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향수 - 걸작의 캔버스에 아로새긴 향기들
노인호 지음 / 아멜리에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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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만날 때 가장 먼저 깨어나는 감각은 시각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본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하늘빛으로 날씨를 가늠하며, 간판과 표지판을 읽어 길을 찾는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시각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쏟아지는 시각적 자극들이 끊임없이 우리 주의를 끌어당기며 유혹하기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관에 들어서거나 책으로 그림을 볼 때는 전혀 다른 시각 경험이 펼쳐진다. 자극적인 일상의 이미지들과 달리, 명화 앞에서는 시선이 머물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시각이 아니라, 그림은 우리를 깊은 사유의 시간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감각하고 사유한다.


저자는 미국 유학 시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을 감상하다 푸른 연못에서 퍼져오는 듯한 초록 내음을 느꼈다. 색채가 향기로 변한 그 순간 이후, 그는 미술이 시각을 넘어 감각 전체를 깨우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체험은 ‘향기’로 명화를 읽는 그의 독창적 감상법의 시작점이 되었고, 이후 그림과 향기를 결합한 해설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명화와 향수』는 18인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어울리는 향기를 매칭한 감각적 예술서다. 조향사인 저자는 모네, 반 고흐, 클림트 같은 서양 거장들부터 겸재 정선, 조희룡 등 한국 전통 화가들까지 아우르며, 각 작품의 정서를 향기라는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해낸다.


향기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감각이라 독자가 느끼는 경험은 저자와 다를 수 있다. 책 속 작품을 보며 내가 상상한 향도 곳곳에서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가 오히려 흥미롭다. 시각으로만 받아들이던 작품에서 이미지가 향기의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이 다시 다른 감각과 연결되며 작품이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와 앙리 루소의 〈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사교계의 인플루언서였던 마담 고트로의 초상화는 검정 벨벳 드레스와 하얀 피부의 강렬한 대비로 모던한 관능미를 자아냈다. 나는 그 그림에서 깊고 은밀한 머스크 향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루소의 〈꿈〉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그림에서 천진난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대 식물들을 보고 있자니,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풀내음이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실제로 열대 우림을 가본 적도 없는 루소가 파리 식물원에서 본 식물들을 상상으로 그려낸 정글의 풍경은 어딘가 동화적이고 순수했다.


미술관을 찾지 않아도, 책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니 한 가지 감각이 아닌 여러 감각이 겹겹이 깨어나는 듯 했다. 시각적 이미지가 후각의 기억을 불러오고, 그것이 다시 촉각적 상상으로 이어지며 작품은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시각적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에 감각을 하나로 통합해 천천히 느끼는 일은 신선하고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앞으로 명화를 볼 때마다 어떤 향기가 떠오를지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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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도약 - 트라우마 후 성장을 위한 감정, 관계, 삶의 회복
이재희 지음 / 시공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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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하정우가 출연한 영화 《터널》에서 주인공 정수는 큰 계약을 성사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를 당한다. 그는 터널 안에 홀로 갇히고, 가진 것은 78% 남은 휴대폰 배터리와 생수 두 병, 딸의 생일 케이크뿐이다. 구조대는 터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정수는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결국 가까스로 구조되어 살아남는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함께 다른 터널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그는 몸을 움츠린 채 고통스럽게 그곳을 통과한다.


영화 속의 극적인 장면이 아니어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된다. 트라우마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는 폭풍이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분명하게 가르는 경계다. 『고통의 도약』은 이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책이다. 고통을 부정하거나 덮는 대신, 그것을 마주하고 이해하며 다시 삶과 연결되는 길을 안내한다.


"트라우마 이후의 삶이란, 삶의 밀도를 다시 조정하는 경험이다"


이 책은 트라우마를 단순히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새로운 장을 열고, 과거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여 나를 재구성하는 여정으로 묘사된다. 특히 삶을 하나의 긴 이야기, 여러 개의 챕터로 바라보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트라우마는 인생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할 만큼 강력하지만, 그것이 인생 전체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삶은 다양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긴 이야기이며, 그 모든 장면이 모여 나라는 존재의 깊이를 만든다.


책의 구성도 체계적이다. 트라우마의 이해에서 시작하여 증상 인식, 성장의 다섯 가지 영역, 실천 방법, 그리고 삶의 재구성까지 단계적으로 안내한다. 특히 일상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들을 제시한 점이 실용적이다. 감정 인식과 돌봄, 건강한 경계 설정 등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즉시 도움이 될 내용들이다.


