 유명한 까닭은 왼쪽의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했듯이 최초의 속주출신 황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조상들은 아마 로마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속주에 정착하면서 그 지역의 여성들과 결혼을 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속주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황제 즉위는 일종의 상징적인 평등성이었다. 속주 출신도 제위에 오를 수 있다, 라는. 트라야누스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로마 제국에서 관리로 활동하였고(그의 집안은 세도가로 짐작되지만 정작 관리의 길에 오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트라야누스 본인도 군단을 지휘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서 제위를 받았을때는 45살 무렵이었다. 제위에 오르기 전에 그는 플로티나와 결혼했으며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있다. 플로티나는 매우 중요한데, 그녀는 이후의 황제가 될 트라야누스의 사촌 하드리아누스(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종형이었다.)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사료가 없어서 잘 알려져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황제 계승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를 다룰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사실 트라야누스는 남자라면 한창때에 더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위에 오르고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 확장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된다. 도미티아누스가 포기한 다키아 원정을 다시금 시작한 것이었다.

 

다키아의 용맹한 왕 데케발루스는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더 뛰어난 군략가였고, 두 차례의 전쟁이후에 다키아는 정벌당하고 데케발루스는 자살하고 만다. 데케발루스는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으로 다키아를 키우고 싶었지만 그 꿈은 무산되었고, 로마로서는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다키아와의 긴장으로 인하여 계속 유지해야하는 군비가 많이 감축되었고, 수많은 값진 전리품으로 경기는 매우 좋아지게 된다. 특이하게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에 대하여 철저한 말살정책을 수행하였고, 금광과 각종 광물자원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자원들을 통하여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 공사를 시행한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공회장을 새로 설계하였고 트라야누스 기념주를 세웠다.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트라야누스 광장과 다리 또한 그의 업적으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어느 정도 경기를 회복시킨 뒤에는 그는 다시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이번에는 파르티아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키아처럼 성대한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었다. 파르티아의 영주들은 다키아처럼 철저하게 파르티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다. 그리고는 게릴라 활동으로 트라야누스의 진군을 막았다. 적이 확실히 눈 앞에 보인다면 싸워서 승리할 수 있지만, 공격하고 마치 물이 흡수되듯이 사라진다면 힘만 들 뿐 수고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파르티아의 수도를 합병하기는 하지만 때마침 일어난 유대반란과 새로 정복한 영토들에서의 반란때문에 로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안티오크(파르티아 전쟁에서의 보급처)에 일어난 지진의 영향도 컸다. 지진에서 트라야누스는 겨우 살아날 수 있었고, 건강도 악화된 상태였었다. 비록 그는 페르시아 만까지 당도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그의 진군의 끝이었다. 어쩌면 그는 알렉산더 대왕을 내심 경쟁자로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알렉산더 대왕 만큼의 명성을 얻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탄식했었다고 한다. 결국 로마로 돌아오던 그는 셀리누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위에 보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권, 에서 그때의 급박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저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트라야누스가 죽고 어떻게 하드리아누스에게 제위가 넘어가는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록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지만 엄밀한 부분이 많기에 참고할만하다. 사실 트라야누스 시절의 로마는 영토로서는 거의 최대 확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수많은 재물로 로마의 경기 또한 풍족하였다. 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은 가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대는 일종의 정오였다. 태양은 가장 높이 떠올라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알 것이다. 가장 높이 올라간 태양에게 남은 것은 저무는 것 뿐이라는 것을. 쇠망은 이때부터 벌써 다가오고 있었다.

 

 

 

4. 하드리아누스.

 

