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이 이야기 암실문고
김안나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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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1950년대 미국 위스콘신주의 작은 도시 그린베이. 백인 미혼모 캐럴이 낳은 아이는 흑인의 외형을 지닌 혼혈아였고, 곧 지역 사회의 관심과 당국의 조사를 불러일으킨다. 사회복지국은 아이의 입양을 추진하며 생부를 추적하지만, 캐럴은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보고서를 남긴 사회복지사 마틀레네는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며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그러나 단순한 행정 절차라고 보기에는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강압적이었고, 때로는 아이와 어머니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왜 이토록까지 생부를 밝혀야 하는가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떠올려 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양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부터 국가는 국민을알아야 통치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수치와 평균을 중심으로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다. 평균 키, 평균 몸무게, 평균 수명 등, 인간은 통계로 분류되고 측정되었다.


『평균의 종말』에서 토드 로즈는평균이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학창 시절 성적이 형편없어 교사들에게공부 못하는 아이로 낙인찍혔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믿어준 할머니 덕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길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맞는 학습 방식을 찾아냈다. 이후 하버드대 교수가 된 그는, 평균 중심 사고가 사회 전반에서 어떻게 개인을 놓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녀는 가시성이 멍에라는 내 말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의 가시성은 많은 걸 어렵게 만들었지. 가시성은 조금도 투명하지 않아. 오히려 완전히 불투명한 거야. (…) 가시성은 거대하고 폭력적인 데가 자기한테만 주의를 집중하길 원하지. 그런 다음 그 모든 특성을 묶어 명확함을 향해 내던져 버려.”


본다는 행위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전제로 한다. 보는 사람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대상은 그 시선 앞에서 해석되고 규정된다. 이때 가시성이란 단순한 드러남이 아니라, 선별되고 분류되는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니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받고, 정체성을 강요당했던 이유도 바로 그보여짐에 있었다. 그는 보였기 때문에 문제였고, 보이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멍에이자 낙인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여러 면에서 뛰어났던 그가 결국 주저앉고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능력이나 용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피부에 드러난 가시성, 즉 외형으로 인해 그는 끊임없이 분류되고, 타인의 기준에 따라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 덫이자 폭력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그것을 나눌 자격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프란치스카의 시선을 따라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경계선들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상한 것 아닐까? 너무 튀지 않나?…등등의 자기 검열의 시간. 이미 내 안에도 정상과 비정상, 평균과 예외를 나누는 시선이 깊이 새겨져 있음을 자각하니, 나도 모르게 팔에 서늘한 소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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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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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은 탓인지, 범인을 알고 싶은 마음에 단숨에 6시간을 읽어 내려갔다. 끝내 범인을 맞히지 못한 채 책을 덮었지만, 찾고 싶었으나 끝내 찾지 못한 데서 오는 묘한 만족감은 무엇일까.


"나는 처음으로 살인자와 커피를 마시게 된다."

소설 작가 프레디는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을 바탕으로 새로운 소설을 구상한다. 그러나 열람실 밖에서 들린 여성의 비명과 함께 네 사람은 '캐럴라인 펄프리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어준 채 빠르게 친밀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 프레디의 휴대폰으로 피해자의 비명 소리와 아파트 현관문 사진이 전송된다. 발신자는 그날 함께 있었던 '잘생긴' 케인. 문제는, 그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네 사람 중 하나가 범인이라는 단서를 던진다. 나는 인물들 사이의 대화와 행동,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세심하게 의심하며 추리를 이어갔다. 이야기 곳곳에 흩뿌려진 단서와 흔적들을 따라가며, 누가 연기하고 있고 누가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긴장감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간다.


사실 프레디는 '현실'의 호주 작가 해나 타이곤이 쓰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다. 해나는 보스턴을 배경으로 『도서관 비명 살인 사건』을 집필 중이고, 현지에 거주하는 오랜 팬 리오에게 베타리딩을 부탁한다. 문제는, 리오의 피드백이 점점 선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시체를 둘 장소를 추천하거나, 실제 범죄 현장을 찍은 듯한 사진을 보내는 그의 행동은 단순한 팬의 호의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살인 편지』는 이처럼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들어 있는 액자 구조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침범한다. 프레디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녀가 겪는 공포는 해나의 현실을 반영하고, 해나가 마주한 긴장은 결국 나에게까지 전이되었다.