"한 번쯤 주저앉아도 괜찮다. 그 자리에서부터도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완벽한 소설의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얼굴로 세상에 태어나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어떤 장면은 즐거움과 기쁨, 따뜻함으로 채워지고, 또 어떤 시절은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이 모여 하나의 서사가 되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비로소 '나'와 '너'의 삶의 무게와 깊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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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사는 사람 샘 올트먼 - AI 시대를 설계한 가장 논쟁적인 CEO의 통찰과 전력
키치 헤이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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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나는 철학책을 읽을 때 ChatGPT나 클로드의 도움을 받는다.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나 문장을 만나면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며 그 의미를 파악해 나간다. 이런식의 독서는 철학 공부의 문턱을 확실히 낮춰준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읽어내고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지식의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픈AI의 설립 목적도 바로 이것이었다. 2015년 샘 올트먼과 일론 머스크 등이 오픈AI를 설립할 때 내세운 핵심 가치가 '인공지능의 민주화'였다. 그들은 AI 기술이 소수의 거대 기업이나 특권층에게만 독점되는 것을 막고, 모든 인류가 그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믿었다.


『미래를 사는 사람 샘 올트먼』은 오픈AI 설립자 샘 올트먼의 전기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키치 헤이기 기자가 250회가 넘는 인터뷰를 통해 완성한 이 책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AI 혁명의 주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은 올트먼의 세인트루이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스탠포드 대학 중퇴 후 첫 스타트업 Loopt 창업, Y 콤비네이터에서 폴 그레이엄의 후계자로 성장하며 실리콘밸리 핵심 인물로 부상한 과정, 그리고 마침내 오픈AI를 설립해 ChatGPT라는 혁신적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여정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내가 아는 한 그 친구는 그 나이에 책꽂이에 C++ 프로그래밍 책을 갖고 있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인공지능이 아직 SF 소설의 개념으로 여겨지던 시절부터 그는 AI와 핵융합 같은 미래 기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핵융합과 인공지능 투자는 같은 맥락에 있다. 둘 다 인류의 삶을 바꿀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컴퓨터 너머로 그는 기술이 미칠 사회적 영향을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줄 아는 ‘미래 형 너드’였다. 16세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며 사회적 용기를 발휘한 그는 친구·동료와 활발히 소통하며 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기술적 재능과 카리스마를 두루 갖춘 덕분에 ‘미래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단순한 개발자를 넘어 비전 제시형 리더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한편, 비영리로 출발한 오픈AI가 2019년 영리 법인으로 전환되고 마이크로소프트 투자를 유치하며 ChatGPT 일부 기능을 유료화하면서 초기 이념과 현실 사이에 긴장이 생겼다. 올트먼은 “AGI 개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해명했으나, 전통적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샘 올트먼이 AI 역사에 미친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ChatGPT의 등장으로 일반인들도 손쉽게 강력한 AI 도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분명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완전한 민주화는 아닐지라도, 과거 소수 전문가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고급 정보 처리 능력이 대중화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이다.


이제 관건은 이 편리한 기술을 어떻게 현명하게 쓰고, 악용 사례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이다. 세상에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그들도 결국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샘 올트먼의 여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바로 ‘미래를 낙관하며 끝없이 길을 개척하는 의지’다.


각자의 삶에서 시대의 조류를 바꾸는 거창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 실현해 나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올트먼처럼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미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용기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각자에게도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믿고 끝까지 실현해 나가는 삶이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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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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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서양 철학은 언제나 '아르케(archē, 기원)'를 탐구해 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을 묻는 데서 사유가 출발했고, 그 기원을 밝힌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안을 주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4원소론(물, 불, 흙, 공기)에서 출발해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을 토대로 삼고, 기독교가 신앙과 학문을 통합한 뒤 르네상스에서 고전을 재발견하고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승리가 선언되는 일련의 발전으로 포장되었다.


그런데 정말 서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단일하고 직선적인 궤적만을 걸어온 것일까?


니샤 맥 스위니는 『만들어진 서양』에서 이런 '계보학' 자체가 후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발명된 허구임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을 '그리스인'으로만 생각했을 뿐 유럽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아랍의 첫 번째 철학자인 알킨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랍어로 번역되고 주석이 달리면서 오히려 더 풍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문헌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아랍어 필경사와 번역가들의 헌신 덕분이다.


