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의 책을 산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인데 '불한당의 세계사' 이후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사실 '불한당의 세계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지 잘 몰라서 공부 좀 하고 읽으려던 것이 이렇게 왕창 늘어져 버린 것. -_-...

 

저자는 16살 때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를 위해 책을 읽어주곤 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를 회고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보통 안내서나 2차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보르헤스는 왠지 그렇게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

어쨌거나 내겐 이 책이 꽤 도움이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칠일 밤'을 읽고나서 다시 보르헤스를 잡아볼 생각이다.

 

내가 보르헤스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우선 '지적인 소설'에 그리 익숙치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근거 없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는 '흠. 그래도 꽤나 멋있는 보수주의자인걸'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아파트 책꽂이에서 보이지 않는 건 그가 쓴 책들이었다. 누가 와서 이런저런 책의 초판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확실히 잊어도 그만인" 이름이 찍힌 책은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한번은 내가 있는데 우체부가 커다란 소포를 가져왔다. 그 소포에는 이탈리아의 프랑코 마리아 리치가 호화롭게 만들어 보낸 '의회 El Congreso'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양장본에 케이스까지 검은 비단으로 싼 다음 금박으로 글씨를 입혔고, 수제작한 푸른색 브리아노 지(紙)에 인쇄를 하고 삽화도 전부 수작업으로 간지를 끼워넣었으며(탄트라 경전의 그림을 책의 삽화로 썼다), 책마다 일련번호를 매겼다. 보르헤스는 내게 책의 모양세를 묘사해달라고 했다. 유심히 듣던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책이 아니야! 초콜릿 상자지!"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우체부에게 그 책을 선물로 줘버렸다.

 

  "나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과 정반대야."

  그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믿지만 관심은 없지. 그런데 나는 관심은 있는데 믿지는 않거든."

 

거장으로 불리는 한 작가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는 자랑할만한(?) 경험에도, 이 책의 저자는 칭찬만을 늘어놓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이 읽을만하다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책 뒷부분에는 보르헤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 짧은 글과 함께 그의 어록이 실려 있다. 이것도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

마치 사전처럼 ㄱ~ㅎ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광고 : 우리는 아주 순진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지만, 그 물건이 우수하다는 말은 바로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진함의 대표적인 증거이다.

 

여튼 분량도 굉장히 적기 때문에 가볍게 읽고서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을 조금 좁힐 수 있었던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그것을 보는 이의 감정이 실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 뒷모습에도 앞모습 못지 않은 것들이 드러난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내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었다.

(그런거 보면 내가 참 따뜻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겁이 많은 인간이던지.)

 

등은 거짓이 없다라는 화두에서 시작하는 투르니에의 포토 에세이.

한 장의 사진에서 저렇게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것에 감탄을 하면서 읽게 된다.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 우정은 이 두 장의 사진에서처럼 타인들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에 의해서 그 본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낸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가 휘두르는

가장 잔인한 폭거. 나는 나를 위해 세수하고

옷을 차려입지만 머리는 너를 위해 매만진다.

그와 반대로 스님과 병사와 죄수의

까까머리는 비인간적인 규율의 질서를 위해 타자와의 자연스럽고 사회적인

관계의 단절을 나타낸다.

 

뒷모습은 정직하며, 골똘하다는 역자 김화영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모습을 볼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고는 하는데, 등을 밀기 위해 아버지의 등을 대면하는 순간이 조금씩 서글퍼진다.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 뒷모습은 어떠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딴지일보의 총수 김어준. 아마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3학년 때던가. 그때부터 딴지일보가 무지 유행했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딴지일보 사이트에 들어가본 적도 없고, 글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다.

기본적으로 '졸라', '씨바'와 같은 문체가 나랑 맞질 않아서 그랬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요즘엔 한겨레 esc에서 인생상담(?)을 연재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몇몇 글은 읽어도 봤다.

그래도 예전의 선입견이 강해서인지 '뭐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_- 도서관에 간 김에 이 책도 빌려왔다.

역시나 그의 글은 따꼼따꼼하다. 좀 많이.

 

'장애우란 신조어를 보자. '장애자'나 '장애인'이란 호칭엔 비하의 뉘앙스가 있다며 몇 년 전부터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홀대해왔다는 죄책감을 담고 있다. 애초 선의에서 출발한 게다. 그러나 이 호칭은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만다.

