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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펠리니 지음, 전은경 옮김 / 북파머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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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15살 린다는 어떤 계획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바로 자동차로 뛰어들어 삶을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계획은 두 사람 때문에 잠시 미뤄졌다. 4층 치매 노인 후베르트와 그녀의 친구 케빈이 그 이유이다.


린다는 일주일에 세 번 후베르트를 찾아간다. 후베르트의 요양보호사 에바가 잠시 쉴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노인과, 죽음을 꿈꾸는 소녀는 그렇게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아버지의 폭력과 상처 입은 어머니로 인한 고통과 상실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아이, 그리고 기억과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며 무덤덤한 존재가 되어가는 후베르트. 린다는 세상에 대한 무력감 속에서도 후베르트에게 애정을 느끼며 그의 곁에 머문다. 그의 리듬과 말을 존중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잠시라도 되찾을 수 있도록 함께한다.


죽음을 끝내 해답이라 믿었던 린다는 왜 후베르트 곁에서 편안함을 느꼈을까. 부모에게 받은 상처로 무가치하게 느껴졌던 그녀는, 후베르트를 통해 처음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한다. 단순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낙서를 하고, 수영장 소리를 들려주는 행위 속에서 린다는 자기 존재의 무게를 느낀다. 치매로 무덤덤해진 노인과 삶에 무력해진 소녀는 서로를 지탱하며, 그 과정에서 린다는 죽음이 아닌 삶의 곁에 머무는 법을, 존재해도 된다는 이유를 경험하게 된다.


후베르트는 린다에게 ‘내가 있어도 된다’는 확신을 주는 인물이라면, 에바는 잃어버린 모성을 대신해 따뜻함을 건네는 인물이다. 에바는 언제나 린다를 안아주고 걱정하며, 그녀의 상처 입은 내면을 품어준다. 린다는 후베르트 곁에서 ‘돌보는 법’을 배우고, 에바 곁에서는 ‘돌봄을 받는 법’을 경험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관계 속에서 린다는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한 애정을 천천히 회복해간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이름뿐이 관계가 아닌, 바깥에서의 타인과 나누는 돌봄과 애정과 사랑은 린다에게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떤 조건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지고 긍정할 수 있는 그런 관계, 그런 연결됨은 그녀가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힘이 된다.


지구가 병들고 세상이 전쟁으로 무너져가며 망해가는 듯 보여도, 린다에게 후베르트와 케빈이 그러했듯 우리 또한 서로의 곁에서 작은 희망을 나눌 수 있다. 허무주의의 어둠 속에서도 끝내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과 다정한 연결임을 느꼈다.


후베르트는 점차 목소리와 개성을 잃어가지만, 린다와 에바가 그를 아끼고 소중히 돌보는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는 현실에서 치매 노인이 종종 사물처럼 취급되고 소외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어서, 더욱 특별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왔다.


죽음과 치매라는 무거운 소재가 중심에 있지만, 작품은 린다의 유머와 세심한 관찰, 그리고 다정한 연대를 통해 따뜻하게 직조된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다.’라는 문장이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올해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감동을 전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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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랜드
양기연 지음 / 열림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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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펜타랜드는 게임의 세계를 테마파크로 구현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거나 혹은 관람객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제2의 성』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전통적으로 여성이 늘 남성 앞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져 왔음을 지적한다. 남성이 ‘보편 인간’이라면 여성은 ‘특수한 성별 존재’로 규정되어 왔다. 『펜타랜드』의 화자들 역시 바로 그 타자화된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식소다 낙뢰’의 화자는 두더지 인형 탈을 쓰고 얼굴 없는 익명으로 일하다가 동료 천진우와 마음을 나눈다. 그러나 놀이공원에서 일어난 사고의 책임으로 그가 부당 해고를 당했을 때, 화자는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채 무력하게 떠나보낸다. 언제든 대체 가능한 노동처럼,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깊어지지 못한 채 희미하게 끝난다.


‘도넛 모양의 틀’의 지안은 매표소에서 근무하며 관람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가 찾고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얼굴이다. ‘폭죽 파편 맞기’에서는 자궁 경부에 염증이 생겼음에도 파트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상황 속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의 결핍과 몸의 한계를 경험하며,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타자화된 위치에 머문다.


