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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김정현 지음 / 문이당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내 어릴 적 소망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변하고, 시험도 치지 않고,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흐르는 눈물도 감춰야 하고 아픔 따위를 내색하는 일에 서툴게 되고 밥벌이의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 삶에 대한 책임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린 내게는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어른의 삶’은 놀랍고 신비한 것, 그것뿐이었던 것 같다. 다 큰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나는 어린아이인 채로 성장했다.
처음 책 <아버지의 눈물>과 마주했을 때 어린 내 눈에 비친 오래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허름한 작업복에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피곤한 몸을 이끌며 조업 준비를 하던 아빠의 충혈 된 두 눈.
매년 여름이면 아빠의 두 눈엔 핏기가 더했다. 늦은 오후 조업을 나가 새벽이면 돌아오셨기 때문에 잠든 모습을 보는 게 더 익숙했지만 피로에 지친 붉은 눈은 오래토록 내 기억 속에 잔재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빨리 어른이 되기를 꿈꿨던 어린 내게는, 삶에 지친 아빠보다 활기차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아빠가 더 필요했다. 책 속 상길과 상우형제처럼 나는 서서히 아빠와 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커가면서 몇 마디 주고받는 이야기가 어색해지고 함께 식사를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의 성장이 부모에게는 어떤 의미이고 시간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사회인이 되었고 가정을 꾸렸다.
부모가 되어보지 못하면 절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가.
가난 때문에 자식을 다른 곳에 맡기고, 사는 게 바빠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함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우리네 부모라는 걸 철없던 나는 알지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부모’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처연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아 머리에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흔들림의 연속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잘못된 하나의 선택에 우리의 삶은 쉽게 흔들린다.
책 속 아버지 흥기도 흔들린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값싼 양주에도 준하지 않는 우정이라는 이름과 성장해가는 자식들에게서 느껴지던 안도감과 두려움이 아버지를 흔들리게 했다. 무능한 아버지, 남편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아들이자 자랑스러웠던 동생인 그가 돌이키기 힘든 곳으로 내몰린다.
나는 두려웠다.
모두의 아버지와 같이 느껴지던 그의 마지막이 비겁해질까봐, 누구에게도 그동안 열심히 살았노라 떳떳하게 말할 수 없어질까 봐. 그가 다시는 웃을 수 없을까 봐서.
하지만 부모라는 이름의 그는 강했다. 뜨거운 눈물을 쏟은 뒤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떡볶이 장사를 하며 힘들지만 행복하게 사는 누나에게, 자신만 믿고 오늘까지 함께 손을 붙잡고 가정을 이어와 준 아내에게, 길을 잃고 헤매다 어렵게 답을 찾은 자식에게.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다시 무엇을 해 아내를 책임지고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할 것인가. 아내가 그처럼 집착하는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어쨌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 비루하게는 살지 말고,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틀은 되어 주고 싶은 마음. 아무리 힘들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지켜 줘야 했다. 그래야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책 속 아버지의 변화를 통해 대학 입학 후, 살아온 이야기를 진지하게 풀어놓으시던 아빠의 모습이 생각났다. 무뚝뚝한 아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한스러운 고백에 스무 살의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기억은 별처럼 내 어딘가에 촘촘히 박혔다.
나는 이제 안다. 어른도 울고 싶을 때는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때로는 그들도 아버지에게 위로받고 싶은 늙은 자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