  이 호칭은 장애인을 스스로 주체가 아니라 비장애인의 친구로서, 그러니까 상대적 객체로서만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장애우'는 장애인 스스로는 쓸 수가 없는 말이다.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비장애인의 친구다', 라고 말하는 거니까. 게다가 장애인들더러 모든 비장애인들이 나서서 당신 친구가 되어주는 걸 바랄 거라 여기는 건가. 그들은 불쌍한 존재니까? 이런 단어를 만든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신체 기능 일부가 고장 났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친구가 정말 되고 싶은가? 이 무슨 시건방진 은혜인가?

 

분명, 그의 어조는 강하다. 하지만 '장애우란 말, 좀 생각해 봐야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저분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느낌이예요'

라는 말투로는 이 글을 읽고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전혀.

물론 이건 나만의 지론이지만, 글은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내용이 충실할 때, 그 좋은 표현이 그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다.

(이런 의미로 나는, 김훈의 '멋진 글'이 결코 좋은 글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에 '문학'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문학을 모독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경우에 처해서 상담을 요청하는데 딴지총수의 답변들은 이러하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친과 헤어져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 질문, 남에게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이렇게 바꿔,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기꺼이 감당할 만한 가치가, 그 남친에게 과연 있는 건가. 그 남친은 경제적 불안을 감수할 만한 행복을 내게 주고 있는 건가. 그 남친과 함께라면 삶의 불확실성을 함께 맞서겠단 결의가 생기는가. 그러니까 그는, 그 양복인가.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렇게 스스로 따져볼 당신만의 5분인 게다.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면, 결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결혼보다 급한 건, 세계관이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뉴턴은 이걸 작용-반작용이라고 했다. 근데 이 말 가만 뒤집어보면, 비용 지불한 건, 온전히, 자기 거란 소리다. 이 대목이 포인트다. 공짜가 아니었잖아.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존재할 수 없어야, 종교가 산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간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 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일수록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게 실제 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질문은 나에게 하지 말고 당신에게 하라. 당신이 지금 더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잃기 싫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원하는 것을 택할 용기는 있는가. 고로, 나는 누구인가?

당신을  알게 되었다면, 당신을 존중하라. 물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고. 또 물론,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요즘 '루저'니 뭐니 소란스러운데, 듣다보면 아주 짜증이 난다. 그래서 관련 기사도 보지 않고 그냥 치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키가 180 안되는 사람일 뿐인가? 그거 없으면 미치도록 화날, 그런 인간 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게 따지면, 당신이 수없이 마음 속으로(혹은 대놓고) 매긴 외모 기준의 점수는 어떻게 할텐가?

왜 '당신 같은 여자 나도 싫거등요~!!'라고 해버리지 못하는가? 공중파? 풋. 당신도 나가서 말하라. 왜 못하는가?

왜 당신이 할 땐 쿨하고, 왜 남이 할 땐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정말 내가 볼 땐 요새말로 '열등감 쩐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그리고 그 열등감의 기저엔, 딴지총수도 강조하는 자존감의 결핍(자존심이 아니다!)이 자리잡고 있다.

남의 일에 신경 좀 그만 써라. 제발 좀.

아, 사회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열폭하는 거라고? 웃기시네. 당신이 언제부터 정의의 사도였다고. 사회에 분노할 일이 그렇게나 없던가?

인터넷에 검색해서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찬찬히 읽어보라.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작은가?

 

어쨌거나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이 상담집을 읽다보면 나도 함께 욕먹고 두드려 맞는 기분인데, 이상하게 '건투를 빈다'로 느껴진다.

아주 금방 읽을 수 있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물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이 항상 총수와 같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건 확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공산당 선언’의 허탈함 - 냉철한 현실인식인가, 순진한 낭만주의인가? -

Part 1. 의의

 

  우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보르헤스의 환상을 또 다시 인용해본다. 이 책을 다 읽는 순간, 이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제국의 지도제작술은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의 지도는 도시만큼 컸고, 제국의 지도는 주만큼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도들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지도제작자들은 제국만큼 크고 한 점 한 점이 그대로 일치하는 제국의 지도를 만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중)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성’에 대한 재성찰을 이 책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현재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은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이 책에서 ‘계몽주의’나 ‘근대성’은 두 가지 전통에 기반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근대성을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개의 뚜렷하고 갈등하는 전통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전통은 둔스 스코투스에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내재성의 장소를 발견하고 특이성 및 차이를 찬양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혁명이 주도한 전통이다. 두 번째 전통은 르네상스 혁명의 테르미도르로, 이원론의 구축과 매개를 통해 첫 번째 전통의 이상주의적인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며, 마침내는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근대 주권 개념에 도달한다.(196쪽)