결국 『살인 편지』는 범인이 밝혀지고 사건이 매듭지어지는데도, 이야기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허구와 현실이 맞닿는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이중의 추리를 하게 만든다. 하나는 이야기 속 사건의 진실을 좇는 추리고,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서사의 경계를 추적하는 추리다.


직감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직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이 체화되어 작동한 결과인 반면, 믿음은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유지될 수 있는 확신에 가깝다. 내가 소설 속에서 끝내 범인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단서들이 특정 인물을 강하게 지목했고, 그에 대한 인상이나 배경이 판단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서를 정교하게 배치하면서도, 그 판단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살인 편지』는 추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근거로 믿거나 의심하는지를 되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범인이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내가 왜 그렇게 믿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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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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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스무 살 이후로 혼자 옮겨 다닌 방들은 시절마다의 언어였다."(p.9)


두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 거쳐 온 방들을 마치 지난 계절처럼 회상한다어느 날의 좁은 고시원햇살 드는 원룸책상 앞에 오래 앉았던 공부방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방까지방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각자의 언어와 감정생각이 자라난 장소였다.


이들의 담백하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문득 내 기억 속 방들이 떠오른다유년 시절을 함께한한지붕 세 가족이 살던 작은 셋집 방그 조그만 공간에서 공부도 하고장난도 치고여름의 비 냄새를 맡던 기억들이 아련하게 되살아난다그렇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집들과 방들그리고 그 시절의 한 조각이 떠올라 묘한 감정이 인다.


방은 엄마의 자궁 같은 곳이다내 몸을 담그고숨을 수 있고살 수 있는 곳바깥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시끄러워도방 안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안도가 밀려온다말없이 나를 품어주고무너진 하루를 다시 조용히 이어붙이는 공간때로는 울어도 괜찮고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어도 괜찮은내가 나이어도 되는 곳.


그렇게 내 방의 기억에 잠겨 있다가다시 책으로 돌아와 본다.
『우리 같은 방』은 두 사람이 ‘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나란히 글을 써 내려간 산문집이다한 사람이 건넨 말에 다른 이가 답장을 보내듯때로는 같은 제목 아래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며그 안에 각자의 삶과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재미있었던 점은 두 작가가 방에 대해 쓰는 방식의 차이였다최다정은 방 안의 사물들(의자화분창문심지어 보내지 못한 엽서에 이르기까지)을 통해 인간관계와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반면 서윤후는 고양이 희동이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과거의 방들로 자유롭게 이동하며그 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의 순간들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두 사람의 글을 번갈아 읽다 보면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방을 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한 방에서는 깊은 사색에 잠기고다른 방에서는 일상의 소소한 웃음을 발견한다그러면서도 결국 두 방 모두에서 느끼는 것은 섬세한 감정과 사유의 결이다.


방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쉼의 자리를 넘어관계와 시간삶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다지금 산 초입에 위치한 나의 방언젠가 또 떠날 수 있는 이곳은 훗날 나의 추억들을 소환할 열쇠 구멍이 될 것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의 계절 변화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새소리뒷마당 바위틈에 도토리를 숨기던 다람쥐바닥에 떨어진 햇살의 각도까지도 언젠가 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가 될 터이다.


이 방에서 누군가와 나눈 긴 전화통화의 시간들혼자 앉아 끙끙거리며 읽던 책들깊은 밤 잠 못 이루며 천장을 바라보던 수많은 순간들이 이 공간의 기억으로 조용히 축적되고 있다언젠가 이곳을 떠나더라도나는 분명 이 방의 공기와 빛냄새그리고 그 안에서 흘렀던 시간의 결들을 조용히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지금 이곳이이 순이 왠지 소중하게 느껴진다그래서일까지금 이 방에서 보내는 이 평범한 하루가언젠가 가장 애틋하게 떠오를 기억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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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착각 -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이정표
안호기 지음 / 들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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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가오나시는 일본어로 ‘얼굴(카오)’이 ‘없는(나시)’ 존재를 뜻한다. 말 그대로 ‘얼굴 없는 존재’다. 정체성을 잃고, 타인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닮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는 금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 욕망을 빨아들이듯 흡수하며 끊임없이 음식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욕망을 먹고 자란 그는 점점 몸집이 불어나고, 마침내 괴물로 변해버린다. 그 모습은 소비와 모방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 모습과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한계 없이 팽창하는 그의 몸은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과도 같다.


