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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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작가의 말’이다.

그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책을 통해 '소통'을 말하고자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개개인이 만나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 공간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으며 역시 100%의 완벽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서로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결핍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책은 아홉 개의 색깔을 갖고 있다.
각 단편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오늘을 산다. 그들은 갑작스레 불꽃이 이는 사고현장을 목격하기도 하고, 우연히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세상이라는 세계를 접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낯설고, 두렵고, 또 설레기도 한 일들이 눈 앞에 무수히 펼쳐진다. 그런 순간들은 나를 무지상태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한 것 같다.
책 속에서 마주한  주인공들의 오늘 역시 그러했다.

서른 살.
미래를 바라봐온 십대, 현실과 싸웠던 이십대라면, 삼십대는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다.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끊임 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도 '노력'을 해야한다. 그 안에서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하고 그것 역시 '노력'만이 정답인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서른 살과 나의 실제 서른 살은 같을 수 있을까?
누군가가 지나온 서른 살과 누군가는 지나게 될 서른 살, 누군가는 막연히 그리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책망할 수도 있는 나이, 서른 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나’는 서른 이란 숫자가 내 나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 그녀는 서른이 되기 일 년 전 남자친구와 이별했다.
서른이 되기 전 새로운 인생을 찾아보겠다고 선언한 남자친구가 택시 운전을 하겠다는 말이 진부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녀는 자신의 서른 살을 준비한다.
그녀의 서른 번 째 생일은, 페터 한트케의 어떤 소설의 주인공처럼 미국의 어느 소도시를 지나가다가 저녁 무렵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른 번째 생일날 그녀는 세 시간의 짧은 수면과 낯선 진외종조부의 손자 부부와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전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서울 시내에서 그의 택시를 탈 확률이 7만 분의 1이라는 사실을 가로지르고서.
그녀는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을 뒤로 돌아본다. 스물네 시간이 1440개의 일 분들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던 서른 이전의 시간들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일들이 도저에서 일어나고,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낯선 현실과 마주했을 때의 막막함이 책 속에서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래서 순간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누구나 상처를 받고 외로워진다는 것도.
돌이켜보면 막연함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아픔은 가족 간의 ‘사랑’, 여인과의 ‘사랑’, 지나온 시간에 대한 추억의 ‘사랑’을 통해 치유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언제나 징후를 드러내는 오랜 기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실연의 고통에 잠겨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예기치 않게 쏟아진 함박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또 그만큼이나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쓰러진 날 만나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날 헤어지게 된 커플이.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마주하게 된 위기 앞에서 무너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류 코미디언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사.라.진.다.
이야기 속 그녀는 촬영 차 찾았던 점자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알게 된다.
무대 위에서 대사 없이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고 무대 밖으로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했다.

누군가의 부재로 그 사람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처럼, 빛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부재는 지루하고 답답하던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실마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빛을 따라 그녀 또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나는 가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당신이기에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생각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내게 ‘소통’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갑작스레 시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단한 삶은 가족들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벗고 사막 속으로 사라져 간 아버지의 삶에서도, 7만 분의 1이란 확률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서른 살을 살게 될 것 같아 헤어진 남자친구의 택시를 타는 서른 살의 ‘나’ 모습에서도.

누군가가 내게 삶의 아픔을 호소해 온다면 나는 '네 마음을 다 알아' 라는 말 대신에,
'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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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죽여라
구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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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지니 ‘게으름’이 두 배가 되는 것 같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순전히 날씨가 춥다는 변명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게으름을 죽여라>는 책을 마주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책제목 때문이었다. ‘게으름을 죽이는 방법’등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가장 컸던 듯하다.

이 책에는 아홉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예전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된 소설집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장편소설만 읽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소재들을 풀어헤친 단편들의 매력을 알게 된 듯, 소설집만 골라 읽는 느낌이다.

각설하고, 
처음 책을 펼친 후 덮는 끝까지 떠오르는 이미지는 ‘검은색’이었다.
아마도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자살, 죽음 등의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쓰기만 할 뿐 남의 글을 읽지는 않았다.
쓰기만도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외로웠고
자신의 글을 읽어줄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독평사>는 우연히 독평사가 된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의뢰인의 글을 읽고 인터넷 상에서 만나 평을 한다. 그리고 의뢰인의 글에 대한 평가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글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사람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글을 통해 만난 의뢰인과 독평사일 뿐이다.

독평사인 그녀는 의뢰인의 글들에 특별한 애정이 없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대화창에서 의뢰인의 글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불안한 만남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평가하고 단정지어버리는 지금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뜻하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주고, 원하지 않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과 닮아있다.

