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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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A4 한 장 정도의 글을 쓰는 것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아니, 어려운 일을 넘어서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지만, 글쓰기 또한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과 ‘훈련’이 주로 정규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혹은 그렇게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와 ‘글쓰기’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느껴진다. 그 거리감은 노동자를 바라보는 먹물들의 시선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노동자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 노동자, 아니 우리 모두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있다.

 

현대사 연구에 있어 ‘구술사’라는 연구방법이 유행이다. 물론 유행(?)에 걸맞은 성과물이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주목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기록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구술사는, 현대사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술사는 오히려 문자화된 역사보다 영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영상에 직접 담겨 우리에게 보여질 때, 그것은 제3자의 펜으로 기록된 것보다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제3자의 시선이므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구술로 증언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논리와 플롯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장 먹물티 나는 ‘글쓰기’야 말로 어찌 보면 가장 손쉬운 목소리내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놓고 생각해보자. 버스기사였던 저자 안건모의 ‘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버스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버스기사가 어떤 근로조건 하에서 일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지 모른다. 택시를 타면 가끔 운전하면서 여러 가지로 툴툴대시는 기사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 책의 글 또한 그렇게 다가올 수 있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라. 버스기사들의 생활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글들은 우리가 종종 듣곤 하는 불평불만의 수준을 이미 뛰어 넘고 있다. 왜? 저자 안건모가 투철한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전사라서?

 

나 자신도 먹물이기 때문에 가지는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이게 바로 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생한 목소리로 현장의 불평을 들을 때는 시큰둥했던 것이, 글을 통해 한 가지 소재로 집중하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괜시리 버스기사와 버스회사에 대해 무엇인가 많은 것을 아는 듯한 이상한 ‘의기양양함’마저 생길지도 모르겠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저자가 처음 책을 접했던 순간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 책은 나를 어둠에서 처음으로 끌어내고,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294쪽)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현장 노동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도 이 책을 접하게 되면서 세상의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버스 파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평생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버스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위장취업을 해가며 투쟁하고 연대하던 그 시대는 이미 추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 19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다르다. 사회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고 노동현장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다른 이들이 목소리를 들어야하고 또 나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왜?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꼴’이라 하는가. 정작 싸움 붙인 사람들은 뒤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누구인가. 시내버스 사업주와 정부가 싸움을 붙인 장본인이다. 결국 피해자는 시민과 운전사들이다. (25쪽)

 

재벌과 언론들은 ‘1달러 모으기 운동’, ‘금 모으기 운동’으로 우리 서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런 운동은 나라 경제가 이 꼴이 된 게 우리 탓인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76쪽)

 

어느덧 ‘지난 일’이 되어버린 용산참사를 기억하는가?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 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모르게 잔인한 격투기의 링 위에 올라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링 위에. 하지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결코 ‘강자’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여기 이 ‘링의 법칙’이다.

 



혁명이 되거나, 착취가 아닌, 수탈 구조가 돼요. …(중략)… 정상적인 계급 구조와는 좀 달라요. 전통적인 구조는 위에 있는 놈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일을 시키고 임금을 안 주는 건데, 여기는 일도 안시키려고 해요. “놀아”. 착취를 할 게 없잖아요. 비정규직이라도 해야 뭘 착취당할 거 아니예요. 죽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요. 사실 지배, 피지배 구조만 되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을 텐데. ‘열심히 일해라’가 아니고, ‘열심히 공부하고 싫으면 놀아라.’ 그러면 사람들은 ‘아, 내가 놀아서 계속 놀게 된 거구나’ 생각하게 되겠죠. (《작은책》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신자유주의가 어디까지 갈까 - 우석훈 강의’)

 

위에서 억압하는 자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현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싸운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과 싸운다. 손님은 버스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멱살을 잡는다. 기사는 니가 뭔데 막말이냐며 욕을 내뱉는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싸워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과연 나와 당신에게만 있는 것일까? 안건모의 말대로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내가 기사들한테 왜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우리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냐고 하면 대개 이런다.

“건모 형은 나이가 많고 고참이잖아. 나 같은 쫄따구랑 어떻게 같아?” “안건모 씨는 그래도 집이 안정돼 있잖아.” “건모는 아는 게 많잖아.”

