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가로막은 건 언제나 나였다
게리 홀츠 지음, 강도은 옮김 / 스몰빅라이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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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물리학을 전공한 뒤 우주항공 산업에서 사업적으로도 잘나가던 저자는, 어느 날 다발성 경화증 진단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발가락의 마비로 시작된 증상은 하반신 전체로 퍼져나갔다. 절망 속에서 방황하던 그는 우연히 호주 원주민의 치유법에 대해 듣게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의 세계로 향한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이룬 듯했지만, 그의 삶은 균열투성이였다. 첫 결혼은 실패로 끝났고, 자녀들과의 관계도 소원했다. 두 번째 결혼 역시 위태로웠다. 사업적으로는 성공한 물리학자였지만, 그의 내면은 오랫동안 방치된 채였다.


책 중반에 이르렀을 때, 지극히 개인적인 치유의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풀리지 않은 신비가 많으니, 그런식의 체험으로 읽어야 할지말이다.


치유의 과정에서 그는 오랫동안 외면해온 내면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알코올 중독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로 인해 쌓인 분노와 수치심, 미움.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게 된 삶의 방식. 사랑을 밀어내고, 관계를 망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동들이 바로 그 결과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진짜 치유가 시작된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과 의식, 자아의 형성과정에서 신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마음이 단지 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게리 홀츠의 체험은 과학을 넘는 기적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이 연결된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읽힌다.


호주 원주민들의 치유법과 통찰은 인간의 몸을 고립된 객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깊이 연결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 영혼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며, 그 몸은 타인, 자연, 신, 우주의 질서뿐 아니라, 존재의 뿌리로서 조상들과도 이어져 있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병이란 단순한 신체의 고장이 아니다. 삶 전체의 불균형, 관계의 단절, 존재의 흔들림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회복이란 존재 전체의 조화를 되찾는 일이다. 이는 다마지오가 말한 ‘몸에 뿌리내린 마음’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으며, 서구 의학이 놓치고 있던 몸과 마음, 그리고 관계까지 아우르는 치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의학은 흔히 이런 복잡한 고통을 ‘스트레스’라는 말로 단순화한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의 상처, 관계에서 비롯된 외로움,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미움과 수치심, 죄책감은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고, 몸의 언어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처럼 쌓인 감정들은 결국 신경계와 면역계를 흔들고, 마침내 병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고통은 삶의 균열로 드러난다.


그래서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넘기던 책장이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게리가 삽입된 도뇨관을 스스로 빼내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마치 내 일이기라도 한 듯 기쁜 마음에 눈물이 났다.


이 책은 한 남자의 치유 여정을 따라가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통찰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결코 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때로는 어긋나고, 때로는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넘어지고 아프기도 하지만, 결국 그 관계들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어쩌면 회복이란,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감각을 새롭게 구성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 속에서 삐걱대던 내 파트를 다시 찾아 연주를 시작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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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건너는 교실
이요하라 신 지음, 이선희 옮김 / 팩토리나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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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My battery is low and it’s getting dark.”

이는 화성 탐사 로버 오퍼튜니티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책을 읽다가, 그 로봇이 남긴 바퀴 자국 사진을 찾아보다가 나는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하늘을 건너는 교실』은 ‘있을 곳’을 찾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금 배우고 성장하며, 삶의 궤도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도쿄 히가시신주쿠고등학교 야간반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모여든다. ‘불량품’이라 자책하는 스물한 살의 노란머리 다케토, 일본어조차 익숙지 않은 마흔 살 혼열 안젤라,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온 일흔네 살의 나가미네, 그리고 마음을 닫아버린 열여섯 살의 가스미까지. 이들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상처를 안고 다시 배움을 선택한다.


붉은 별, 화성의 황량한 대지를 묵묵히 걸어간 오퍼튜니티의 모습은, 세상에 내던져진 채 고군분투하는 야간 고등학생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자율신경장애로 인해 호흡조차 쉽지 않았던 가스미는,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고통을 삼켜왔다. 그녀의 손목에 남은 수많은 흉터는 죽기 위한 흔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과학 선생님 후지타케와 함께 본 오퍼튜니티의 바퀴 자국 사진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외로움과 상처의 흔적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사진을 떠올렸을 때,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고독의 표식이 아님을 깨닫는다. 거센 모래폭풍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작은 로봇의 궤적. 그것은 포기하지 않은 의지였고,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다시 걸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용한 믿음이 그녀 안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들은 후지타케 선생과 함께 과학부를 만들어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성 크레이터를 재현한다’는 무모해 보이는 실험은 단순한 과학적 도전을 넘어,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궤도를 다시 그려가는 여정이 된다.