독평사를 통해 자신의 글과 새롭게 마주하게 된 의뢰인은 화를 내고, 결국 대화창을 나가버린다. 얼마 후 의뢰인의 친구가 독평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그녀의 팔과 다리가 부러지게 만든다. 남의 글을 읽고 상처를 준 대가는 삭발에다 팔다리 하나씩 부러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평사 역시 자신의 일에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닐는지.
누가 약자고 누가 강자인지, 누가 악하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
뜻하지 않게 독평사가 된 사람과 필요에 의해 자신의 글을 평가받고 싶어 했던 의뢰인 모두 약자가 아닐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고 한 자리에서 외롭게 빙빙 도는 사람들의 모습들.

그들은 게으르고 싶어서 게으른 게 아니었다.
뭘 하고 싶은지를 몰라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몰라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못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나는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게으름을 죽여라>에서 주인공(나)은, 대학졸업 후 백조생활을 하고 있다. 스물여섯의 내가 빈둥빈둥 논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게으름치료센터’라는 곳으로 나를 보낸다.
그 곳에는 내 또래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무능력’과 ‘게으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도하지 않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지 못한 나는 입을 닫고 잠만 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면서도 과연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기에는 왠지 어색하고 속상하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이런 내 생각들을 잠시 위로해본다.
나의 게으름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고. 내 주변의 상황들이 나를 조금은 더 게으르게 만들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스스로를 조금은 위로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게으름을 죽여라>책 속에서 만났던 아홉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외로웠다. 그들 모두는 세상의 틀 속에서 꿈꿨고 소리 내었다. 비록 누군가는 입을 닫아버렸고, 자살을 선택했고, 어쩔 수 없는 생존의 환경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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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사랑해
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지음, 유혜자 옮김 / 숲속여우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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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요즘 내 관심사는 ‘아이’다.

결혼을 하고나면 아이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던 말을 이제야 조금씩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엄마, 세상 어느 이름보다도 ‘엄마’라는 이름표가 가장 잘 어울리는, 처음부터 ‘엄마’로 나고 자랐을 것 같은 이름.

그런 이름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게 책 한 권이 다가온다.

<엄마가 사랑해>.

책 속에는 스위스 국적의 부부가 한국아이를 입양해 지금까지 키워온 이야기가 담겨있다.

입양 전부터 입양 후 아이와 함께 보낸 2년의 시간을 일기로 담아냈다. 입양당시 그들에게는 다섯 살 난 라아스라는 남자아이가 있었고 1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한국에서 태어난 웅이라는 남자아이를 입양하게 된다.

지금이야 입양에 대한 이미지나 관점이 많이 달라졌지만 십년 전만 하더라도 입양은 낯설었다. 쉽게 입에 담을 수도 없었고, 좋게 바라볼 수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낳지 않은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내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매일 밤 신경질을 부리고, 보채고, 울고 소리 지르는 웅이를 마주할 때면 더욱 그랬다.

어릴 적 받은 충격 때문인지 웅이는 먹는 것에 집착했다. 밤마다 배고프다고 먹을 것을 요구했고 식사 후 몰래 음식을 먹어댔다. 자꾸만 늘어나는 몸무게 때문에 가족들은 통제했지만 아이를 말릴 수 없었다. 막무가내인 웅이를 보며 그들 부부가 새삼 대단해보였다. 내 아이가 아닌 입양아에게도 똑같은 관심과 사랑을 전하는 엄마, 아빠가.

고집불통 막무가내인 웅이가 낯선 환경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단어는 ‘엄마’였다. 아이 크기만큼 작은 입술에서 ‘엄마’를 찾을 때,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모국어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네 살 배기 아이는 자신과 다른 말을 쓰고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마’라는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위대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문득,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새로운 식구에 대한 큰 아이의 거부감도 있었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웅이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책을 읽어갈수록 부부는 자신들의 선택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행복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입양아인 웅이 때문에 자신들의 친아들인 라아스가 힘겨워할 때도 그들은 기다리며 인내했다. 결국 라아스와 웅이의 사이는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이자 형제로 발전하게 된다.

세월이 흐른 지금, 40년 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입양되어 온 웅이는 자신만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아내와 쌍둥이 딸, 아들을 둔 가장이 되었다. 웅이는 한국에 대해 알기를 두려워했던 마음이 사라져 언젠가는 고향을 찾아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하면서 자연을 구경하고,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도 했다.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이다. 자신의 부모를 해하고 아이들에게 폭행과 폭력을 일삼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따뜻한 빛 한 줄기를 본 듯하다.

