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 - 의학의 새로운 도약을 불러온 질병 관점의 대전환과 인류의 미래 묻고 답하다 7
전주홍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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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병을 고치기 위해 사제가 기도를 올리거나 구마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핀셋으로 거머리를 하나씩 붙이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의학적 상식이었다.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자들의 물음은 단 하나였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아르케, archē)?"라는 질문이었다.


자연철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만물의 근원이 신이라고 여겨졌던 시절, 인간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신의 노여움을 달래며 제의와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연철학자들은 신화적 설명에서 벗어나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적 원리와 질서를 찾으려 했다.


자연철학이 신화적 설명을 넘어 합리적 원리를 추구했듯, 의학 또한 질병을 단순히 신의 벌로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원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전주홍 교수는 『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에서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의학의 역사를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관점은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고 지배합니다. 질병이 신의 벌이라는 관점에서 치료는 오만과 불경을 뉘우치고 신에게 기도와 제사로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실제로 병을 신의 징벌로 보는지, 체액의 불균형이나 장기의 손상으로 보는지, 혹은 분자의 이상이나 유전정보의 오류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치료 방식과 의학의 방향은 전혀 달라졌다. 신화적·주술적 관점은 자연철학자들의 등장과 함께 '체액병리학'으로 옮겨갔다. 네 체액의 균형이 깨질 때 병이 생긴다고 본 '4체액설'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권위에 힘입어 중세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체액의 균형을 맞추려 행해진 사혈 치료 때문에 신부전증을 앓던 모차르트는 과도한 피를 뽑은 끝에 세상을 떠났고, 조지 워싱턴 또한 같은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치료법이었다.


그러나 의학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해부학은 병의 원인을 체액이 아닌 장기에서 찾도록 하며 근대 의학의 길을 열었고, 현미경의 발명은 세포와 분자의 미시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했다. 분자의학은 질병을 분자 단위에서 진단·치료할 길을 열었고, 오늘날 정밀의학은 유전 정보와 생활 환경을 반영해 개인 맞춤 치료로 나아가고 있다.


전주홍 교수가 강조하듯, 의학의 역사는 몇 가지 위대한 발견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 이끈 긴 여정이다. 신의 벌에서 체액, 장기, 분자, 정보로 이어지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우리가 질병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묻게 한다.


헤겔이 "철학은 시대의 딸"이라 말했듯, 의학 또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발전해 온 지식이다.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상식들 역시 끊임없이 수정되고 새롭게 발전해 왔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믿는 상식이 결코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일깨우며, 더 나은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덧 :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의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며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해 온 방식을 쉽게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추천사에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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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우는가 - 싸울 수밖에 없다는 착각 그리고 해법
크리스토퍼 블랫먼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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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평화로운 시기는 얼마나 될까.

흔히 인류사를 전쟁과 폭력의 연속으로 기억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폭력적인가. 프로이트는 이것이 ‘죽음 파괴 충동’이라는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르네 지라르는 사회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폭력을 특정 집단에 전가한다고 설명한다. 홉스 역시 자연상태의 인간을 불신과 공포 속에 놓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만으로는 인류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로는 긴 역사 대부분이 소규모 협력과 교환에 기반한 평화의 시기였고, 전쟁은 예외적으로 특정 조건에서만 폭발했다. 블랫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쟁을 인간 본성이 아니라 협상 실패의 결과로 설명하며, 평화가 전략적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블랫먼은 원인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권력을 견제받지 않는 지도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견제되지 않은 이익. 둘째, 명예나 이데올로기 같은 가치 때문에 타협을 거부하는 무형의 동기. 셋째, 힘과 의도를 알 수 없어 오판을 낳는 불확실성. 넷째, 약속이 지켜질지 확신할 수 없어 선제 공격을 유혹하는 이행 문제. 다섯째, 상대를 악마화하고 내 집단을 과대평가하는 잘못된 인식이다.


이 다섯 가지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드러난다. 지금 가자지구의 봉쇄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수많은 목숨이 굶어 죽고 있다. 국제사회와 유엔조차 개입하지 못한 채 참극은 계속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양이었던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오늘날 또 다른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준다.