“알고 있었나요? 화성의 저녁놀은 파란색이에요.”

파란색 책표지에 형광 핑크 띠지. 발랄한 성장소설쯤으로 가볍게 펼쳤던 책장에서 나는 세 번이나 울었다. 문득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야간반이 떠올랐다. 소위 ‘날라리’라 불리던 그들은 거칠고 화려한 겉모습으로 쉽게 분류되고 치워지곤 했다.


나는 이해받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타인을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하고 밀어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밤하늘의 별처럼, 저마다 다른 빛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각자 고유한 서사와 고통을 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때때로 어두운 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만큼이나 소중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그리고 함께 걸어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발랄한 책표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서로의 빛을 받아 함께 어둠을 건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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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양정무의 명작 읽기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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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는 유쾌하고 좋은 것은 가까이 두고 싶어하고, 불쾌하거나 불편한 것은 멀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그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예쁨에 반응하게 된다.


그림에 관심은 있지만 미술사나 이론에는 익숙하지 않은 나 역시 그렇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구성이 마음에 들면, 이유를 따지기보다 먼저좋다는 감정이 앞선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미술이 아닌가? 저자는 이 질문을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름다움만이 미술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술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통념을 뒤흔들며, 미술의 또 다른 얼굴을 꺼내 보인다. 때로는 낯설고 불편하며,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깊숙이 건드리는명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 표지에도 등장하는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 주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는 실재한 조난 사건을 바탕으로, 뗏목 위에 펼쳐진 절망과 고통의 장면을 날것 그대로 화폭에 담아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인육을 먹었던 사람들, 광기와 의심, 죽음의 공포를 드러낸 인간 군상은 날 것 그대로이기에 불편하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장면을 구성했으며, 해부학적 정확성을 위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시신의 부패 과정을 직접 관찰하기까지 했다. 그의 몰입과 집요한 재현은 이 작품을 통해 정치적 비판과 함께 인간 존재의 밑바닥을 응시하게 만드는 명작으로 만들어냈다.


이와 비슷한 결로 고야나 뭉크의 그림이 떠올랐다. 고통을 피하지도, 미화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두 화가는 인간 내면의 깊은 불안과 비극을 그려낸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민중들의 공포와 절망을, 뭉크의 《절규》는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실존적 불안을 그려낸다. 이들의 작품은 감상자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해온 감정에 대한 예술의 정직한 응답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명작의 '불완전함'을 오히려 찬미한다는 데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예로 들며, 완벽한 구도나 비례보다 표면의 얼룩, 드로잉의 흔들림, 어색한 손동작 같은 흔적에서 또 다른 감동을 발견한다. 완벽함보다 그 안에 깃든 고뇌와 망설임, 인간적인 손길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술적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와 번민까지 담긴 진정성이다. 그러고 보니,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건물 7층 높이에서 그림을 지우고 또 그렸을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이 책은 명작을 ‘시간과 논쟁을 견디고 살아남은 존재’로 정의한다. 석굴암, 시스티나 성당, 메두사호의 뗏목처럼 논란과 파장을 겪은 작품들이 결국엔 새로운 의미를 덧입으며 살아남는 과정을 통해, 예술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우리를 처음 매료시키는 것은 이미지일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존재의 진실이나 시간의 흔적이 담길 때 비로소 작품은 살아 있는 예술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덧. 책이 작고 아담해서 아깝고 조금 아쉬웠지만, 아름다운 도판 이미지가 알차게 담겨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미술사의 통사를 쓰는 것이 목표라는 양정무 교수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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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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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전원주택에 거주한 지 4년째다.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살겠다는 로망, 그리고 관계에서 한 발짝 물러서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시골로 데려왔다.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왔기에, 도시 밖의 삶은 그야말로 낯설고 막연한 영역이었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풀냄새와 잣나무 향기를 맡으며 하루를 연다. 밤이 되면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렇게만 보면 참 낭만적인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시골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도보로 갈 수 있는 상점이 없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오가고, 병원도 몇 개 진료 과목을 가진 소규모뿐이다. 치과 치료를 받으려면 도시로 나가야 하고, 배달앱으로 간편하게 시켜 먹던 음식과도 작별했다. 말하자면,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매일같이 불편함을 견디는 연습이기도 하다.