 

  이렇게 근대성은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이 아님에도, 기존의 비판은 두 번째 전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차이’에 관대함을 보이는 ‘제국’ 앞에서 수많은 체제 비판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과 근대 반인종주의 이론은 실제로 아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점에서 그 둘을 구별하기 어렵다. 사실상 바로 이 상대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인 주장이 필연적으로 반인종주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의 전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은 전혀 인종주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259쪽)

 

하지만 근대성의 양면성을 파악한다면 이런 표면적인 모순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차이의 존중’과 ‘차이의 공고화’는 분명 다른 것이지만, 그 외연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국적 인종주의는 본질적으로 ‘위계 이론이 아닌 차별 이론(260쪽)’이며 제국은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한다. 그리고 그 포섭에는 ‘무시’의 전략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현재 우리사회, 아니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패턴과도 일치한다.

 

제국은 타자들을 밀어내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들을 강력한 소용돌이와 같은 자신의 평화스런 질서 안으로 끌어당긴다. …… 사법적 관점에서 차이는 무시됨에 틀림없는 반면, 문화적 관점에서 차이는 찬양받는다.(267쪽)

 

이런 차이의 포섭은 ‘각각의 노동인구 안에서 언어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들’을 ‘노동자 조직과 싸우는 무기로서 사용(268쪽)’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은 ‘차이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들을 긍정하고 그것들을 유효한 명령 장치 속에 배열(269쪽)’한다.


  이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와 ‘제국’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월러스틴을 비롯한 세계체제론자들, 그 외에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그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반면,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주의와의 단절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하고 새로운 ‘구성적 사법체계’인 ‘제국’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통의 적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본질적인 정치적 과제(96쪽)’인데, 저자들은 기존의 탈근대주의적/탈식민주의적 전략이 이미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음을 지적한다(여기에는 ‘탈근대주의적 차이의 정치’도 포함된다). 즉, 이미 ‘적’은 다른 차원에 가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권력 패러다임, 즉 탈근대적 주권이 이러한 이론가들이 환영하는 잡종적이고 파편적인 주체성들의 미분적인 위계를 통해 근대적 패러다임 및 지배를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에 근대 주권 형태들은 더 이상 쟁점일 수 없으며, 해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탈근대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전략들은 새로운 지배 전략들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 지배 전략들과 일치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지배 전략들을 부지불식간에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인식을 근거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NGO들 조차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제국의 도덕적 개입의 최전선에 있는 힘이 되어왔다(71쪽)’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도 제국의 신민으로 복무하고 만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저항하고 또 대안을 만들어나간다고 주장하지만 탈근대주의적 전략은 결국 제국의 하부구조를 떠받칠 뿐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선 제국의 권력은 특정한 ‘장place’에 고립되지 않는다. 제국은 ‘매끄러운 공간’, ‘우-토피아, 즉 사실상 무장소non-place’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생성의 그 출발부터 ‘부패’한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결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이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역사적 방법일지라도, 제국주의는 또한 자본주의를 빨리 끝내는 확실한 수단이다.(431쪽)”


  때문에 ‘권력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257쪽)’. 그리고 권력의 중심, 제국의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푸코(혹은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저항논리도 그와 비슷한 것이다.

 

오늘날 투사는 대표자인 체도 심지어 피착취자의 근본적인 인간적 욕구의 대표자인 체 조차도 할 수 없다. 반대로 오늘날 혁명적인 정치적 전투성은 항상 자신의 적합한 형식이었던 것, 즉 대의적인 활동이 아닌 구성적인 활동을 재발견해야만 한다.(520쪽)

 

제국의 권력은 곳곳에 생체적으로 침투하여 있기 때문에 저항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적어도 자체논리 속에서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제국에 대한 저항의 핵심은 ‘다중’이다(이 책에서는 ‘multitude’를 ‘대중’으로 번역했지만, ‘다중’이 더 맥락을 살리는 번역인 듯하다). 왜냐고? 제국은 다중을 그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중이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할 때, 혁명은 완수된다. 이것은 오히려 강점을 공략해야한다는 저자들의 기본 전략과 일치한다.