가자지구의 상황을 블랫먼의 틀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원인이 특히 두드러진다.

첫째, 정치적 위기에 놓인 네타냐후 정부가 외부 적대를 강화하며 불만을 전가하는 견제되지 않은 이익. 둘째, 유대인 사회에 뿌리 깊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역사적 원한이라는 무형의 동기. 셋째, 팔레스타인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악마화하는 잘못된 인식이다. 민간인의 고통과 기근은 지워지고 봉쇄가 정당화된다. 이렇게 가자의 현실은 블랫먼이 제시한 몇 가지 원인만으로도 설명된다. 전쟁은 모든 조건에서가 아니라 특정 조건이 선택적으로 작동할 때 현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평화로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블랫먼은 전쟁의 원인을 줄이고 협상의 폭을 넓히는 조건을 제시한다. 경제적·사회적 교류로 상호의존을 강화하면 공격은 어려워진다. 권력을 분산시켜 지도자의 독주를 막으면 전쟁의 유인은 줄어든다. 합의의 이행을 보장할 제도를 마련하고, 해결이 불가능한 갈등에는 국제기구와 제3자가 개입해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골은 깊다. 그러나 두 집단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국제사회가 개입해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막아야 한다. 이스라엘 또한 과거 자신들이 겪은 폭력의 기억을 되돌아봐야 한다. 독일군의 폭력 앞에서 그들이 사람이었듯, 가자지구 주민들 또한 똑같이 선량한 사람들이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우리에게 “살해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건넨다고 말했다. 굶주린 아이들의 얼굴은 지금 당장 응답하라고 절규하고 있다. End the siege, End the geno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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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왈츠는 우리 없이도 계속되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손수연 옮김 / 저녁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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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와 뱅상의 이야기는 정신과 진료 대기실에서의 어색한 마주침으로 시작된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지극히 사적인 순간에 엘사는 그저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신의 차례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뱅상이 먼저 말을 건네면서, 원치 않았던 침묵이 깨진다.


장례지도사인 엘사는 아버지를 잃은 뒤 무너진 일상 속에서 우울과 죄책감에 갇혀 있다. 반면 소설가 뱅상은 이혼과 오래된 상처, 그리고 무기력한 우울에 매여 있다. 두 사람은 매주 수요일, 진료 대기실에서 스치듯 마주친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색했던 관계가 반복된 우연과 짧은 대화를 거치며 서서히 온기를 띠기 시작한다.


소설은 두 인물이 겪는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러나 작가는 죽음과 이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담하면서도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고 풀어낸다.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가 사라져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죽음은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죽음뿐이다. 결국 부재를 통해서만 죽음을 실감하게 된다. 사라진 존재를 향한 상실과 고통은 철저히 개인적 체험이기에, 애도는 누구에게나 고독의 시간을 동반한다. 그것은 일반화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침묵과 단절을 낳는다.


엘사와 뱅상의 슬픔 또한 커다란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허로 남는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와 『밝은 방』에서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상실감을 기록했다. 수많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찍힌 ‘겨울 정원 속의 어머니’ 사진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지만, 그 순간의 감정과 상실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어머니를 향한 시선과 감정은 결코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가까운 이를 잃어본 경험이 없기에 엘사와 뱅상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마흔을 갓 넘기신 놀이학교 원장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죽음은 노년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달리, 그것이 언제든 예고 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중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느낀 것처럼, 나 역시 핸드폰 속 사진을 우연히 넘기다가 아이와 함께 웃고 있는 선생님의 환한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 사진은 그녀가 분명히 거기에 있었던 증거였고, 동시에 이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부재의 증명이기도 했다.


삶은 왈츠처럼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살아간다.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만남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뜻밖의 웃음과 온기를 경험한다. 상실이 남긴 공허가 완전히 메워지지는 않지만, 그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법을 두 주인공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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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 -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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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는 삶이란 무엇일까?”는 질문으로 책은 시작한다.


우리는 어딘가에 거주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흔히 거주를 평온히 머무는 것, 자신과 친숙한 곳에 안주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전체를 뜻한다.


