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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ㅣ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책 표지가 예쁘다. 약간의 불투명함이 더해진 트레이싱지로 감싼 디자인은 단순한 일러스트 위에 한 겹의 막을 드리워, 은은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앤솔러지가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은 모음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걷다』는 ‘걷기’라는 동사를 주제로 다섯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는 부모를 잃고 고모 집에서 자란 ‘나’가 사촌 민아와의 어긋난 관계와 병든 고모에 대한 의무를 마주하는 이야기다.
성해나의 「후보(後步)」는 철물점을 운영하는 안드레아가 뒤로 걷기를 통해 재즈 클럽 ‘상수시’와 세실과의 세월을 되새기며 삶의 걸음을 다시 정리한다. 이주혜의 「유월이니까」는 이별 후 운동장을 걷던 주인공이 달리는 여자와 낯선 남자를 만나며, 불안과 삶의 기로에 선 자신을 성찰한다.
임선우의 「유령 개 산책하기」는 죽은 반려견 ‘하지’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고, 그와 다시 산책을 하며 타인과 연결되는 과정을 그린다. 임현의 「느리게 흩어지기」는 글쓰기 강좌에 나선 명길이 산책 속에서 고독과 타인과의 거리를 성찰하며 산책 같은 삶을 꿈꾸는 이야기다.
강변이나 공원에 가면 앞으로 걷고, 때로는 뒤로 걷고, 혹은 맨발로 걷는 이들을 마주친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어 서로를 볼 수는 있지만, 책 표지를 감싼 트레이싱지처럼 그들을 선명히 볼 수도, 완전히 알 수도 없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저마다 다른 결로 빛났지만, 성해나의 「후보(後步)」가 특별히 세련되게 다가온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작가는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을 ‘퇴락’이나 ‘퇴보’의 이미지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후보(後步)’, 곧 뒤로 내딛는 또 다른 걸음으로 새롭게 이름 짓는다. 뒤돌아보며 삶을 정리하고, 과거의 시간을 품은 채 여전히 걸음을 이어 가는 모습 속에서 쇠락은 낡은 그림자가 아니라, 재즈처럼 변주의 가능성으로 바뀐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은 작품은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였다. 성해나의 이야기처럼 세련된 변주나 장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담백하게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관계와 심리를, 투명한 한 겹 막도 없이 드러낸다.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타자를 내가 끝내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안다’고 믿으며, 때로는 그의 심리까지 조정해 자기 뜻대로 하려 한다. 이때 타자는 이해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관계라 여겨지지만, 그 안에서도 서로의 마음과 삶은 끝내 다 알 수 없는 타자의 영역에 남는다. 작품 속 고모, 고모부, 민아와 ‘나’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모든 것이 쉽게 덮일 것 같지만, 실상은 끝내 메워지지 않는 간극과 오해, 책임과 의무가 겹겹이 쌓여 상처로 남는다. 「없는 셈 치고」는 그 모순과 무게를 담담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걷다』의 다섯 걸음은 그렇게 우리 각자의 삶에 남아 있는 불완전한 걸음들을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