낳은 정도 중요하지만 기른 정이 무섭다는 말이 언뜻 떠올랐다. 가족들의 사랑 속에서 낯설고 두려웠던 그 곳에서 꿈을 펼치고 새 삶을 개척해간 웅이를 보면서 나는 사랑의 힘을 다시금 깨닫는다.

웅이를 막내아들로 맞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부부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나중에, 할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인생이 새삼스럽게 찾아와 문을 노크하지는 않을 거라고.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과 고통도 모두 삶의 일부분이고, 그런 힘든 시기도 삶에 대한 의욕과 사랑이 건재하다면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하게 될 거라고.

항상 ‘입양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라고 생각해왔지만 책을 접한 후 그런 생각조차 부끄러웠다. 그들은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났고 행복해했다.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사랑했기에 아이의 몸과 마음은 성장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입양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족을 꾸리게 될 많은 입양가족들의 설렘이 내게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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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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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란 말은 내게 친근하다. 쉽게 감격하고 흥분하는 다혈질에다 B형의 단점만 고스란히 묻어나는 성격의 나는 ‘도가니’란 말이 참 좋다.

하지만 책 <도가니>와 마주했을 때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인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실감했다. 더 격렬하고 슬픈 ‘도가니’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감동의 도가니를 선물해주리라 믿으며 펼쳤던 책<도가니>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과 조우했다. 지독한 안개 때문에 무진시(霧津市)라고 불리게 된 도시에서 일어나는 거짓된 상처들.




책 <도가니>는 서울에서 농아학교의 기간제교사가 되어 시골로 내려온 선생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처음 낯선 도시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짙은 안개다. 눈앞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익숙한 도시 무진, 그 곳에는 농아들이 사는 자애학원, 그의 새로운 일터가 자리하고 있다.

‘자애학원’이란 이름에서 나는 ‘메아리 학교’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보게 되는 노란빛의 메아리 학교 버스가.

농아.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들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일반인들에게는 그들이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불린다는 것 밖에. 그들은 내 말을 들을 수 없고 나 또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밖에는.




책 <도가니>속에는 입이 아닌 손짓으로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세상에 진실을 말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그들이 있다. 평화롭고 고요한, 뿌연 안개에 가려져 신비감마저 맴도는 그 곳에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악행이 일어나고 있다.

책은 이름 있고 권위 있는 사회의 기득권자들에게 소리 없이 대항하는 장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안개 속에 감춰진 진실과 거짓의 실체 그리고 눈물과 아픔이 책 속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직 미성년자인 청각장애인 연두, 유리가 있다. 그 아이들의 눈은 진실을 보고, 손짓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 아이들의 손짓이 말하는 진실은 놀랍게도 지역사회에서 덕망 있는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 그리고 지도 교사에 의해 자행된 수차례의 성폭행.

악행의 흔적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껏 누구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리 없는 외침이 책을 읽는 내내 전해올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아이들의 편에서 손짓의 언어가 아닌 입으로 그들의 잘못을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선생님의 눈이 그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책 속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제노비스 사건을 떠올렸다. 1964년 뉴욕에서 퇴근길에 일어난 제노비스라는 여인의 살인 사건 현장에는 목격자가 38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향해 도움의 손짓을 건네지 않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녀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 ‘방관’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농아 아이들의 숨 죽여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절규가 맴돌았다. 어쩌면 아이들의 아픔은 사람들의 차가운 외면과 방관의 눈빛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마주한 장애아들의 인권 윤린은 내게 얼마나 용기 내어 살고 있는지, 타인의 이야기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 기울였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소리 내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었던가.

진실의 편에 맞서 당당하게 싸울 의리가 내게는 있었던가.

나 또한 짙은 안개를 핑계 삼아 진실을 외면한 적은 없었던가.




책은 오늘을 사는 비겁한 방관자들에게 진실의 힘을 다시금 알려준다.

이 책 속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사실을 축소해 소설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지막 선고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그린 젊은 인턴기자의 스케치기사였다고. 그 마지막 구절은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였던 것 같다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쉽게 묻혀버릴 한 줄의 기사는 소설이 되었다. 그리고 무지한 내게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오게 됐다.

비록 소설 속 악행을 자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했지만, 스스로에게 남이 아닌 자신의 편에서 묵묵한 방관자의 태도로 일관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의도하지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게 한다.




<도가니>를 읽는 내내 나는, ‘안타까운 진실’과 ‘불편한 거짓’ 사이를 오르내렸다. 책을 통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흥분하기도, 진실의 편에 서 있는 많은 희망 때문에 감격하기도 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며 그것들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알 수 없다.

