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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향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이 '고향'은
등본상의 주소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가 조화롭게 맞닿아 있던 상태, 세계가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건네주던 시대를 가리킨다.
고대의 인간은 그 질서 속에 있었다. 신과
공동체, 전통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분명했다. 신이
살아 있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비추는 별들이 있었다. 그
별빛 아래에서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그는 신들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공동체가 간직해야 할 지혜를 노래했다. 이야기꾼은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고 삶의 의미를 건네는 매개자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밤이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곶감을 훔쳐 먹는 호랑이를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던 순간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교훈과 가치를 담고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 마음,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질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태도.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계의 결을 미리 배웠다.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며 이 질서는 급격히 무너졌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가 오랫동안 공유하던 가치와 서사의 종말을 의미했다.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은
더 이상 하나의 서사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고립된 개인이 이야기 대신 소비하는 것이 소설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은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야기는 공동체의
경험에서 우러나와, 구전을 통해 세대를 거쳐 천천히 숙성된 지혜다. 반면
소설은 고립된 개인이 홀로 쓰고 홀로 읽는 장르다. 소설가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세계와 단절된 채
글을 쓰고, 독자 역시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그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은 파편화된 삶 속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미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아무리
뛰어난 소설이라 해도 공동체를 하나로 묶던 옛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을 읽으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사회 20대 남성들의 극우화 현상. 그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이야기의 상실'이 아닐까. 아렌트는 "고립된
개인은 전체주의가 가장 쉽게 파고드는 존재"라고 말했다. 개인이
낱낱이 흩어지면 타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연대가 불가능해지고,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으로 쉽게 조종된다.
극우적 서사는 바로 이 틈새에서 힘을 얻는다. 흩어진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설명해주고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감각을 줄 명확한 이야기를 갈구한다. 극우 서사는
세계를 흑백으로 나누고,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단순하고 강렬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차별과 혐오는 즉각적인 우월감을
주고, 혼란스러운 현실에 왜곡된 질서를 부여한다.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상실'은 이런 취약성과 맞닿아 있다. 공동체의 지혜와 오랜 시간이 축적된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 그곳에 분노와 적대의 언어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이다. 느리지만 깊이 있는,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그런 이야기.
그것이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가 별빛 없는 시대에 다시 찾아야 할 작은 빛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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