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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편견’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악의 추억>과 처음 조우했을 때는 나도 모르는 편견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정명 작가의 소설과는 다른 낯선 느낌.
조금의 어색한 기운마저 감도는 <악의 추억>은 편견을 넘어 나를 압도했다.
책 속 이야기에 매료될수록 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범죄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괴로웠고 허탈했고 아팠다.
안개는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위험할 뿐이다.
책의 시작은 주위를 사위는 안개 때문에 등대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적막한 바다와 같다.
케이블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금발의 여인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죽은 여자가 웃고 있어요.”
웃으면서 죽었나 싶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버린 입가에 스민 행복한 웃음을 익숙한 솜씨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범인을 좇는 사람들.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로 죽음을 맞이한 여자와 연쇄살인처럼 이어지는 살인의 도미노들.
흔적 없는 죽음의 순간들은 책을 읽는 내게 ‘범죄’에 대한 실체를 찾고자 재촉한다. 누가, 왜 그녀를 죽인 것인지.
범죄의 중심에는 거대한 도시 뉴아일랜드가 있다. 화려한 도시의 내면을 뒤로하고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확실히 띄고 있는 중심에 크리스 매코이가 자리한다.
그는 살인마 데니스 코헨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고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 깊은 잠에 빠져들 수도,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마의 죽음 또한 인정하지 못한 채 작은 고양이 한 마리와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문득 그의 삶을 바라보면서 범죄의 상흔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선의 편에서 악을 좇던 그에게 가족을 잃은 고통은 어떤 것에 비유될 수 있었을까?
실체 없는 안개 속에서 함께 사라져버린 가족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는지.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함께 있을 때 해주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 앞에서 더욱 가슴 아파해야 했던 고통의 순간들이. 남아 있는 것이 죄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차례로 피살된 금발의 여자들은 매코이의 가족을 살해했던 범죄자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그들은 범죄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고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희생자들의 삶은 곧 죽음과 같았다.
매코이는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웃음 가스를 주사해 죽는 순간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했고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럽던 그들에게 죽음으로 삶을 동정했을지도.
살인자의 총에 의해 선과 악, 두 이름의 삶을 살았던 매코이의 생이 안타까웠다. 피해자였던 사람이 결국은 잔인한 상흔을 남기는 살인자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책은 끝을 맺는다.
실체 없는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범죄를 찾아 끝없이 선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는 결국 범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매코이의 삶은 항상 갈래의 길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내 삶의 모습과도 어느 부분 닮아있는 것 같다. 옳고 그른 것이 정해지지 않은 삶의 순간들을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끝까지 선의 편에 서고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매코이의 삶이 내게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삶이 주는 진정성, 삶을 살아가야 할 자세…….
책을 읽는 내내 낯설고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범죄에 의해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또 다른 이름의 범죄로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읽는 내내 범죄 앞에서 사라져간 희생자들보다도 그들의 삶을 짓밟아버린 범죄자의 흔적을 자꾸만 따라가던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두려웠다. 순간순간 내가 방관자가 되어 버린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책을 덮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처해 온 내 삶이 안일하게 느껴지기도.
<악의 추억>을 통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의 다양한 이면들과 조우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