르네상스의 '고전 재발견' 역시 비잔틴 황제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같은 망명 지식인들이 그리스 문헌을 서유럽으로 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남성 중심의 인문주의 문화 속에서 지적 영역을 개척한 고급 매춘부 툴리아 다라고나와, 18세기 백인 중심 문학계에 등장해 인종적 고정관념을 뒤흔든 흑인 노예 출신 시인 필리스 휘틀리의 사례는, 서양사가 결코 단일한 목소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서양 철학의 연속성'이라는 서사는 이슬람 세계의 보존과 전승, 비잔틴 망명 지식인들의 역할, 그리고 수많은 비서양적 요소들의 기여 없이는 완성될 수 없었다. 서양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리스–로마–기독교'라는 단일한 계승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런 복잡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차용하면서도 지워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의 목소리는 지운 채 '우리'와 '타자'로 구별하게 되었을까? 맥 스위니가 추적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는 분명한 정치적 전략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 앞에서 유럽의 여러 세력들은 분열된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의 정체성이 필요했다.


여기서 핵심은 배제의 논리였다. 이슬람을 '타자'로 규정함으로써 기독교 유럽의 결속을 다졌고, 동방 정교회를 '덜 서양적인' 것으로 여김으로써 가톨릭 서유럽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구별짓기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문명화된 서양'과 '야만적인 비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제국주의 확장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식민지 출신 지식인이 서양 학문의 허점을 지적해도 '서양에 대한 원한'으로 폄하되었다.


결국 '우리'와 '타자'의 구별짓기는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독점하려는 정치적 전략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14인의 삶을 보면 문명의 경계와 정의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역사는 빈틈없이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개인과 문화가 만나 부딪히며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복합적 서사였을 뿐이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조심스레 발굴해 먼지를 털어내듯, 맥 스위니는 ‘서양’이라는 개념에 덧씌워진 신화를 하나씩 걷어 내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편견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서양인이 아닌 내가 서양의 관점으로 이슬람과 아시아 문화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단순히 서양사를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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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부의 사랑법
테일러 젠킨스 리드 지음, 이경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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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 말리부는 화마를 부른다…활활 타오르는 것이 말리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8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서핑 모델 니나 리바의 저택에서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말리부 해안가에 자리한 이 집은 매년 열리는 파티로 유명해졌고, 올해도 온갖 셀럽들이 모여들 예정이다. 파티를 앞두고 리바 집안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네 남매의 아버지 믹 리바는 전설적인 가수였지만 바람기와 무책임함으로 가족을 버렸다. 홀로 남은 어머니 준은 바닷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웠지만 알코올에 의존하다 세상을 떠났다. 맏이 니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들을 돌보며 레스토랑을 이어받았다.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상처의 고리

이 가족에게는 흥미로운 패턴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가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것이다. 믹은 자신의 바람둥이 아버지를 증오했으나 결국 같은 길을 걸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자기혐오로 이어졌고, "나는 타고나길 그냥 쓰레기야"라며 스스로 그 예언을 실현했다. 딸 니나 역시 테니스 선수 브랜든과 다른 삶을 살려 했지만, 그 또한 떠나버렸다. 어머니처럼 묵묵히 견뎌온 니나에게 브랜든은 또 다른 믹이었다.


"가족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건가." 니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부모의 삶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아니면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자유로운 몸일 수도 있다."


순응에서 선택으로

파티가 난장판이 되고 브랜든이 나타나 재회를 청하는 광경을 보며, 니나는 자신이 평생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빠의 배신도, 엄마의 죽음도, 동생들을 돌보는 일도. 언제나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지,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해본 적이 없었다.


읽는 내내 니나의 모습이 답답했다. 왜 항상 자신을 희생하고 순응하기만 할까? 왜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그 답답함이 니나 자신도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화마가 가져온 자유

니나는 마침내 부모가 물려준 짐을 내려놓고 포르투갈행을 선택한다. 드디어 자신만의 삶을 택한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말리부를 휩쓴 화재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지만, 재 속에서도 새싹은 돋아난다. 부모의 상처와 가족사의 저주를 모두 태워버린 자리에서, 이제 그들은 자신만의 삶을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삶은 스스로 선택할 때 시작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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