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왜 하필 파리일까? 프랑스 대혁명, 1848년 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를 통해 파리는 반란과 혁명의 도시로 상징되어 왔다. 1920년대의 파리는 식민지 출신 노동자, 망명자, 예술가, 자본가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도시였으며,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제국주의의 모순이 응축된, 그야말로 세계의 축소판 같은 곳이었다.
소설은 실직한 노동자 피에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어느 날 호텔 앞에서 애인 자네트가 부유하고 뚱뚱한 남자와 함께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다. 깊은 배신감과 증오에 휩싸인 피에르는 결국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한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소외된 이들과 기득권층의 갈등 속에서 전염병은 체제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화선이 된다.
100년 전 동유럽에서 쓰인, ‘새빨간 책’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붙은 이 소설은 웬만한 디스토피아보다 더 어둡고 무겁게 읽혔다. 피에르와 판창퀘이 등이 겪는 현실의 묘사는 허구라기엔 너무 생생해서, 읽는 내내 쓴 커피 찌꺼기를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맛이 없고 불편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쾌한 뒷맛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해온 세계의 밑바닥, 혹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세상은 겉으론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또다시 이스라엘과 이란은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과 맞바꾼 빵과 과자를 아무렇지 않게 씹고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파리에서는 분리주의 분위기 속에 다양한 정치·종교 세력이 부상한다. 중국인 공산주의자, 유대인 랍비, 백계 러시아인 등 각기 다른 인물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재편하고 권력을 꿈꾼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체제의 전복을 통한 새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였다. 그것이 공산주의로 점철되었지만, 실상은 누구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혼돈과 충돌, 그리고 각자의 이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투쟁의 장이었다.
우리는 지금 괜찮은 사회에 살고 있을까? 이대로 좋은가? 라는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없다. 이미 지난 계엄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득권들의 지저분한 민낯을 보았고, 우리는 분노했다. 야시엔스키의 소설처럼 불을 질러 전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견디고 있는 불평등과 모순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허구의 재난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질문하게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변화는 활활 타는 불처럼 뜨겁게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커피 찌꺼기를 씹는 듯한 불쾌함 속에서도 우리는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며, 함께 어깨를 맞대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거대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일 테다.
마무리 문장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보니, 헤겔을 읽고 하이데거와 니체의 글과 씨름해 온
내가 아직도 온건하고,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인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카치가 인용한 ‘별이 총총 빛나는’ 세계의
상상력과 공부로부터, 나는 아직도 멀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