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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의 하루 ㅣ 알맹이 그림책 80
아르노 네바슈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25년 9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 가스파르는 눈을 떠요. 가스파르는 청소부랍니다. 쓰레기통이 꽉 차, 길거리에 흘러넘치지 않게 하려면 아주 일찍 일어나야 하지요. 집을 나설 채비를 하는 가스파르는 고요한 이른 새벽 시간을 아주 좋아해요.”
첫 장과 마지막 장에서 가스파르는 같은 새벽을 맞이한다. 집을 나서기 전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어둑한 거리에 갓 구운 빵 조각을 들고 걸어 나서는 순간. 반복되는 하루의 시작이지만, 그는 이 시간이 즐겁고 기쁘다.
그의 기쁨과 만족을 보며 그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자연스럽게 고대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행복을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적 태도와 덕 있는 삶에서 찾았다. 여기서 말하는 덕(아레테, aretē)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이성에 따라 조화롭게 발휘하는 삶의 탁월함이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아파테이아(apatheia, 평정심)였고, 덕과 평정심이 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가스파르의 태도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내적 평정과 닮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프롬이 말한 자유의 불안을 넘어 타인과 연대하는 삶의 한 모습처럼 다가왔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주는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종종 권위나 이념, 소비에 기대곤 한다. 그러나 프롬은 자유에 따르는 불안을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며 타인과 연대를 나누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말했다.
쓰레기 트럭을 타고 동네를 구석구석 돌며 하루에도 수천 번 허리를 굽히는 그의 노동은 고단하고 반복적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작은 만남과 기쁨이 차곡차곡 쌓인다. 매일 같은 길 위에서 마주치는 고양이, 우체부, 달리기하는 청년, 노란 우비를 입고 킥보드를 타는 꼬마. 이 평범한 풍경들은 노동을 단순히 힘겨운 일로만 남기지 않는다. 특히 망가진 킥보드를 고쳐 아이가 다시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은, 그의 노동과 수고가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그의 만족감과 자유가 문득 부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하루의 반복 속에서, 노동의 끝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살고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더 많은 것, 더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끝내 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다 삶을 소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가스파르의 하루』는 아르노 네바슈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와 질감 있는 화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해낸 작품이다. 판화풍의 거친 질감은 수작업 그림이 지닌 온기를 전하며, 보는 이에게 따스한 여운을 남긴다. 가스파르의 이야기는 고된 노동과 소박한 순간 속에서도 행복이 깃들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따뜻한 그림책이다.
덧 : 오랜만에 보는 그림책, 가볍게 책장을 펼쳤다가 마음 깊이 따스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