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을유세계문학전집 148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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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서평입니다.

"여기에 집이랑 사람 나무 자유롭게 그려봐."


대학원에서 미술심리를 공부하던 지인이 하얀 종이를 내민다. 나는 기꺼이 피실험자가 되기로 했다. 손이 가는 대로 쓱쓱 그렸다. 집, 나무, 사람 그리고 새 한 마리. 하늘 한가운데를 날아가는. 『전날 밤』을 읽다가 나는 그 새를 다시 떠올렸다. 지인이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새는 날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말을. 무엇을 향해 날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내 마음이 왜 이토록 무겁고 괴로울까? 왜 날아다니는 새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까? 새들과 함께 날고 싶다. 어디로 날아갈지는 모르지만, 다만 멀리, 여기서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다." (p128)


투르게네프가 이 소설을 발표한 1860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 작품이 발표된 바로 다음 해에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 이후 서구 열강에 대한 열등감과 변혁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러시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격렬히 논쟁했지만, 정작 무언가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은 드물었다. 열망은 뜨거웠으나 실천은 공허했다. 엘레나의 목마름은 그 시대의 목마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중반까지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청춘들의 연애소설로 읽혔다. 아름답고 총명하며 약한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는 엘레나.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예술가 슈빈, 지적이고 성실한 학생 베르세네프, 그리고 조국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강인한 인사로프.


삼각관계인 슈빈, 베르세네프, 엘레나는 인사로프의 등장으로 정리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논쟁에 빠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들에게는 '말'이 중요했다. 관념과 언어 속에서 겉도는 말들만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그러나 인사로프는 달랐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행동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뚜렷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그저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살아내는 자. 확고한 이상을 가진 인간은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과묵함이 오히려 엘레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귀족의 안락함과 미래를 버리고 인사로프와 함께 그의 과업을 이루려 러시아를 떠난다. 이 대목에서 그녀의 선택이 용감해 보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상을 찾기보다는 타인의 중력에 이끌려, 그가 내는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 인사로프가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을 앞두었을 때, 무언가가 변한다.


"사랑하는 부모님, 영원히 작별을 고합니다. 저를 다시는 보지 못하실 거예요. 어제 드미트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로서는 모든 게 끝났습니다. …… 이미 저에겐 D의 조국 외에 다른 조국은 없습니다. …… D가 죽은 후에도 저는 그의 기억과 그가 평생 추구한 대의에 충실할 겁니다. …… 저는 행복을 찾았고, 아마 죽음도 찾을 겁니다." (p271)


엘레나는 그의 옛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의 과업을 이어받기로 한다. 그 결심의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반사체가 아니다. 타인의 이상에 기대어 형태를 찾던 여성이, 그 이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스스로 빛을 내는 주체로 변모한다. 투르게네프는 이 각성을 소란스럽지 않게 그려낸다. 엘레나는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남는다. 불가리아로 향하는 배를 타고 그녀는 조용히 그 다음 날을 향해 나아간다.


러시아가 아닌 끝내 사랑하는 이의 땅으로 건너가 이방인이 되기로 한 그녀. 소설 초반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방향성 없음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소설의 제목 '전날 밤'은 무엇의 전날일까. 러시아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변혁의 전야이고, 개인에게 있어서는 삶의 방향을 선택하기 직전의 밤이다. 투르게네프는 인사로프라는 인물을 통해 강인한 행동력을 삶으로 증명하는 인간의 초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내가 인사로프라는 인물에게서 부러운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확고한 목적과 이상. 행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신과 별들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 가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이 시스템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까'라는 질문이 먼저다. 누구도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다. 다만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방향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 수도 있는 존재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해. 창 밖에 보슬비가 내린다. 마당 위로 박새 한 쌍이 비를 맞으며 날아간다.

- 오마이 뉴스 '책동네'에도 서평이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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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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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강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마다 벚꽃 사진이 넘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눈길을 보낼 때, 벚나무는 꽃이 피는 동안 귀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길가에 흔하게 피는 애기똥풀은 어떨까. 누군가 멈춰서 그 작은 꽃을 감탄하며 들여다볼 때, 애기똥풀도 벚꽃 못지않게 귀한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가 귀해지는 것은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눈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프레드릭 배크만의 『나의 친구들』에는 그런 눈빛이 결핍된 아이들이 있다. 어느 바닷가 마을, 부모의 폭력과 무관심과 따돌림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으로, 서로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간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요아르, 부모로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자란 화가, 암 투병 중인 아버지로 인해 숨죽여 지내는 테드, 잦은 이사 중에 아버지의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하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고통을 삼키던 소녀 알리.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네 아이들은 바닷가 잔교와 테드의 지하실방에서 서로의 상처를 아파하고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열네 살의 여름을 요아르도 화가도 버텨낼 자신이 없다. 요아르는 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고, 화가는 약통에 약을 모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은 신문에서 미술 공모전 소식을 발견한다. 부서지기 쉬운 화가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은 그에게 작품을 내라고 설득한다. 요아르는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팔아 물감과 재료를 마련해준다.


