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50
로런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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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18세기 유럽 상류층에서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다. 있는 집 자제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돌았다. 로마의 유적을 보고 피렌체의 미술을 감상하고 주류 사회의 인맥을 쌓았다. 돌아와 "거기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여행기가 명소와 견문 중심이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랜드 투어에서 볼테르와 달랑베르를 만났고, 특히 파리에서 경제학자들과 나눈 교류가 〈국부론〉으로 이어졌다.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에서 고전 예술을 직접 보고 〈이탈리아 기행〉을 남겼다. 몽테스키외는 유럽을 수년간 돌며 정치 제도를 관찰해 〈법의 정신〉을 썼다. 모두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보고 배우고, 돌아와 무언가를 이루는 여행.


제목은 〈감성 여행〉인데 로런스 스턴의 소설은 그 계보에서 벗어나 있다. 다 읽고 남는 것은 주인공 요릭이 만난 사람들, 소소한 사건들, 그가 느낀 감정과 약간의 유머가 전부다. 처음엔 당황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서사도 없으니. 그러다 한 가지가 걸렸다. 스턴은 이 책을 "구원의 작품"이라 불렀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고, 피를 토하는 고통과 가난과 불행한 결혼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쓴 책이다. 출간 한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사람이 어째서 이 가벼운 책을 구원이라 불렀을까.


"프랑스에 가 보신 적 있나요?" 하인의 한마디에 요릭은 즉흥적으로 프랑스행을 결심한다. 여권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동냥하는 수도승에게 모욕을 주고, 처음 만난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길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에게 자꾸 이끌린다. 목적지도, 이뤄야 할 것도 없다.


스턴은 요릭의 입을 빌려 이렇게 쓴다.

“모든 것에 온 마음을 담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에겐 이 짧은 인생의 마디마다 얼마나 풍성한 모험거리가 기다리고 있는가. (…) 정직하고 공정하게 손길을 건네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을 것이다.”


손길을 건네 붙잡는다. 이 한 문장이 소설 전체의 열쇠다.

요릭은 길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손을 자꾸 잡는다. 말보다 먼저, 이성보다 먼저 손이 닿는다. 18세기 신사라면 해선 안 될 행동이다. 낯선 여성의 손을 잡는 건 예의에 어긋났으니까. 그러나 요릭의 몸은 그걸 알면서도 먼저 움직인다. 스턴이 프랑스에서 디드로를 만났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성보다 몸의 감각을 앞세웠던 그 유물론자와,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요릭은 닮았다. 몸이 닿는 순간 타자와 연결된다는 것, 요릭의 손이 그걸 매번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도 결국 손이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 요릭은 낯선 숙녀 일행과 한 방을 쓰게 된다. 침대 사이에 커튼을 치고 몇 가지 조항까지 정한 뒤 잠자리에 든다. 자정 무렵 요릭의 입에서 "오 하느님"이 튀어나오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 팔을 뻗는 순간 어느새 곁에 와 있던 하녀의 엉덩이가 만져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토록 정교하게 조항을 만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손이 닿는 것으로 끝난다. 규칙은 머리가 만들고, 손은 그 앞에 먼저 닿는다.


18세기의 주류는 계몽주의였다. 이성과 합리로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하던 시기에, 스턴은 인간이 이성이기 이전에 감각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거창한 견문에도, 돌아와 이룰 업적에도 없다. 손을 뻗어 닿는 순간, 그 작은 접촉으로 채워지는 삶이 있다.


그가 마지막 책에서 택한 것이 비극도 풍자도 아닌 웃음이었다는 점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재기와 풍자가 넘치던 〈트리스트럼 샌디〉와 달리, 스턴은 이 책에서 사람을 더 다정하게 바라보려 했다. 평생 병과 가난에 시달린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끝내 붙든 것은, 세상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작은 웃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이란 남길 만한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 손에 잡히는 접촉과 그 곁의 웃음이었다.


애덤 스미스와 괴테가 여행에서 책을 가져왔다면, 스턴은 손길 하나와 작은 웃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이전에 감각의 존재라는 그의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AI와 데이터가 인간을 예측하고 엮어내는 시대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만큼 덜 닿고 덜 마주친다. 접촉보다 연결이 자연스럽고, 닿지 않고도 가까워졌다고 믿는다. 스턴이 끝까지 붙든 것은 우연 속의 마주침이었다. 머리가 결정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손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은 게 언제였던가. 〈감성 여행〉의 요릭은 여전히 낯선 여성의 손을 잡는다. 말보다 먼저, 이성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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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18주년 특별기념판) - 사람을 얻는 마법의 대화 기술 56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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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은 이런 인용구로 마친다. "힘에 맞서지 말고 그것을 이용하라." 버크민스터 풀러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가 누구인지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건축가이자 발명가. 지오데식 돔을 설계한 사람이다. 지오데식 돔은 삼각형이 촘촘히 맞물린 반구형 구조물로 최소의 재료로 최대의 강도를 낸다.


