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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 -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7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거주하는 삶이란 무엇일까?”는 질문으로 책은 시작한다.
우리는 어딘가에 거주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흔히 거주를 평온히 머무는 것, 자신과 친숙한 곳에 안주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전체를 뜻한다.
아감벤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거주 불가능한 시대”라고 말한다. 얼핏 우리는 각자 어딘가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근대성의 시스템, 곧 ‘인류학적 기계’는 인간을 인간/비인간, 정상/광기, 주체/객체로 구분하며 세계를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에 뿌리내려 사는 대신, 점령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길들여졌다.
그렇다면 거주하는 삶과 횔덜린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횔덜린의 삶은 거주하는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광기 속에서 보냈지만, 아감벤은 그 시기를 단순한 병리로 보지 않는다. 횔덜린은 능동적으로 성취한 영웅도, 시대의 폭력에 짓눌린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는 습관과 성향, 주어진 삶 속에서 살아갔다.
아감벤은 중간태적 삶을 곧 거주하는 삶으로 해석한다. 능동과 수동 사이에서 주체가 동시에 행위자이자 대상이 되는 상태, 바로 ‘기뻐하다’, ‘부끄러워하다’, ‘미치다’와 같은 동사가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횔덜린은 이 중간태 속에서 언어와 관계 맺으며 파편적인 시를 남겼다.
하이데거는 그의 시구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읽어냈다. 여기서 ‘시적’이란 세계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이다. 광기의 시인으로 불렸지만 횔덜린은 옥탑방에 머물며 계절의 순환과 강물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겼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점령했고, 괴테는 문학의 정상에 올랐으며, 헤겔은 절대정신의 철학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횔덜린은 옥탑방에서 조용히 시를 이어갔다. 그는 성취 대신 응답의 방식을 택한 삶을 보여주었다.
횔덜린의 예는 극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소유하고 정복하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운다. 존재와 세계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곧 거주하는 삶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곁을 스쳐가는 존재들에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거주의 방식일지 모른다.
“횔덜린이 남긴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든, 그것이 우리가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삶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을 근본에서 흔든다. 실패는 더 이상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낙인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본질적 조건이다. 인간은 성공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삶이라는 예술 안에서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 속에서 우리는 세계와 관계 맺고, 존재에 응답하며, 시적으로 거주한다.
횔덜린의 삶은 이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길이었다. 그는 비정상이라 불리며 파편적이지만 세계에 응답하며 거주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정상이라 불리는 우리는, 파편적으로 부유하며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