"요아르는 이렇게 속삭이면 되는 줄 몰랐다. 젠장, 아무거나 그리기만 하면 돼. 안그러면 널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래. "


늘 남의 것을 훔쳐 타던 요아르에게 그 자전거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었다. 그걸 아낌없이 팔아버린 것이다.


25년 뒤 화가는 친구들의 바람대로 세계적인 거장이 된다. 열네 살에 그린 「바다의 초상」은 경매장에서 최고가로 낙찰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화가는 전 재산을 털어 그 그림을 되찾고, 경매장 하얀 벽에 낙서를 하던 소녀 루이사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화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눈빛이 있었다. 미술관 침입으로 경찰서에 끌려갈뻔한 아이들을 보증해준 크리스티앙의 어머니. 마약으로 아들을 잃은 그녀는 화가에게서 죽은 아들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를 예술학교에 추천한다. 그녀가 화가에게 건넨 것은 기회가 아니라 시선이었다. 이 소설에서 시선은 일방적이거나 단절되지 않는다. 물처럼 흘러 다음 사람에게 가 닿는다.


훗날 화가는 경매장 뒷벽에 낙서하는 루이사를 발견하며 그 시선을 돌려준다. 값비싼 그림이 아니라 루이사 자체가 그의 유산이라는 그의 말은 이 소설 전체의 논리를 압축한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 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 그를 처음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하지만, 한 소년을 저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어떤 이의 믿음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다.”


화가가 빛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 깨달았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전거를 기꺼이 팔아 치운 친구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이 빛날 수 있는 힘은 내면에서만 솟구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믿어주고 응원하는 타인의 사랑과 지지라는 연료가 더해질 때 비로소 환하게 타오른다.


결국 화가의 친구들과 화가에게서 시작된 이 다정한 시선은 루이사를 거쳐, 다시 어느 길가 벽에 낙서하는 이름 모를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500페이지가 넘는 꽤나 두꺼운 이야기는 상처받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누군가에게 ‘처마’가 되어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벚꽃처럼 화려하게 주목 받지 못해도, 길가에 핀 애기똥풀 같은 존재를 서로 들여다봐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듯 그렇게 바라봐줄 때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날아갈 힘을 얻는다.


강변의 벚꽃은 곧 지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귀한 존재가 된 애기똥풀은 언제까지나 예쁘게 빛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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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
마쓰바라 하지메 지음, 정한뉘 옮김 / 나무의마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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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도시에 살 때 까마귀는 보기 힘든 새였다. 몇 년 전 전원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까마귀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정해진 날 집 앞 벚나무 아래에 쓰레기를 내놓으면 수거해 가는데, 문제는 그사이에 까마귀가 귀신같이 알고 날아와 봉투를 헤집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새 봉투에 다시 담으며 까마귀를 원망하기도 했다.


시골 길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도로 한가운데 까마귀들이 모여 로드킬 당한 사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같은 장르에서 왜 까마귀를 죽음의 전조나 불길함의 상징으로 그토록 자주 소환하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까마귀 덕후' 마쓰바라 교수는 이처럼 미움과 혐오의 대상인 까마귀를 위해 여러 권의 책을 펴냈지만, 세간의 인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싫다면 차라리 없애보자'는 생각으로 『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을 집필한 것이다.


까마귀가 없는 세상을 채울 새는 어떤 새일까. 콘도르, 솔개, 카라카라, 찌르레기, 바다직박구리… 수많은 후보가 등장하지만, 까마귀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울 수 있는 새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청소동물로서의 역할, 종자를 퍼뜨리는 역할, 수역과 육역을 잇는 물질 순환까지. 까마귀는 그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흔들리는 생태계의 '키스톤'이었다. 미워하고 쫓아내고 싶었던 그 새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게 된다.


나는 이사 온 지 몇 주 만에 까마귀와의 신경전을 포기했다. 번거롭더라도 쓰레기 수거장에 직접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나에게 까마귀는 해조도 익조도 아닌 그저 '까마귀'가 되었다. 산책을 하다 마주치는 까마귀를 관찰하다 보니 의외로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가끔은 전깃줄 위에 앉은 까마귀 소리를 흉내 내 보기도 한다. 까마귀가 '악악' 울면 나도 '악악' 하고 받아친다.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래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날아가 버린다. 올블랙에 덩치도 크지만 보기보다 까마귀는 겁이 많다. 동네 깡패 까치에게 밀려 도망 다니는 장면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물론 번식기에 예민해지는 것만 조심한다면 꽤 흥미로운 이웃이다.


그렇게 전깃줄 위의 까마귀와 실없는 대화를 시도하고 편견 없이 관찰하다 보니, 마쓰바라 교수가 왜 그토록 까마귀를 사랑하는 '덕후'가 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좋고 싫음, 선과 악이라는 편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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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심리학이 말했다 -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하는 자존감 수업
슈테파니 슈탈 지음, 김시형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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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때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막연히 내 자존감이 높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회사 생활이 그 착각을 깨줬다. 친절하게도. 내가 믿어온 자존감은 사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존심에 불과했음을. 그리고 생각보다 나의 자존감은 훨씬 더 취약했다는 사실을.