‘지빠귀의 구애’ 속 주인공은 남성 동료 치산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다가 오히려 동료들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다. 이어지는 ‘영웅의 행진’에서는 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를 돌보며, 주인공이 독립의 욕망과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갈등한다. 두 이야기는 여성의 몸과 관계, 돌봄이 어떻게 사회적 요구와 얽히며 개인을 소모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환상과 즐거움의 공간으로 꾸며진 테마파크와, 그 이면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대조한다. 마치 너무 강한 빛 아래에서 오히려 그림자가 또렷해지는 것처럼, 화려한 축제 뒤편에 가려진 어두운 음영을 드러낸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서사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타자화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성’으로 구분하는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여성은 무엇보다도, 여성이라는 이름 이전에 인간이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문장을 낡은 실존주의의 표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이나 역할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삶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비로소 본질을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소설 속 화자들이 반복해서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은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 불편함은, 이론과 달리 오늘날 현실 속에서도 여성들이 여전히 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 소설이 던지는 물음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떻게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가’, ‘나와 다른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 말이다. 그것은 요즘 읽고 있는 레비나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는 타자를 내가 다 알았다고 믿는 순간 타자는 사라져버리며, 언제나 내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존재로 남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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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땅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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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변신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주도한 진화 생물학 교수 알리스 카메러는 최신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해 세 가지 아종으로 다양화된 새로운 인류를 개발하려 합니다. 공중을 나는 인간, 땅을 파고드는 인간, 헤엄치는 인간이죠.”


소설은 진화생물학자 알리스 카메러의 비밀 연구에서 출발한다. 인류가 맞닥뜨릴 위기에 대비한 취지였지만, 연구가 탄로나면서 그는 반대론자들의 위협을 받게 된다. 친구이자 프랑스 연구부 장관의 도움으로 국제 우주 정거장으로 피신해 연구를 이어가던 중, 3차 대전이 발발하여 지구는 핵전쟁으로 파괴된다.


우주정거장에서 1년 가까이 고립된 채 버텨낸 알리스와 일행은 연료와 식량의 고갈 앞에서 결국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그가 지니고 돌아온 것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동시에 새로운 불안의 씨앗이었다. 인간과 박쥐의 혼종으로 하늘을 나는 〈에어리얼〉, 인간과 두더지의 혼종으로 땅속에 적응한 〈디거〉, 인간과 돌고래의 혼종으로 바다를 유영하는 〈노틱〉. 세 종의 키메라는, 파괴된 지구 위에서 구인류를 대신할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속에서 소설은 SF 영화 같은 스펙터클과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펼쳐내, 마치 블록버스터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그건 메아리라는 거야. 메아리는 삶에서 우리 태도의 영향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은유이기도 하단다. 보내는 대로 돌아오는 거야. 두려움을 보내면 네게도 두려움이 오지. 불신을 보내면 너도 불신을 받아. (…) 사랑을 보내면 너도 사랑을 받지. 우주는 네가 보낸 것을 언제나 되돌려주는 거울처럼 돌아간단다.”


소설 속에서 “삶은 메아리와 같다”는 대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두려움과 불신, 모욕과 증오를 내보내면 그 역시 증폭되어 돌아오고, 사랑과 신뢰를 보낼 때 비로소 같은 울림이 되돌아온다. 인류가 서로에게 불신과 적의를 보낸 끝에 핵전쟁과 아마겟돈이라는 최악의 파국에 이른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충동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삶과 사랑, 결합과 창조를 향한 에로스의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와 해체, 죽음을 향한 타나토스의 충동이다. 『키메라의 땅』 속 키메라들의 서사는 이 두 충동의 끊임없는 긴장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협력과 공존을 시도하지만, 곧 타나토스에 휘둘리며 갈등에 빠진다.


베르베르는 과학 기술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다 해도 그것이 곧 인류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종의 진화가 반드시 윤리적 진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키메라는 기능적으로는 더 우수할 수 있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 안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중 어떤 힘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랑과 파괴, 그 둘 중 어느 파동이 메아리로 돌아올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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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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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표제작 ‘설산의 사랑’을 읽으며 나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떠올랐다. 소설은 밤하늘과 산의 정적, 별빛, 여름 공기 같은 자연의 풍경과 호흡을 따라 주인공들의 감정을 에둘러 전한다.


"마전은 묵묵히 설산을 보았다. 그는 설산이 좋았다. 뭐가 좋은 건지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거기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비밀스럽고 숭고한 무언가가 설산을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전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에 난 화재로 점원이 목숨을 잃자, 목숨값을 치르기 전까지 그 남자의 여동생 융춰와 할머니가 사는 집에 보내졌다. 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매일 과일을 사서 문 앞에 두지만, 융춰는 그 과일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버린다. 버려지는 과일처럼 두 사람의 감정도 표면적으로는 폐기되지만, 그 행위는 묘한 소통의 통로가 된다.