아감벤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거주 불가능한 시대”라고 말한다. 얼핏 우리는 각자 어딘가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근대성의 시스템, 곧 ‘인류학적 기계’는 인간을 인간/비인간, 정상/광기, 주체/객체로 구분하며 세계를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에 뿌리내려 사는 대신, 점령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길들여졌다.


그렇다면 거주하는 삶과 횔덜린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횔덜린의 삶은 거주하는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광기 속에서 보냈지만, 아감벤은 그 시기를 단순한 병리로 보지 않는다. 횔덜린은 능동적으로 성취한 영웅도, 시대의 폭력에 짓눌린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는 습관과 성향, 주어진 삶 속에서 살아갔다.


아감벤은 중간태적 삶을 곧 거주하는 삶으로 해석한다. 능동과 수동 사이에서 주체가 동시에 행위자이자 대상이 되는 상태, 바로 ‘기뻐하다’, ‘부끄러워하다’, ‘미치다’와 같은 동사가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횔덜린은 이 중간태 속에서 언어와 관계 맺으며 파편적인 시를 남겼다.


하이데거는 그의 시구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읽어냈다. 여기서 ‘시적’이란 세계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이다. 광기의 시인으로 불렸지만 횔덜린은 옥탑방에 머물며 계절의 순환과 강물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겼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점령했고, 괴테는 문학의 정상에 올랐으며, 헤겔은 절대정신의 철학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횔덜린은 옥탑방에서 조용히 시를 이어갔다. 그는 성취 대신 응답의 방식을 택한 삶을 보여주었다.


횔덜린의 예는 극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소유하고 정복하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운다. 존재와 세계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곧 거주하는 삶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곁을 스쳐가는 존재들에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거주의 방식일지 모른다.


“횔덜린이 남긴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든, 그것이 우리가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삶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을 근본에서 흔든다. 실패는 더 이상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낙인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본질적 조건이다. 인간은 성공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삶이라는 예술 안에서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 속에서 우리는 세계와 관계 맺고, 존재에 응답하며, 시적으로 거주한다.


횔덜린의 삶은 이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길이었다. 그는 비정상이라 불리며 파편적이지만 세계에 응답하며 거주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정상이라 불리는 우리는, 파편적으로 부유하며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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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 하나, 내 멋대로 산다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서교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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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게 나이 드는 법', '우아한 노년의 기술'과 같은 책들이 말하는 노년의 주제에는 묘한 사회적 편견이 숨어 있다. 마치 나이가 들면 저절로 점잖아지고, 소박해지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런 세상의 통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일흔여덟의 나이에도 가발을 쓰고 네일아트를 하며, 죽는 날까지 '할머니답게' 살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녀의 모습은 남편에게 늘 자랑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결 젊어 보이고, 생활력도 강하며, 멋을 아는 아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그녀의 세계는 산산이 무너진다. 오랜 세월 감추어온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소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동창회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패션 잡지의 스트리트 패션 모델로 발탁되어 사진을 찍히며 스스로의 매력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동창회에 도착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초라한 옷차림과 나이 든 외모를 속으로 비웃는다.


처음에는 외모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그녀의 모습이 다소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는 통념이 나에게도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고, 동시에 주인공 하나처럼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다면, 화장이나 옷차림 따위는 중요 순위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끊임없이 원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거나 때로는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하나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허영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가꾸며 존엄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을. 집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지낼지언정, 세상 앞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외모 치장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나답게 살고 싶다' 또는 '아름답게 살겠다'는 고집이자 저항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지금 팔순을 넘긴 아버지다. 그는 칠십대 중반까지도 일을 놓지 않았다. 기술 노동자로서 수십 년 동안 스웨터 공장의 공장장으로 근무했는데, 공장에 출근하는 날에도 언제나 와이셔츠에 정장바지를 차려입고 집을 나서셨다. 젊은 디자이너들과도 소통해야 했던 탓인지 얼굴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셔서, 검버섯이나 점이 생기면 곧장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곤 하셨다. 그래서인지 연세에 비해 훨씬 젊고 늘 단정해 보이신다.


오시 하나와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알게 되었다. 나이 듦은 내면의 성숙만이 아니라, 외면을 가꾸는 작은 습관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품격 있는 노년'이 아니라, 내가 존중할 수 있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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