원래 자본주의는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잉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잉여를 다시 소비하게끔 구조화 되어 있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받고, 결핍은 채워지기보다는 오히려 재생산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는 필연이다. 무언가를 사고, 욕망이 잠시 채워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너무도 짧다. 금세 또 다른 결핍이 고개를 들고, 우리는 다시 욕망을 좇게 된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그러나 행복도는 52위.” 이 수치가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달려왔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은 것은 무엇일까? 『성장이라는 착각』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파고든다. 성장 중심 사회가 남긴 피로와 균열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한다.


“더 많이 가졌지만, 더 공허하다.”

저자 안호기는 30년 넘게 현장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취재해 온 언론인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성장 신화’를 다양한 사례와 통계로 해부한다. GDP, 수출, 기술 혁신 같은 그럴듯한 지표들 뒤에는 불평등, 기후 위기, 돌봄의 위기, 그리고 높은 청소년 자살률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GDP가 오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불평등은 심화되고, 환경은 파괴되며, 공동체는 서서히 무너진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돌봄과 연대, 삶의 온기 같은 것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유령처럼 그려진 가오나시는 타인의 욕망을 끝없이 삼키며 커지지만, 결국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책 속에서 비판하는 성장 중심 시스템 또한 이와 닮아 있다. 겉으론 풍요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은 고립되며, 삶은 점점 공허해진다.


『성장이라는 착각』은 바로 이런 현실을 예리하게 비춰낸다. 그리고 치히로의 진심이 가오나시를 정화시켰듯, 저자는 돌봄과 분배, 관계의 회복이야말로 탈성장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라고 말한다.


사실 ‘탈성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가 멈추는 건 아닐까? 그러다 일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탈성장은 ‘멈춤’이 아니라 ‘방향 바꾸기’에 가깝다.

지금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인간과 지구가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도록 체계를 바꾸자는 제안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가지는 대신, 더 의미 있게 살아가고,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며, 타인과 깊이 연결되는 삶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장 없는 사회는 상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암스테르담의 도넛 경제 모델, 바르셀로나의 공유경제 실험, 커먼 포레스트 운동 등은 삶 중심의 전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GDP가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싶은 삶의 총량을 키우자”는 이 책의 메시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성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경제는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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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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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언젠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심리학 책과 철학서를 뒤적이며 답을 찾아 헤맨 적이 있다.


라캉은 내가 믿는 ‘나’란 사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반사체일 뿐이라 했고, 프로이트는 자아를 무의식이라는 심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불안정한 구조로 보았다.

니체는 그마저 허구라며, 자아를 충동과 힘의 흐름이 잠시 만들어낸 일시적인 형상이라 보았다.


셋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나는 지금껏 나를 ‘나’라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철학은 말한다. 그 ‘나’조차 구성되고, 흔들리며, 해체될 수 있다고.


『아웃사이더』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신경학자가 30년간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가 얼마나 쉽게 뒤틀리고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뇌졸중 이후 병적인 무관심 상태에 빠진 데이비드, 단어를 점점 잃어가는 마이클, 알츠하이머로 인해 남편을 불륜 상대로 착각하는 트리시, 자신의 팔다리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애나 등, 일곱 명의 환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의 균열을 겪는다. 일곱 명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삶의 흐름과 내면을 따라가는 묘사는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졌다.


이들의 사례는 자아가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기억, 지각, 주의력, 행동 통제 능력 등의 다양한 기능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복잡한 작용임을 말해준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이들이 단지 뇌질환을 앓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천천히 밀려나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기억을 잃고, 말을 잃고, 감정을 잃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정상’이라는 범주 안에 머무르지 못한다.


푸코와 알튀세르는 개인의 정체성이 고유한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권력, 제도 같은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모두 사회가 부여한 이름과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의 구조를 받아들이고, 의미를 만들고,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는 그 모든 과정은 결국 뇌라는 신체적 토대 위에서 가능해진다.


정체성은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다시 짜 맞추는 일은 개인의 몫이며, 『아웃사이더』는 그 사실을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7세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뇌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우리는 모두, 언제든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는 존재다.

사고나 질병 하나로, 내가 나라고 믿었던 확신은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깨질 수 있다.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는 환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받아들임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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