대화법 책에 건축가의 말이 인용되었다는 게 흥미롭다. "힘에 맞서지 말고 그것을 이용하라."는 원래 구조물 설계 원리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통한다.


까다롭게 구는 상대, 무례한 사람을 만날 때 말로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은 언제나 스멀스멀 올라온다. 20대에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힘에 맞서는 순간 내 쪽에서도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상대와 좋은 관계로 끝나지도 않는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은 56가지 대화 기술과 사례로 그 순간들을 채워준다. '하지만' 대신 '그리고'를 쓰는 것만으로 논쟁을 피하는 법, 상대의 언어적 공격에 여유롭게 대처하는 법, 유머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 죄책감 없이 "No"라고 말하는 법. 유용하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인용문이 나온다. 그중에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삶을 슬퍼하기보다는 웃어버리는 편이 인간에게 더 어울린다." 세네카.


그는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스토아 철학자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로 오해받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반응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책은 대화 기법을 가르치지만, 그 밑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풀러의 구조물처럼,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강도를 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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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에 대하여
팀 하포드 지음, 윤영삼 옮김 / 윌마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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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 중 하나는 과일 깎기다. 어느 날 사과 껍질을 끊기지 않게, 두께까지 맞춰가며 깎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손에 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완벽주의 성향 탓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 내 자신이 약간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사과는 그냥 껍질째 먹는다.


먼저 제목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효율이 미덕이 된 이 시대에, 불완전함이라는 단어는 낯설고도 반갑다. 살면서 불완전함이 결함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말을, 나는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팀 하포드는 이 책에서 우리 시대가 신뢰하는 가치들, 체계, 효율, 계획의 치밀함이 실은 인간의 본성과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혼돈 속에서 길을 찾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즉흥적인 순간에 창의성을 발휘한다. 불완전함은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간다움 그 자체다. 완벽함은 기계의 언어에 가깝다. 기계조차 오류를 일으키는 시대에.


저자는 완벽하게 설계된 시스템이 멈추는 순간 드러나는 인간의 즉흥성과 회복탄력성을 다양한 사례로 풀어낸다. 그 중 두 장면이 오래 남는다. 1975년 쾰른 오페라하우스,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은 제대로 조율조차 되지 않은 낡고 망가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공연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피아노의 한계 안에서 연주했다.


"일어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신음하고 몸부림치며, 피아노를 망치로 내려치듯이 두들기며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 결코 들어본 적 없는 명연주가 탄생했다.(…) 눈앞에 펼쳐진 혼돈을 회피하지 않고 맞선 그는 그것을 뚫고 날아올랐다."


그날 밤의 즉흥 연주는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솔로 피아노 앨범이 되었다.


또 하나는 빌딩 20이다. 2차 세계대전 중 MIT에 급조된 임시 건물로, 전쟁이 끝나면 철거될 예정이었다. 복도에는 배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끌어다 새로 연결해 쓸 수 있었다. 건축가나 관리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아홉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그 허술한 건물에서 나왔다. 두 사례가 말하는 것은 같다. 완벽하지 않은 조건이 오히려 인간을 깨웠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읽고 있는 <계몽의 변증법>이 자꾸 겹쳐왔다. 인간이 효율과 체계화를 그토록 지향하게 된 것, 그 뿌리에 계몽이라는 사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몽은 인간을 미신과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획이었다. 자연을 지배하고, 세계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인간을 합리적 주체로 세우려 했다.


그 기획은 대체로 성공했다. 자연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고, 세상은 숫자와 계산으로 읽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 인간마저 기계의 부품처럼 숫자로 환원되었고,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였다는 감각을 잃었다. 계몽과 함께 시작된 효율성, 합리화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자연스럽게 혐오하고 멀리하게 만들었다.


AI의 등장으로 이제는 기계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 이 시대에, 기계처럼 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답일까. 팀 하포드는 그 반대편을 가리킨다. 기계가 할 수 없는 것, 혼돈 속에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실패를 딛고 다시 방향을 찾는 것. 그것이 오히려 인간만이 가진 힘이라고.


몇 해 전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왔다. 정원을 가꾸며 산다. 모종을 심고 기다리는 일, 제 멋대로 자라나는 초화류와 나무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계절을 견디는 일. 처음엔 그 통제할 수 없음이 낯설고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정원도 삶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계획보다 조금 더 크다. 그리고 그 어긋남 속에서 오히려 뭔가가 자란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흙과 자연을 곁에 두며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딱딱함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감각이다. "이 세상을 움직인 건 언제나 모호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과 껍질은 삐뚤 빼뚤 잘라도 된다. 정원은 계획대로 자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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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인생 수업 - 세기의 지성이 건네는 24가지 지혜
성기철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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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남긴 솔직한 리뷰입니다.


봄에 정원에 심을 꽃을 산다. 연보라색 프록스, 살구빛 버베나, 노랑 톱풀, 화이트 종이꽃. 내가 좋아하는 칼라 구성이다. 흙을 파내고 화분을 털어 꽃을 심는 일.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꽃들의 성질을 이해하는 일이다. 어떤 꽃은 물을 좋아하고 어떤 꽃은 적당히 필요로 하니, 매일 똑같이 물을 준다면 그 중 하나는 시들거리다 죽을 수 있다.