멀리 보이는 설산에 신비로움을 느끼듯, 마전은 융춰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그 마음은 말로 꺼내는 순간 빛이 바래질 것 같아 차라리 침묵 속에 묻어둔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침묵은 단순한 소극성이 아니라 지각의 생생함을 지키려는 선택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은 언어 이전의 경험으로 가득하지만, 이를 “사랑한다” “좋아한다”로 옮기는 순간 그 풍부함은 단순한 개념으로 줄어든다. 마전은 그 순수함을 지키고자 말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에조차 애틋함과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렇듯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직접적인 고백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설산 같은 침묵 속에서 서서히 무게를 더해 간다. 읽는 내내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스쳤다. 요즘 우리의 사랑과 문학은 대체로 직설적이며, 우리는 그것을 솔직하고 쿨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침묵 속에도 깊고 오래가는 아름다움이 있다.


『설산의 사랑』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중국 소수민족 둥샹족 출신인 작가는 무슬림 주인공과 종교·문화적 배경을 통해 중국 소설에서는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분위기를 빚어낸다. 특히 티베트 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광활한 자연과 섬세한 풍경 묘사가 돋보인다.


속세와 사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구니의 이야기 「속세의 괴로움」, 생존과 자아 사이에서 길을 찾는 청년을 그린 「아프리카봉선화」, 혈연을 넘어선 유대를 다룬 「늦둥이」 등, 서로 다른 결의 이야기들이 모두 말하지 못하는 마음과 그 마음이 빚어낸 침묵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가보지 못한 광활한 티베트 고원을 상상하며, 침묵이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삶이 되는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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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이후의 중국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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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지난 1월, 중국의 딥시크가 출시되자 전 세계가 술렁였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애플 앱스토어에서 챗GPT를 제치고 1위에 올랐으며, 미국의 반도체 제재 속에서도 저사양 칩으로 오픈AI와 동등한 성능을 95% 저렴하게 구현했다.


중국은 이제 단순한 ‘세계의 공장’을 넘어 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0년대 제조업에서 출발해 오늘날 AI·5G·전기차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딥시크 사태는 중국이 단순히 기술 추격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프랑크 디쾨터의 『마오 이후의 중국』은 이처럼 화려한 경제·기술 성과 뒤에 감춰진 권위주의적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부터 시진핑 집권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40여 년간의 성장 서사를 냉철하게 재검토한다.


한마디로 이 책을 통해 본 현대 중국은 분열과 환상의 나라였다.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표방하며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폐쇄성과 통제를 강화해 왔다.


“그러나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 속 이 구절은 중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으며, 자본주의의 환상과도 닮아 있다.


그들은 경제적 성과를 신성시하며, 그 이면의 불평등·억압·모순은 하찮게 여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성장 지표에 집착했고, 정작 노동자와 인민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정권은 사람보다 사회 기반 시설에 더 많은 투자를 해왔으며, 덩샤오핑 시대 총서기는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 그들에게 직접 교사를 모집하고 학교를 짓게 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거나 권력이 느슨해질 때마다 ‘정신 오염’이라는 명목으로 서구 사상과 자유주의적 가치를 배격하고,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 사상’을 신성한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상 맑스 없는 맑스주의 아닌가.


마르크스가 런던의 영국 박물관 도서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집필하던 시기, 그의 시선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소외와 착취에 향해 있었다. 그는 노동이 인간의 본질적인 활동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생산물마저 노동자와 분리돼 자본가의 것이 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GDP 세계 2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을 뿐, 노동자의 소외를 해소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산당’이라는 이념이 오늘날 실현된 나라는 없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공산국가 역시 일당 독재체제일 뿐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 발전이 정치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러나 『마오 이후의 중국』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도 향한다. 성장과 발전에 눈이 멀어 그 이면의 어둠을 외면하는 것은 중국만의 문제일까. 환상과 현실, 이념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을까. 150년 전 포이에르바흐가 기독교를 비판하며 던진 말이, 오늘날 이데올로기 비판에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시간은 모든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시간의 잔해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남긴 이 말처럼,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이데올로기 앞에서 개인은 무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자신의 삶은 곧 우주 전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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