슈테파니 슈탈은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에 자존감 결핍이 있다고 단언한다. 불안, 공포, 강박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자존감은 이 모든 현상을 결정짓는 마음의 '근본 축'이다. 축이 휘어지면 삶의 모든 궤적이 어긋나듯, 자존감을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도 우리를 온전히 지켜줄 수 없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약점을 포함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부족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는다. 약점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에 타인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불안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쓴 채 세상을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니 늘 불안이 앞서고, 그 불안을 메우고자 다시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열심히 해내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열심히 산다'고 믿었던 모습 뒤에, 사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처절한 분투가 숨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내면아이, 내적 통제신념, 나르시시즘 등 심리학적 개념으로 우리 마음의 지도를 그려낸다. 그 분석의 끝은 결국 자기수용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불안해하는 자신을 다시 자책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제 자신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유년기의 절망적인 경험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난 왜 이 모양일까" 채찍질하는 대신, "그래, 내가 지금 이렇구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다정하게 품어주어야 한다고.


다만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가 자존감 결핍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인간의 심리는 때로 생물학적 요인이나 환경적 제약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회 구조가 주는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자존감은 내 마음의 불필요한 소음을 끄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가장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당신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향한 다정함이 쌓일 때, 삶은 그때서야 내 편이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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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기, 소유되기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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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찹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올해 우리 집에 상전이 한 분 생겼다. 무려 ‘고3 수험생’이다. 내내 방문을 닫고 있으니 정확히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코피 터지게 열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아이의 눈밑엔 벌써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았다. 나의 눈빛은 의심과 불안 속에 흔들린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진로 상담지를 앞에 두고 내뱉은 한마디는 꽤 낭만적이었다. “엄마, 나 작가 해볼까?”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자본주의적 회계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됐다. 작가라는 근사한 단어 뒤로 낮은 등단 확률과 빠듯한 인세 같은 현실적인 계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에둘러 내뱉은 말은 이랬다. “음... 진로 두 개는 마련해야겠는데?”


이런 나의 '회계적 본능'은 저자 율라 비스가 페인트 한 통을 고르며 하는 고민과 꼭 닮아 있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가격의 페인트 브랜드를 발견한 참이다. 물론 사려면 살 수도 있다.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페인트 같은 물건을 어떻게든 구입한다는 것은 보통 경제적 능력이 아니라 가치를 선언하는 일이다."


비싼 페인트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선언하려는 그녀의 욕망이나, 아이의 꿈에 안정성이라는 안전장치를 달아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길 바라는 나의 염려나, 결국 그 뿌리는 같았다. 이 책 《소유하기, 소유되기》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동시에 사회에서 더 잘 팔리는 가치 있어 보이는 '상품'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사실 말이다. 페인트 한 통으로 자신의 품격을 증명하려는 저자나, 아이의 꿈조차 '유용함'으로 계산해버리는 나나,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 시스템에 무의식까지 저당 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자크 라캉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현대인의 무의식은 이미 자본주의라는 문법으로 빼곡하게 짜여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의 낭만적인 고백 앞에서 ‘작가’라는 행위 대신 ‘인세’라는 숫자를 먼저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내 무의식의 언어가 효율과 유용이라는 문법에 깊이 길들여졌다는 서글픈 증거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이것이었다.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그녀에게, 건축학을 전공하고 운전대를 잡은 택시기사가 묻는다. 저자가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학생들에게 그 일로는 생활비를 벌 수 없는 일을 가르쳐서 먹고사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


한마디로 당장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학문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 기사의 이 질문은 내 머릿속 ‘회계 시스템’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아이에게 작가라는 꿈 대신 ‘진로 두 개’를 운운했던 나의 논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질문에 피하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제가 학생들에게 해주는 일은 사람들이 대체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타인에게 뭔가 가치 없는 일을 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건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저자가 말하는 이 선물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용함’일 것이다. 효율과 유용함의 세계에서 무용함을 쫓아 살아도 좋다고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하지만 율라 비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녀가 가르치는 '글쓰기'가 당장 시장에서 수익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이를 설파할 수 있는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위신이 높은 엘리트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 덕분임을 정직하게 응시한다.


아이의 첫 번째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나에게는 자꾸만 갑갑한 마음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이상은 더 높은 곳을, 시선은 이 너머의 가치 있는 것들을 향해 살라고 호기롭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의 중력은 그리 가볍지 않다.


결국 《소유하기, 소유되기》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으로 계급을 가르는가, 우리는 왜 일하는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이 책은 무용함과 유용함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아이의 방문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내 머릿속 회계 시스템의 전원을 잠시 꺼보기로 했다. 현실의 중력이 무거워 아이의 첫 번째 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엔 여전히 망설임과 회의적인 마음이 앞선다.


아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꿈이 많이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전공이 무엇이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작가'라는 명사를 소유하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글을 쓰는 즐거운 행위 그 자체를 응원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소유하기보다 존재하기를.

유일무이한 너로, 그저 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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