   오현제 중 가장 복잡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였다. 그런 그에게 매료되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는 소설을 남겼다. 이름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의 1권은 하드리아누스가 그의 세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종형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축하하러 그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그는 매부인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에게 방해를 받고, 그 방해는 그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된다. 그리고 트라야누스 다음의 제위에 오르게 되고 동방의 회담길에 올라 어느 요기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2권은 그가 제위에 올라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복종할 수 있는 존재라 그렇다고 말한다. 그가 정책에서 추구했었던 것은 인성Humanitas, 행복Filicitas, 자유Libertas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드리아누스는 일생동안 점성술에 빠져있던 사람이었고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왼쪽의 책은 그런 면모를 시인, 황제 등의 목소리로 바꾸어가면서 잘 서술하고 있는 역작이다. 실제의 하드리아누스도 위의 책에서 그려져있는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사료를 바탕으로 저 소설을 지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 소설에는 의도적으로 역사와 다르게 진행하는 부분(하드리아누스가 미트라교에 심취했었다던가, 요기를 만났다던가)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거의 비슷하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상당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대대장에 불과했던 트라야누스에게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누가 그 당시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물론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친인척이었기에 맡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었고 덕분에 하드리아누스도 황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트라야누스의 황후인 플로티나와 상당히 친했었는데, 그녀의 총애에 힘입어 트라야누스의 증손녀인 사비나와 결혼하였다. 사실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동성애자였고 속주 시찰로 외부를 돌아다니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로만 둘러싸인 조그마한 울타리 안에서만 평생 살았다. 하지만 황제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큰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집정관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 후 그의 출세는 주춤하게 되었다. 파르티아 원정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지휘를 맡아 군공을 세웠으나, 확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기에 시리아 총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어쩌면 트라야누스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서 멀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게 되고, 때마침 사망시 트라야누스의 곁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하는 플로티나가 있었다. 죽기 전까지도 제위를 누구에게 계승시킬 것인가, 에 대하여 묵묵부답이었던 트라야누스였기에 어쩌면 플로티나가 어떤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군대는 바로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 트라야누스의 정복전쟁들을 포기하고 귀환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매우 변덕이 심하고 베풀때에는 모든 것을 베풀었지만 수틀렸을때에는 매우 타산적인 정책을 펼쳤다.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원로원 의원 4명을 숙청한다. 하지만 그 또한 현제의 일원,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때문에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한 로마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시찰길에 오르게 된다. 어쩌면 이는 그 스스로가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땅들을 모두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한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결정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스페인,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단순한 지명만 열거하니 잘 와닿지 않지만, 동서로 길쭉한 로마 제국을 가로질러 끝에서 끝으로 향했다고 보면 된다. 그는 순방하면서 모든 부족한 방위체계를 고쳤다. 물론 이는 크게는 로마 제국의 균열을 메우기 위함이었지만 작게는 그 개인적인 호기심도 작용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어느 문필가가 말하듯 흥미로운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는 탐구자Omnium curiositatum explorator였다. 그런데 그의 호기심이 특히나 깊게 머문 곳은 그리스였다. 제우스 신전을 짓고 그들의 법률을 유리하게 고쳐주었으며 그리스인들에게 특혜를 많이 베풀었다. 특히나 점성술과 신비제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엘레우시스 비의에 그를 입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에게 배운 것은 그런 신비적인 의식만은 아니었다. 예술에 대한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덕분에 발달된 그의 예술가적인 성향은 그로 하여금 시를 짓게 만들고 건축물을 설계하게 하였다. 판테온 신전을 다시 지은 것도 그의 치세의 일이다. 오른쪽의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 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있던 루시우스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이동해서 목욕 문화를 배워서 다시 로마에 그것을 적용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아무 생각없이 즐기고 싶다면 한번쯤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증도 제법 잘 따라가는 편이다. 저 책에도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예민한 황제는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악몽이었다. 황제는 할례 금지령을 내렸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었고, 그 외에 유대교에 대한 로마 황제의 오해와 예민한 황제에 대한 두려움 등이 겹쳐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을 매우 난폭하게 다루었고 잔혹한 처벌을 집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복되는 반란에 지쳐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 지역에서 모조리 쫓아내기에 이른다.

 

하드리아누스는 속주의 순방 이후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제국은 매우 거대하였기 때문에 기력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질투심과 변덕스러움도 그의 건강이 나빠지는데 한 축을 담당했으리라. 그리고 건강이 나빠지고 투병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의 변덕스러움과 난폭함은 더욱 더 심해지고, 사납고 잔인해졌다. 그의 변덕은 후계자 선정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난폭함과 변덕스러움이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부분의 결정은 공정하고 온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계자를 선정할때는 위험이 따랐다. 바람둥이이며 평이 좋지 않았던 아엘리우스 베루스, 라는 귀족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었다. (사실 아엘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숙청한 원로원 의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어쩌면 원로원 의원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작용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일찍 죽었기에 오현제의 시기는 좀 더 지속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되는 17세의 안니우스 베루스, 였고, 그를 세손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후계는 누구를 삼아야 될까?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분별력으로 안토니누스를 고르고, 그에게 제위를 넘기는 대신 그 다음 자리는 마르쿠스의 자리가 되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외에 아엘리우스 베루스의 아들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도 양자로 삼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가 동시에 공동 통치를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안토니누스는 그 말을 따랐다.