 

실제로는 우리의 욕망과 노동이 제국을 끊임없이 재생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의 주인다.(492쪽)


Part 2. 의문

 

  이런 문제제기는 분명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한계나 모순이 결코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① NGO의 활동이 역효과를 낸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친 ‘상대주의’의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현재의 체계에서 어디까지가 개입이고 어디까지가 자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각종 ‘국지전’을 뚜렷한 대안 없이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가?

 

② 제국을 하나의 사법질서로 보고 있는데, 과연 이것을 ‘질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그리고 그 사법질서가 사실상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제국주의와 비교할 때 이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만큼 새롭다고 할 수 있는가? 옮긴이의 지적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적 요소의 잔재물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

 

③ ‘전 지구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81쪽)’은 분명 경청할만 하다. 하지만 반대로 ‘국제적’이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저항은 얼마나 현실 가능성이 있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의 양상을 보면 ‘인터내셔날’에 대한 낭만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근대적인 ‘대의’ 없이, 무엇을 중심으로 다중이 결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그들의 외침과는 달리, 이 책을 덮는 순간 적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은 왜일까?

 

④ ‘도주하는 야만인’들이 과연 ‘다중’인가? 저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이 저항의 실천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도주 혹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주 혹은 탈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동’ 그 자체가 얼마나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이동한 그들은 또 다시 착취되는 노동력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한 장소에 계속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권리(506쪽)’에 대한 강조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Part 3. 뱀발

 

꽤나 어려운 책으로 올해의 스타트를 끊었다. 읽는데 왜 그리 힘들던지. 솔직히 읽고나서 제대로 이해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_-

어쨌거나 읽었다는데 의의를 둔다. 본문만 치면 5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인데, 10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을 읽은 압박이;;

지루하고도 이해가 어려운 1장을 겨우겨우 넘기고서 2장을 흥미롭게 읽고, 결론을 기대하는 찰나 3장과 4장에서 허무에 빠졌다.

'배부른 소리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사실 네그리의 삶을 놓고 볼 때 결코 '배부른 소리'할 사람은 아니고.

(그는 2003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였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현재 영문판은 저작권을 파기하여 파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시대가 그래서 그런가.(응?) 네그리의 다중도, 푸코도, 들뢰즈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다 배부른 소리 같다.

젠장.

 

어쨌거나 네그리를 오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_-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공저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단 두 권의 얇은 만화책을 쓰기 위해 투자된 시간 15년.

이건 분명 의아한 일이지만 책장을 넘겨갈 수록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치 대학살'에 관한 만화다.

이 소재를 다룬 것은 책 뿐만 아니라 영화, 다큐 등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물론 단순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지만) 대학살에 대한 내용을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 생존자가 바로 작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는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생존해서 지금 자신의 앞에서 증언을 하고 있는 현재의 아버지까지 적나라할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자신의 모습 또한 빼놓지 않고.

 

좁히기가 너무 어려웠던 아버지와의 거리를 별다른 포장없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정작 자신이 대표적인 인종차별의 피해자이면서 흑인을 차별시하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거부감과 또 그 반대에 존재하는 죄책감, 연민.

이런 상황들 속에서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면서 이 책을 그려냈을지, 그래서 15년이 넘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권 중에 작가 스스로가 하고 있는 말처럼.

 

내 칠흙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게 얼토당토 않게 여겨지는 때도 많아. 그것도 만화로 말야! 내가 소화해 낼 수 없는 정도인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어쩐지 다 잊어버려야 할 것 같아. 내가 결코 이해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 같아. 내 말은, 현실이 만화로 하기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지... 너무 많은 게 누락되고 왜곡되는 거지.

 

그냥 솔직하게만 그려요, 여보.

 

내 말은 말이야... 실제 삶에선 내가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도록 당신이 날 내버려 둘 수 없을 거라는 거야.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 오래 '읽어 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만화책은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마지막 마무리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아. 그리고 이제 28쇄를 넘어선 이 책. 책 나온지 10년이 넘었는데 표지 디자인 좀 바꿔주면 안되려나;; 아니면 글자 폰트라도 -_-;;

(물론 원작의 표지대로 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저건 좀 --;;)

 

어쨌거나 읽기도 쉬우니 주변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할만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