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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작가의 말’이다.
그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책을 통해 '소통'을 말하고자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개개인이 만나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 공간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으며 역시 100%의 완벽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서로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결핍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책은 아홉 개의 색깔을 갖고 있다.
각 단편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오늘을 산다. 그들은 갑작스레 불꽃이 이는 사고현장을 목격하기도 하고, 우연히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세상이라는 세계를 접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낯설고, 두렵고, 또 설레기도 한 일들이 눈 앞에 무수히 펼쳐진다. 그런 순간들은 나를 무지상태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한 것 같다.
책 속에서 마주한 주인공들의 오늘 역시 그러했다.
서른 살.
미래를 바라봐온 십대, 현실과 싸웠던 이십대라면, 삼십대는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다.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끊임 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도 '노력'을 해야한다. 그 안에서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하고 그것 역시 '노력'만이 정답인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서른 살과 나의 실제 서른 살은 같을 수 있을까?
누군가가 지나온 서른 살과 누군가는 지나게 될 서른 살, 누군가는 막연히 그리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책망할 수도 있는 나이, 서른 살.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나’는 서른 이란 숫자가 내 나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 그녀는 서른이 되기 일 년 전 남자친구와 이별했다.
서른이 되기 전 새로운 인생을 찾아보겠다고 선언한 남자친구가 택시 운전을 하겠다는 말이 진부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녀는 자신의 서른 살을 준비한다.
그녀의 서른 번 째 생일은, 페터 한트케의 어떤 소설의 주인공처럼 미국의 어느 소도시를 지나가다가 저녁 무렵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른 번째 생일날 그녀는 세 시간의 짧은 수면과 낯선 진외종조부의 손자 부부와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전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서울 시내에서 그의 택시를 탈 확률이 7만 분의 1이라는 사실을 가로지르고서.
그녀는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을 뒤로 돌아본다. 스물네 시간이 1440개의 일 분들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던 서른 이전의 시간들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일들이 도저에서 일어나고,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낯선 현실과 마주했을 때의 막막함이 책 속에서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래서 순간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누구나 상처를 받고 외로워진다는 것도.
돌이켜보면 막연함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아픔은 가족 간의 ‘사랑’, 여인과의 ‘사랑’, 지나온 시간에 대한 추억의 ‘사랑’을 통해 치유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언제나 징후를 드러내는 오랜 기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실연의 고통에 잠겨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예기치 않게 쏟아진 함박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또 그만큼이나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쓰러진 날 만나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날 헤어지게 된 커플이.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마주하게 된 위기 앞에서 무너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류 코미디언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사.라.진.다.
이야기 속 그녀는 촬영 차 찾았던 점자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알게 된다.
무대 위에서 대사 없이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고 무대 밖으로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했다.
누군가의 부재로 그 사람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처럼, 빛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부재는 지루하고 답답하던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실마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빛을 따라 그녀 또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나는 가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당신이기에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생각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내게 ‘소통’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갑작스레 시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단한 삶은 가족들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벗고 사막 속으로 사라져 간 아버지의 삶에서도, 7만 분의 1이란 확률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서른 살을 살게 될 것 같아 헤어진 남자친구의 택시를 타는 서른 살의 ‘나’ 모습에서도.
누군가가 내게 삶의 아픔을 호소해 온다면 나는 '네 마음을 다 알아' 라는 말 대신에,
'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