 

 

 

5. 안토니누스 피우스.

 

  안토니누스는 본래 원로원 의원이었다. 공직 생활에서 흠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어쩌면 당연히 황제 후보에 오를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실제로 그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가 점찍었던 세손, 마르쿠스에게 제위를 넘기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이었으리라.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오래 살았다. 그는 온화한 성품이었고, 그의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다.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이었으니 말이다. 보통 명문가의 자식은 세태를 잘 모르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현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특히 두 안토니누스 황제에 대한 설명으로 그 대장정을 시작한다. 책에서 말하는 두 안토니누스 황제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왼쪽의 대광서림에서 나온 책은 일본어판 중역본으로 알고 있고, 아래의 민음사에서 나온 책은 완역본으로 알고 있다. 민음사판을 중심으로 참고하는 수준에서 읽어나간다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이 책들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황제는 매우 온후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는 변덕스러웠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그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는 그들을 설득하여 신격을 부여하고, 그외에 자잘한 일들을 처리함으로서 피우스(자비로운 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의 치세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외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런 기회를 틈타 그는 다른 황제들 이상의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의 제위 기간 중 가졌던 가장 긴 여행은 로마의 궁전에서 근처의 별장에 이동한 것 뿐이었고, 대부분은 로마의 궁전에서 통치하였다. 하드리아누스와 비교하자면 정말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로마인들은 그의 치세를 태평성대라고 여겼고, 실제로도 그랬다.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에서는 다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학문에 대한 열기가 높았다. 그가 아테네에 세운 학교에서는 국비로 철학과 수사학 등을 가르쳤고, 철학자들을 고용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철학자들의 급여는 매우 높았고, 이런 경향은 아테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정신적인 수양만 쌓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라는 것은 아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에 따르면 그는 연극을 좋아했다고 하며, 전 황제와는 달리 여성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양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게 만들었는데 그녀는 미모도 아름다웠지만 미모만큼이나 그 염문과 불륜으로도 유명했다. 철인황제라 불리게 되는 마르쿠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오현제 중에 영화 글레디에이터, 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황제가 바로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일 것이다. 그 외에 왼쪽의 책, 명상록으로도 매우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사실 명상록의 내용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잘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한 금언 모음집이랄까. 정의의 가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는 등의 내용을 품고 있다. 하지만 별로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내용을 떠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예시로 누구나 선이 옳고 악이 그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필요할 때 입 밖에서 나오는 일은 드물다. (선과 악이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지는가, 와 같은 의문을 접어두자면.) 생각해보면 사실 그는 이런 책을 쓸 수 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어렸을때부터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열두 살 때부터 이미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17살의 나이에 공동 황제로 오르기로 예정되어있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가 오래 사는 바람에 40살이 넘어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토니누스의 자리를 빨리 획득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지 않았고, 적법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의 자리를 뺏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그에게 이성의 힘과 정신의 힘을 가르쳐주었으며 사악한 마음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긴 예비황제 기간은 그에게 통치술과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파우스티나와 결혼한 뒤에는 예비황제로서 안토니누스와 함께 국정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앞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를 하며 루키우스 베루스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언급했을 것이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방탕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야말로 황제로서의 모든 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황제가 된 루키우스는 통치는 그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맡기고 그가 누리지 않는 향락들을 모두 자신이 누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루키우스에게 유일한 장점이 있었으니 그는 대부분의 결정을 자신보다 뛰어난 형, 마르쿠스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무능하기만 하고 게으르기만 하다면 유능한 인물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 된다. 그야말로 중국 삼국지의 촉의 유선이 제갈량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능하고 게으른데다가 거기에 귀가 얇고 간신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을 방해하면 그것은 정말 나쁜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유선이 정말 많이 제갈량의 발목을 잡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정사에서도 딱히 다르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 루키우스는 유선보다 나았다. 전쟁, 전염병, 미풍양속 바로잡기 등 대부분의 업적은 마르쿠스가 행했다. 루키우스는 그저 마르쿠스를 따르고 그보다 나은 형을 존경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결국 과로를 못이겨 사망했다. 마르쿠스도 마찬가지 길을 걸을 것이었다. 오른쪽의 평전은 그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자료를 모아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물론 루키우스 베루스가 아예 게으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형과 함께 게르만족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결국 루키우스는 싸움이 끝나고 (169년)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며, 마르쿠스는 그를 마음 깊이 애도했다.

