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것 같은 환지통일까?
아직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감각이다. 주인공 바움가트너는 아내를 잃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노교수다.
바움가트너가 ‘현상학 전공 철학 교수’라는 설정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적 바탕이 된다. 상실 이후, 그의 일상은 기억과 감각이 얽히는 순간들로 가득하며,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을 겪는다. 타버린 냄비, 오래된 커피잔, 낡은 타자기와 같은 평범한 물건들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자,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통로다. 그는 사물을 통해 기억의 풍경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아내를 다시 만난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에 대한 언급도 의미심장한 장치다.
퐁티는 “우리는 세계를 신체를 통해 경험한다”고 말한 철학자로, ‘육화된 의식’을 강조했다. 바움가트너가 아내의 부재를 환지통처럼 묘사한 장면은 퐁티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퐁티의 철학에서 ‘살(flesh)’ 개념이 중요한데,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 얽혀 있음을 설명한다.
이렇듯 아내를 잃은 경험을 ‘팔다리가 뜯겨 나간 것’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와 얽히고 스며든 존재였다. 그렇기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한 환지통을 느끼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죽음과 상실을 이어주는 세 가지 매개를 제시한다. 기억, 사물, 그리고 이야기. 이 가운데 이야기야말로 상실을 극복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사물은 기억을 불러오고, 그 기억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살아난다. 이야기는 과거를 되살리며, 상실의 공간을 다시 구성한다. 동시에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내가 남긴 미발표 원고와 바움가트너 자신의 글이 교차하면서 그는 상실을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과거에 머물던 시선은 점차 현재로 향하고, 그는 상실을 끌어안은 채 남은 삶을 살아갈 용기를 낸다.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바움가트너는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한다. 상실은 여전히 그의 삶에 현존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관계 속에서, 사라진 이의 자리를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자신의 모험담의 마지막 장을 향할 때까지.
죽음 이후에도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바움가트너』는 이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 상실은 단절이 아니다.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이다. 기억과 이야기,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삶은 계속된다.
처음엔 책장을 잠깐 넘겨보다 곧 카페로 나가려 했던 내 발길을, 이 소설이 끝내 붙잡았다. 어느새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며 단숨에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처음 읽어보는 폴 오스터의 소설. 그저 매력적이고 강렬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움가트너, 폴오스터, 열린책들, 소설추천, 도서협찬, 메를르퐁티, 현상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