마이클 이스터는 건강 전문 저널리스트다. 그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개인적 위기를 계기로, 인간 본연의 생명력과 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북극 알래스카에서 33일간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록 사냥을 하며, 혹독한 추위와 고독, 배고픔, 불편함을 몸으로 겪는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말한다. 우리가 피하려 드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오히려 건강과 회복, 생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서 겪고 있는 불편함도, 퇴행이 아니라 감각을 되찾는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이스터는 말한다. 편안함은 도둑처럼 삶에 스며들어 기준을 바꿔 놓았고, 불편함은 피해야 할 감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삶의 밀도와 생기, 회복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고.


치과 진료 하나에 반나절을 쓰고, 빵 하나 사러 읍내까지 차를 타고 가는 일상이 처음엔 꽤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불편함이 나를 더 주의 깊고, 더 능동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걸 느낀다. 스스로 움직이고, 감각하며, 때로는 묵묵히 견디는 사이, 나는 편안함 속에서 잊고 지냈던 삶의 무게와 리듬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었다.


그가 알래스카에서 마주한 날것의 자연을 그대로 경험하긴 어렵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어, 마당의 잡초를 뽑고, 눈이 오면 내 손으로 치우고, 정원의 식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하루를 살아간다. 관리실도 없고, 대신해줄 이도 없다. 모든 일이 조금 더 느리고 수고스럽다. 그렇기에 더 가깝고, 더 실감 난다.


『편안함의 습격』은 단순히 “불편을 견뎌라”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편안함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되묻는 책이다. 편리함과 맞바꾼 것들이, 실은 우리를 점점 더 피로하고 둔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경험과 과학적 연구로 풀어낸다.


나 역시 지금은 조금 불편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 예전처럼 피하고 싶은 감정만은 아니다.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무언가가, 그 안에 분명히 있다.


더 명확하게 나 자신을 느끼고, 더 깊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연과 함께 움직이고, 감각하고, 감내하는 이 일상의 조각들이야말로, 이스터가 말한 ‘회복된 인간성’의 작은 실마리인지도 모르겠다.


편안함에 익숙해져 무뎌진 이들에게, 이 책은 다시금 깨어 있는 삶으로 걸어가 보자고 말한다. 알래스카의 설원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조금만 불편한 쪽으로 몸을 기울여보는 것. 그 작은 시도가, 더 건강하고 생기 있는 삶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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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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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왜 하필 파리일까? 프랑스 대혁명, 1848년 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를 통해 파리는 반란과 혁명의 도시로 상징되어 왔다. 1920년대의 파리는 식민지 출신 노동자, 망명자, 예술가, 자본가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도시였으며,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제국주의의 모순이 응축된, 그야말로 세계의 축소판 같은 곳이었다.


소설은 실직한 노동자 피에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어느 날 호텔 앞에서 애인 자네트가 부유하고 뚱뚱한 남자와 함께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다. 깊은 배신감과 증오에 휩싸인 피에르는 결국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한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소외된 이들과 기득권층의 갈등 속에서 전염병은 체제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화선이 된다.


100년 전 동유럽에서 쓰인, ‘새빨간 책’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붙은 이 소설은 웬만한 디스토피아보다 더 어둡고 무겁게 읽혔다. 피에르와 판창퀘이 등이 겪는 현실의 묘사는 허구라기엔 너무 생생해서, 읽는 내내 쓴 커피 찌꺼기를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맛이 없고 불편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쾌한 뒷맛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해온 세계의 밑바닥, 혹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세상은 겉으론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또다시 이스라엘과 이란은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과 맞바꾼 빵과 과자를 아무렇지 않게 씹고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파리에서는 분리주의 분위기 속에 다양한 정치·종교 세력이 부상한다. 중국인 공산주의자, 유대인 랍비, 백계 러시아인 등 각기 다른 인물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재편하고 권력을 꿈꾼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체제의 전복을 통한 새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였다. 그것이 공산주의로 점철되었지만, 실상은 누구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혼돈과 충돌, 그리고 각자의 이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투쟁의 장이었다.


우리는 지금 괜찮은 사회에 살고 있을까? 이대로 좋은가? 라는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없다. 이미 지난 계엄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득권들의 지저분한 민낯을 보았고, 우리는 분노했다. 야시엔스키의 소설처럼 불을 질러 전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견디고 있는 불평등과 모순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허구의 재난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질문하게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변화는 활활 타는 불처럼 뜨겁게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커피 찌꺼기를 씹는 듯한 불쾌함 속에서도 우리는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며, 함께 어깨를 맞대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거대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일 테다.
마무리 문장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보니, 헤겔을 읽고 하이데거와 니체의 글과 씨름해 온 내가 아직도 온건하고,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인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카치가 인용한별이 총총 빛나는세계의 상상력과 공부로부터, 나는 아직도 멀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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