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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의 책을 산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인데 '불한당의 세계사' 이후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사실 '불한당의 세계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지 잘 몰라서 공부 좀 하고 읽으려던 것이 이렇게 왕창 늘어져 버린 것. -_-...
저자는 16살 때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를 위해 책을 읽어주곤 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를 회고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보통 안내서나 2차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보르헤스는 왠지 그렇게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
어쨌거나 내겐 이 책이 꽤 도움이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칠일 밤'을 읽고나서 다시 보르헤스를 잡아볼 생각이다.
내가 보르헤스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우선 '지적인 소설'에 그리 익숙치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근거 없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는 '흠. 그래도 꽤나 멋있는 보수주의자인걸'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아파트 책꽂이에서 보이지 않는 건 그가 쓴 책들이었다. 누가 와서 이런저런 책의 초판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확실히 잊어도 그만인" 이름이 찍힌 책은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한번은 내가 있는데 우체부가 커다란 소포를 가져왔다. 그 소포에는 이탈리아의 프랑코 마리아 리치가 호화롭게 만들어 보낸 '의회 El Congreso'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양장본에 케이스까지 검은 비단으로 싼 다음 금박으로 글씨를 입혔고, 수제작한 푸른색 브리아노 지(紙)에 인쇄를 하고 삽화도 전부 수작업으로 간지를 끼워넣었으며(탄트라 경전의 그림을 책의 삽화로 썼다), 책마다 일련번호를 매겼다. 보르헤스는 내게 책의 모양세를 묘사해달라고 했다. 유심히 듣던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책이 아니야! 초콜릿 상자지!"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우체부에게 그 책을 선물로 줘버렸다.
"나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과 정반대야."
그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믿지만 관심은 없지. 그런데 나는 관심은 있는데 믿지는 않거든."
거장으로 불리는 한 작가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는 자랑할만한(?) 경험에도, 이 책의 저자는 칭찬만을 늘어놓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이 읽을만하다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책 뒷부분에는 보르헤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 짧은 글과 함께 그의 어록이 실려 있다. 이것도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
마치 사전처럼 ㄱ~ㅎ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광고 : 우리는 아주 순진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지만, 그 물건이 우수하다는 말은 바로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진함의 대표적인 증거이다.
여튼 분량도 굉장히 적기 때문에 가볍게 읽고서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을 조금 좁힐 수 있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