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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대학시절 과제 중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생각을 서술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성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 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던 선배도 있었던 것 같다.
평범하게 사는 삶을 왜 지향하는지 알지 못했던 내게 선배는 적당한 나이에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꼭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었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평범하다’는 단어는 말 그대로 무난하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너는 모른다> 책 속 가족들과 조우했을 때 ‘평범하다’는 단어의 뜻이 좀 더 명확해진 것만 같았다. 책 안에는 김상호, 진옥영, 김은성, 김혜성, 김유지, 다섯 명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오늘을 산다. 넉넉한 집안 형편은 안정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말 수가 적은 가족들의 저녁 식사는 다 커버린 자식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여느 가정의 ‘평범한’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은 이 가족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것만 같다.
함께 식사를 하고 몇 마디의 대화들이 오가고 서로의 삶터인 직장,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들. 그 속에 유지가 있다.
김유지.
온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
아빠 김상호와 엄마 진옥영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언니인 김은성과 오빠인 김혜성에게는 이복동생이다. 아빠, 엄마, 언니, 오빠란 이름의 그들은 유지에게 평범한 모습의 가족을 만들어주는 울타리가 된다.
하지만 그 아이의 시선과 표정을 따라가다 보면 회색빛과 닮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자라는 집안은 노랗고 붉은 색감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어둡고 침울한, 그래서 애처롭기만 한 공간과 닮아 있다. 그 안에서 자라는 유지는 온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책은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혼자서 삶을 사는 방식을 하나 둘씩 배워가는 유지의 실종으로 이야기가 이어져나간다.
아이는 통닭과 피자 사이에서 자신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던 오빠를 잃고, 자신의 존재에 무지한 아빠를 잃고, 자신에게 만큼은 헌신적이지만 늘 똑같은 슬픈 표정을 지닌 엄마를 잃는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불러보지도, 안기지도 못했던 언니와도 이별한다.
평범해 보이지만 위태로운 그 공간 속에도 가장이 있고, 엄마가 있고, 언니가 있고, 오빠가 있다.
장기 밀매를 하면서 무뚝뚝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사는 아빠.
자식에게 부모라는 울타리를 든든하게 쳐주고 싶었던 아빠는 죽음과 생의 경계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는 유지의 실종을 알릴 수도, 묵인할 수만도 없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이를 찾기 위해 노력할 뿐. 잃어버린 아이를 애타게 찾는 그의 모습은 수년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과 닮아 있다.
기쁨과 슬픔을 내색하지 않으며 극도로 절제된 감정을 갖고 사는 친절하지만 무표정한 엄마. 그녀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새로운 가족 곁에서도 이방인이었고 남편의 나라에서도 그들과는 다른 이. 방. 인의 삶을 살았다. 그런 환경은 그녀의 삶을 스스로도 주변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잃어버린 후 그녀의 삶은 자신에게도 더욱 낯설게만 다가온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하루를 살아간다.
혼란스러운 가족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언니. 그녀는 다섯 명의 가족들 사이에서 제일 흔들리는 불빛이었다. 자리 잡지 못하고 겉돌았고 부정했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가족들의 숨결을 느끼기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면서 혼자 아파한다.
오빠는 중심을 잘 잡고 산다. 의대에 입학 했고 얼마 다니지 않아 휴학했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하기에 서슴없었던, 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웠던 사람이다.
누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걱정 했고, 동생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가족들 그 사이에 잃어버린 유지가 있다.
바이올린을 친구 삼아 지내는 아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족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야 할까? 얼마나 알고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곱씹었던 수많은 질문 중의 하나는 ‘너는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너는 모른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마음을, 동생의 속내를, 언니와 오빠의 일상을 얼마나 공감하고 알고 있는 것인지. 너무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잘 알고 있다’고 단정 지으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책 속 나약한 유지의 엄마처럼 늘 가족 곁에서 이방인의 모습으로 겉돌면서 주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지의 실종, 아이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에게 많은 부분을 어색해하고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는 것만 같아 애잔함이 더해진다.
책의 말미에 유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작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린다든가 언니의 이야기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입을 벌려 활짝 웃음을 보이는 것 외에는.
하루 평균 164명이 사라지는 이 거대한 도시에 내가 살고 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타들어 가는 사람들의 삶 뒤로 같은 공간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
누군가는 소리 없이 물속에서 죽어가고 혹여는 사고로 운명을 등지기도 하고 새 생명이 잉태되기도 하고, 타인의 희생으로 꺼져가는 희망에 불씨를 지피기도 한다.
불완전하고 더럽고 답답하고 지독스럽지만 따뜻하기도 한 낯설고 조악한 공간 안에 '가족'이 산다. 네모반듯한 식탁에 앉아 몇 개의 그릇에 자신의 수저를 부딪치며 밥을 먹고, 같은 변기를 사용하는, 아버지의 수입을 걱정하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가족이 살아간다.
책 속에서 마주한 가족은 조금은 섬뜩하고 애처롭고 아프게 오늘을 살아간다. 우연을 가장하고 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생각해 본다.
고마운 존재, 한 쪽 가슴이 애잔해지는 뭉클한 울림.
부모라는 이름으로, 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족에게 스스로는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본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