 

평화로웠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파르티아가 침공했다. 게르만족이 침공했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서 그는 전장으로 향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 몽테뉴가 프랑스로 잡혀온 야만족 추장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대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을 왕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추장이 몽테뉴에게 말했다. 전쟁에서 가장 앞서 달려나가는 사람이 왕이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왕의 이름에 걸맞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항상 최전선으로 뛰어들어갔으며 국경선을 유지하였고 외적을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뛰는 황제라도 전염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에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군공을 세웠고 그는 동부의 로마군 총지휘관의 자리에 오르고 이집트까지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파르티아의 침공을 막은 뒤 돌아온 뒤 그의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많은 로마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선이 지루하게 길어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북부에서 한동안 돌아오지 못하자 로마에는 마르쿠스가 죽었다, 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그 소문을 들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자신이 황제 위에 오른다고 (175년) 선언하고 반란을 시작하지만, 이 때 마르쿠스는 한달음에 로마에 달려와 군사들 앞에사 긴 연설을 한다. 로마의 안녕을 위해서는 카시우스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도 있다, 나는 늙고 지쳤고 힘들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카시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 갓 북부 지역의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돌아온, 그야말로 로마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바친 늙은 황제의 초라한 모습은 군인들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켰고 카시우스는 이윽고 부하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럼에도 마르쿠스는 자신의 말에 한 점 거짓이 없었다는 듯, 카시우스의 지지자들에 대한 원로원의 복수를 막았다.

 

파우스티나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황제의 아내였던 파우스티나가 이 카시우스의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이 있다. 카시우스가 황위에 오르면 자신의 황후 자리도 위협받게 될까봐 카시우스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료가 신뢰성이 없다고 하는 말도 있다. 파우스티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행실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명상록에서 마르쿠스는 항상 자신의 아내가 정숙하고 현명하며 사려깊다고 말했다. 황제는 그녀의 애인들을 높은 자리로 승진시키기도 했었고, 심지어 그녀를 여신으로 선포하도록 원로원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모든 남녀는 이 '정숙'한 여신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여야 하였다. 아마 마르쿠스는 자신의 아내의 음행을 전혀 몰랐거나, 혹은 믿고 싶지 않았거나, 또는 들어도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갔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덕으로 유명한 황제였지만 아내를 여신으로 선포한 일은 그의 오점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사랑, 이라면 사랑이 통했던 것일까,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의 힘든 원정에 두 번이나 함께 동행하였고 이윽고 원정길에서 죽었다.

 

마르쿠스는 177년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콤모두스의 실정이 이어진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사악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려고 철학자의 강의를 많이 듣게 하였지만 모두가 마르쿠스 그 자신 같지는 않은 법이다. 한창 놀고 싶을 때의 나이인 콤모두스는 나약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젊은이였다. 사실 나약하고 게으르기만 했었다면 로마 제국은 다시 내란으로 빠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신들의 득세로 점차 잔인해지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이 모든 것을 내다보았을까?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쿠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주지 않는다면 나라가 반으로 쪼개질 것이고, 그것은 그야말로 내란의 시작일테니 말이다.

 
 

 

7. 오현제의 공통적인 특징.

