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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가족은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
어릴 적부터 내게는 상상 속의 가족이 존재했다.
양복을 입은 자상한 아빠와 앞치마를 하고 활짝 웃는 엄마, 사이좋은 오누이 혹은 형제의 모습. 하지만 나의 가족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아이었을 때부터 그려왔지만 부합될 수 없었던, 현실 속 가족의 모습이 멀어지게 되면서 내게는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다.
내가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된 것은 대학을 입학한 후 자취생활을 하면서 부터였다.
항상 작업복 차림에 피곤함이 묻어있는 지친 어깨를 가진 아빠는 관광지에서 활짝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고, 각종 반찬과 잘 익은 김치는 엄마의 흔적을 대신했다. 남동생은 가끔 군에서 보내오는 몇 통의 편지와 전화통화로 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내 삶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고령화가족]이란 책과 처음 조우했을 때 사실 나는 불편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터무니없이 사실적인 말투, 이야기 속 가족들의 모습은 ‘부조화’였다. 어쩌면 사회 부적응자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이가 좋지 못한 형제, 그 사이에 놓인 엄마, 그리고 엄마의 딸과 조카.
위태로운 가족을 바라보며 문득 내가 떠올린 것은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나름대로 대체해버린 ‘새로운 가족’이었다. 사진 속 웃기만 하고 있는 아빠는 오늘의 날씨는 어떠한지, 공부는 잘되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등을 묻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했다. 잘 익은 김치가 자꾸만 익어 먹지 못하게 됐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찬에서는 더 이상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함께 먹는 밥이 그리워질 때쯤, 전화로 들려오는 집에 오겠냐는 엄마의 목소리가 더 이상 귀찮지 않았다. 나는 일상적으로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 목소리에 대뜸 고향집에 다니러 가겠다고 대답했다. 먹고 싶은 음식 몇 가지를 나열하는 것과 함께.
마치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꾸며 수년을 살아온 책 속 주인공이 그의 엄마와의 통화에서 닭죽을 먹으러 가겠다고 흔쾌히 선심 쓰 듯 대답한 것처럼.
한동안 떠나있었던 밥상과 다시 마주했을 때 음식들은 천천히 내 미각을 자극했다. 마치 꽥 소리 지르며 아빠를, 엄마를 자극했던 내 모습처럼.
최근의 엄마에겐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온 식구가 한데 모여 살면서부터 엄마에게 알 수 없는 활기가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책 속의 엄마도 동네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과가 있는 큰아들은 엄마의 집에 얹혀산 지 오래고,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독립해서 나간 둘째 아들은 마흔이 넘어 병약해진 모습으로 엄마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몇 번의 이혼을 거듭하면서 딸아이까지 데리고 엄마의 집으로 찾아든 딸까지. 그들은 평균나이 사십 구세에 ‘가족’이란 테두리를 또다시 구성했다. 서로의 부모가 다르다는 비밀을 품에 안은 채.
그날의 삼겹살을 시작으로 엄마는 거의 한 끼도 빠짐없이 고기를 상 위에 올렸다.
항상 엄마의 입에서는 ‘먹고 싶은 게 없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봐도 살이 포동하게 오른 자식들이지만 뭐든 더 먹이고 싶다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이야기 속 엄마 역시 자식들에게 풍족한 ‘음식’을 먹인다. 엄마의 밥상은 으르렁대고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자식들이 살을 마주대고 앉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조금씩 가슴 속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몇 달 동안 세끼 꼬박꼬박 고기반찬만 만들어 내는 엄마를 나는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엄마가 혹 미친것은 아닐지 농담조로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부모의 작은 관심조차도 가볍게 치부해버린 내 모습들이 스쳤다.
소설 [고령화가족]을 읽으며 나는 ‘밥’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나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밥벌이를 위해 일터에 나가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함께 밥을 먹기 위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구성원들은 공존한다. 때로는 웃는 모습으로 다정하게, 혹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가겠다.’는 주인공의 말을 기억한다.
헤밍웨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내뱉었다는 완벽한 문장이 결국은 하나인 것처럼, 보잘 것 없고 자칫 위태로워 보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게 허락한 삶의 일부인 그들을 ‘가족’이라 말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스무 살의 나는 ‘가족’을 사랑하지 못했다. 매끼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이 가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제 나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주어진 내 삶 속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지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