안개가 가득한 소리 없이 고요한 무진시는 내가 오늘을 살고 있는 사회고, 안개 속에서 또 어떤 이들이 안타까운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난히 짙었던 도가니 속 안개 끝에는 반드시 진실이 또 다른 희망으로 번져있을 것이리라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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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2009.가을 - Vol.14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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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청소년을 위한 문학문화잡지 <풋>은 싱그럽다. 온 세상이 색을 입어 화려함을 자아내는 요즘, <풋>속의 글들은 저마다의 색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풋>은 청소년들을 위한,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잡지다.

나는 이 잡지를 통해 청소년들의 생각에 잠깐씩 동화가 되기도 하고 색다른 발상에 충격을 먹기도 했다. 때론 그들의 글 솜씨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클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써내려 간 여러 글들은 통통 튀는 십대만의 매력을 글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미래 작가들의 글과 마주하면서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이 무색해졌다.
‘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글 속에서 고민한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묘한 매력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내가 <풋>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은 성일여고 2학년 김나윤 학생이 쓴 ‘우렁이 클립’이었다. 이 글은 일기장에 자신의 속내를 꼼꼼하게 적은 뒤 자물쇠를 채워 보관하는 딸과 그 일기장을 소리 없이 살펴보는 엄마의 이야기다.
글을 읽다 말고 학창시절 일기쓰기를 즐겨하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공부하는 중간에 간식을 만들어주고 다정스런 목소리로 내 고민을 이해하고 궁금해 하는 엄마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렸던 시절. 나의 엄마는 바쁘고 고된 삶을 살았다. 그 시절 꿈꾸던 엄마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물론 엄마가 놓인 현실과 삶의 굴레가 버거웠고 힘들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딸의 일기장 속 글들과 마주하기 위해 클립으로 자물쇠를 여는 엄마, 그리고 오늘도 자신의 일기장을 살펴 볼 엄마에게 ‘내 엄마로 살아주어서 너무 고마워요’라고 적는 딸.
우렁이 각시처럼 소원을 들어주는 ‘우렁이 클립’을 통해 엄마는 딸의 고민을 이해하고, 딸은 그런 엄마의 마음에 한 줄의 글로 대신한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보면서 항상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우리네 엄마의 삶을,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식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어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글을 통해 나는 또 한 번 엄마의 마음을 느껴본다.
그리고 아주 작은 ‘클립’이란 물체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풋>을 통해 다시금 눈을 떠본다. 익숙한 것에서 매력을 찾아내 본다.

책을 덮은 뒤에 뜻과 이치가 눈앞에 살아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살아있는 독서이다.
책을 펼쳤을 때는 알았는데 덮은 뒤에 아마득해진다면 그건 죽은 독서이다.
김창흡(1653~1722) 삼연집

나는 살아있는 독서를 하고 있는 것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대답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이나 행동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독서는 책을 덮으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독서의 참맛은 읽는 책의 많고 적음이나 읽는 속도의 빠르고 느림이 아니라, 활자 위에서 눈길을 거두어 고개 들어 한 번 생각하고, 책을 덮고 그 이치를 되씹으며 의심하는데 있습니다.

독서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겨보게 된 문장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질 때가 많다.
하루에 얼마만큼의 글을 쓰고 어디서 발상을 얻으며 얼마의 열정과 시간을 들여야 할까?
<풋>을 통해 알게 된 김언 시인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시를 쓰는 빈도(?)에 대한 질문에 시인은 대답한다.
‘시간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무조건 1년에 4, 50편씩은 썼던 것 같다’고.
“잡문을 아무리 많이 쓴다고 해도 출퇴근하는 시간에는 비할 게 아니더라고요. 해보니까 느끼겠어. 안 될 때도 쓰고 있고, 잘 될 때도 쓰고 있고, 안될 때 써놨던 것도 낭비가 아닌 것 같아요. 2군이 튼튼해야 할 것 같아, 2군이.
올해는 출퇴근하면서 대여섯 편 밖에 못 썼어요. 그동안 재고로 버티고 있는데, 재고 떨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죠. “
끊임없이 쓰는 것을 반복한다는 시인의 이야기 속에서 독서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곁에 책을 두고 항상 마주 하는 것이야 말로, 독서의 참맛을 이해하고 살아있는 독서를 하기 위한 지름길 인 것만 같다.

청소년 잡지 <풋>.
표지 속, 누군가 청소해 놓은 것만 같은 청량한 하늘 아래 말라가는 빨래처럼 <풋>을 통해 묵은 떼가 빠지고 상쾌해진 기분이다.
앞으로도 <풋>속에 담긴 글들이 계속 ‘맑음’ 상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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