 

  다섯 명의 현제는 공통적으로 양자계승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았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를 예비했다. 하지만 이 양자계승은 친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친자가 있었다면 그들은 마지막 현제, 마르쿠스처럼 친자에게 권위를 조금이라도 쥐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겨진다.(황제의 친자, 라는 권위는 정통성 확보에 가장 유리하다. 이것이 반란의 명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양자계승을 했고 그 계승은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유능하였으니 말이다.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치세를 황금 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으며 황제들의 유능함을 칭송했다. 이 시기에는 이원집정제는 그 힘을 잃어갔으며 이윽고 로마 공화정의 주축을 이루었던 원로원에는 황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물론 황제가 원로원과의 다툼을 피하였던 것도 컸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제외하면 원로원 의원 중에서 처벌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모습을 낳았고, 이는 이후에 콤모두스가 향략을 벌이거나 공포 정치를 행할때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저렇게 한 곳으로 권력이 모이게 되면 나라 내부의 반란은 쉽사리 일어나기 어렵지만 지방직으로 내려가는 것을 일종의 좌천으로 여기게 되는 경향도 생기게 된다. 오현제 시대는 그 빛이 너무나 찬란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맺는 말을 대신하여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현대 정치를 볼때, 저런 다섯 명의 왕의 특성이 좀 계승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양자계승과 같은 특성말이다. 계파나 이념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지명하고 나라를 이끈다면, 그런 정치가가 있다면 마음놓고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선정은 정직한 사람들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워낙 사료가 없어서 그녀의 책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의 책에서 얼핏 보이는 생각들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터라 대부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저 말만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선정이라는 것은 분명 그런 것이다. 중국의 요순임금시대를 태평성대라고 불렀던가, 요임금의 치세에는 임금이 있는지조차 백성들이 몰랐다. 진정한 치세는 그런 것이며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저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지워진다 : 좋은 왕은 죽은 왕뿐이다. 정치가와 왕은 다를 것이라고? 하지만 정치가라면 다른 정치가들을 세뇌라도 시키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저런 선정을 베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정을 관철시키려 한다면 그는 왕, 전제권력자가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뛰어난 한 사람의 전제정치와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의 중우정치의 대결로 귀결된다. 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을 싫어한다. 제대로 내용을 모르는데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엄밀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리고 검증이 없이 한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행태를 증오한다. 현대식으로 보자면 SNS의 무분별한 리트윗들을 정말 혐오한다. 물론 혼자서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보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은 증폭되고 오해는 지속된다. 특히 민감한 정치나 종교, 계층 등의 주제에 대해서 더욱 경향이 심화된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증오 또는 혐오의 칼날은 나 자신도 피해갈 수 없기에 자기혐오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혐오스러워한다. 나 또한 아직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런 어리석은 대중들이 정치를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어리석은 정치가 가장 위대한 왕의 통치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정치는, 적어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정치는 가능성에 그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현실의 발전과 미래의 가능성, 둘 중 어디를 택하는게 옳겠는가? 혹은 다수의 어리석은 인물들이 모인다고 해봤자 1+1=1 이상이 나오겠는가? 1+1=2라도 나오면 다행이다, 그럴바에야 처음부터 100을 고르는게 낫지, 라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100은 하나의 틀을 넘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더하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은 다르다. 사실 무엇보다도 1+1이 하나의 결과, 1 혹은 2로만 표현된다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각 개인의 합은 단순한 덧셈이 아니다. 1+1은 1+1의 가치를 가지지 2라는 가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1+1=2라면 100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1+1이 1+1이라면 100과는 비교기준 자체가 설정되지 않는다. 이는 틀을 넘는다는 이야기와 같다. 덧붙이자면 각 개인은 각성에 따라서 그들의 능력이 개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1+1은 100+100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언제나 어리석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관점도 있다, 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으로 본다면 정치나 어떤 활동에 있어서 개인들 각자는 그들의 특성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하나의 힘을 발휘하는 그런 모습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과 설명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쉽게 다중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현실의 발전과 미래의 가능성 중 무엇을 고르는 게 옳겠는가, 라는 질문에는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현실의 발전에 노력해달라. 나는 미래의 가능성에 걸겠다, 라고. 이는 가능성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수한 사람들이 가진 무수한 가능성들은 각자의 무수한 다양성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사회가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반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헛된 망상처럼 보이는 수많은 가능성에 몸을 던진 사람들로 하여금 성숙되어 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오현제는 필요없다. 그들이 아무리 흥미롭고 위대하더라도. 그리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번민하라. 우리 시대에게는 오현제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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