옆집과의 경계면에 새로 화단을 만들면서 심고 싶은 것들을 배려 없이 마구 심었다. 여기서 배려가 없다는 말은 식물에게 그랬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파니쿰이라는 그라스는 키 1.2m, 폭 60~90cm 정도다. 자라면서 차지할 면적을 계산해 여백을 두고 심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정보를 찾지 않고 욕심이 나는 대로 심었다. 파니쿰에 붙여서 오이풀도 심고 꼬리풀도 심고. 작은 정글을 만들고 말았다.


"러셀이 보기에 지식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고, 사랑이 없는 지식은 파괴적이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면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파니쿰이 차지할 폭을, 종이꽃이 싫어하는 과습을. 러셀은 이것을 사랑과 삶에도 적용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만큼 삶을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상식이라고 통용되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습관대로 살고,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지식 없는 사랑'이다. 꽃을 욕망으로만 심으면 화단은 망가진다. 삶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러셀의 삶과 사상을 다섯 개의 축으로 정리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지식을 탐하고, 자녀를 제대로 교육하고, 불행의 뿌리를 제거하고, 마침내 행복을 정복하는 것. 러셀의 언어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다섯 개의 축이 연인의 사랑에서 시작해 인류에 대한 연민으로 끝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자기만의 성이 아니었다. 타인에게로, 세계로 열린 채 나아가는 것.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러셀은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는 데서 찾았다.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행복의 출발점이었다.


러셀은 1차대전 반전 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반핵 시위로 다시 감옥에 갔다. 그때 그의 나이 89세였다. 영국 귀족 작위를 가졌으며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수많은 글을 써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그는 책상을 떠났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파괴적이라고 썼던 그 사람답게.


그의 자서전 서문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한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나는 그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볼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우리가 이 좋은 계절 책을 펼치는 이유도 그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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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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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옛날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는 이것이 아닐까. "네 이놈, 호적에서 파버리겠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안돼." 어마무시한 협박이다. 이쯤 되면 다음 전개는 후려치는 따귀를 한대 맞고 천륜을 끊든지, 혹은 부모의 뜻을 따르든지 둘 중 하나다. 하늘이 정했다는 천륜은 언제나 힘 있는 쪽의 언어였다.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맏이는 동생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강제의 언어다.


신도시 한가운데 낡은 모텔 용궁장에 불이 났다. 피해자는 네명. 노년의 치매질환자와 페암 말기 투병자, 삼십대 정신이상자와 오십대 부랑자. 그런데 장례식장에 곡소리가 없었다. 유가족들은 나눠 가질 보상금 생각에, 지옥 같은 관계에서 벗어났음에 미소 짓고 안도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천륜은 힘 있는 자가 아닌 힘없는 자에 의해 끊어져 나갔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것을 범죄라고 단정 지을지,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라고 봐야 할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소설은 피해자, 가해자, 설계자, 생존자, 조력자라는 다섯 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피해자의 고백’에서 화자는 칠십 년간 이어진 정서적·언어적 학대 끝에 노모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반면 ‘가해자의 고백’ 속 화자는 부친의 편애 속에 사랑과 지원을 독차지하면서도, 자신이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은 가해자라는 사실을 끝내 인지하지 못한다.


‘설계자’와 ‘생존자’, 그리고 ‘조력자’의 고백에 이르면 이 비극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된 설계였음이 드러난다. 소설은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폭력과 범죄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사건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공모에 가담한 이들을 향해 선뜻 비난의 돌을 던지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불’은 자신을 옥죄던 지옥을 태워버리고 얻어낸 유일한 생존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해졌다. 나는 이 부조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영원히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륜’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아름답게 포장해 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것은 서서히 숨을 조여오는 올가미일 뿐이다. 소설 속 '용궁장'의 비극은 천륜이라는 성역 뒤에 숨겨진 가족 이데올로기의 민낯을 처절하게 폭로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지적처럼, 가족은 "가장 강력하고 은밀하게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국가 장치"다. '가족', '천륜'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개인을 호명하는 순간, 국가는 비용을 아끼고 개인은 스스로를 옥죄며 자발적인 희생의 굴레로 걸어 들어간다.


압력이 셀수록 반작용 또한 거세질 수 밖에 없다.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사랑의 관계여야 할 가족은 서로를 할퀴는 지옥으로 변모함을 소설은 보여준다.


비록 소설의 설정이 극적이긴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종종 마주한다. 오랫동안 치매를 앓으셨던 외할머니의 장례식날, 평생 우애가 깊어 보였던 9남매의 갈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일을 계기로 견고해 보이던 가족의 유대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다.

그날 장지에서 오간 고성이 오랫동안 귓가에 남았다. 고인을 떠나보낸 자리에서 산 자들은 왜 그토록 서로를 할퀴었을까. 책을 덮고 그 질문 앞에 다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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