…(중략)…

하지만 노동조합이 힘이 있다는 것은 조합원들 하나하나가 그런 권리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는 회사에 찍힐까 봐 뒤로 빠지고 지부장한테 다 미뤄 버리면 지부장은 어쩌란 말인가. 이를테면 연 ․ 월차휴가를 회사가 안 받아 주면 “우리 노동자들 권리인데 왜 안 받아 주는 거야?”하고 싸워야지 회사한테 네! 알았어요. 하고 나온 뒤 “씨발, 노동조합이 약해서 그래!”하면 장땡인가?

나는 내 권리를 노동조합이나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고참이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웠고, 지금보다 생활이 더 어려울 때도 싸웠다. 그리고 노동법이니 근로기준법이니 아무것도 모를 때도 싸웠다. 기사들이 말하는 건 다 핑계다.(179쪽)

 

물론 기사의 입장에서 쓴 글을 기사가 아닌 내가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니, 같은 기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미 ‘글쓰기’라는 권력의 도구를 선점한 셈이다. 다른 생각이 있는 기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만할 뿐, 실체는 알 수 없으니). 하지만 기사와 손님이 제대로 싸우려면 뭔가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서로를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정말 웃긴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우리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직업적 글쓰기도 노동의 한 종류라는 것을 모른척하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의 같음과 다름을 인지하는 것. ‘연대’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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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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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전공한 세 명의 여성이 쓴 조선시대 14명의 여성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사실 이런 류의 책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를 안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여성은 이옥봉.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          天入雁愁長

 

  번역하기 어려운 시란 이런 시일 것이다. 어려운 글자도 없건만, 번역을 해놓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비문이거나 반쪽이 된다. 워낙 교묘하게 말을 놓았다. 강이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이 기러기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이 강과 하늘에 들어와 담기는 것을 수도 있는 문법구조이다. 그래서 넓고 먼 것이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강과 하늘일 수도 있게 만들어놓았다. 넓고 먼 강과 하늘은 철새인 갈매기나 기러기와 사슬처럼 얽히며 더욱더 넓고 멀어진다. 동시에 물에 젖은 꿈도, 하늘에 번진 슬픔도 아득히 넓고 멀어진다. 가을 하늘에 깔리는 깃털 구름처럼 여러 겹의 정서적 결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며 잔잔히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법구조 속에 짜 넣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시적인 애매성으로 기막히게 살려낸 경우이다. 가를 모를 쓸쓸함과 맑고 유장한 호흡이 이런 의도적 모호성과 다의성 속에 녹아 있다. 이런 시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말 밖에 무한한 정취가 있다고 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낼 문재가 있었던 여성은, 그러나 조선의 여성이었다. 하긴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테지만.

저자는 이옥봉의 도도함 속에서 컴플렉스를 발견해낸다. 아니, 직접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옥봉은 그(정실의 아들 조희철)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도 놀래키고, 내 시는 귀신도 울린다고, 그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나란히 부각시킨다. '귀신도 울린다'는 것이 애당초 이태백의 시를 지칭하는 말이니, 그녀 자신, 이태백에 필적하는 시인이라는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소실이지만 예술적 재능으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 도도한 선언에서는 역설적으로 옥봉의 신분적 컴플렉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교유한 인물들과 조원(남편)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옥봉은 조원과 나이 차가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세대로는 조희철의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명예가 모두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적자를 향해 '모자'라고 내세우는 그녀의 힘겨운 자존심이 안타깝다. 소실을 자처해 예술가로서 삶을 선택했던 그녀의 자의식에 놓인 분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밖에 열녀의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풍양 조씨의 '자긔록'이나, 현실과 욕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김삼의당의 경우도 매우 흥미롭다.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한듯 싶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의식은 언제나 진지하고, 보통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법.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타인들의 동감을 얻어내기에도 쉬운 방법인 셈이다.

 

책 표지를 검은색으로 하는 것은 종종 도박일 때가 많다. 그만큼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그런 의미에서 표지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쉬운 것은 제목. 내용에 비해 다른 그런저런 책들과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섹시한 제목을 뽑으려 노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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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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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놓은지 백만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읽게 된 책.

 

어느새 '한국의 미', '우리 문화의 힘' 따위의 말에 근거 없는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도 그닥 와닿지 않았었다. '월드컵 4강',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 '자긍심' 따위의 단어들은 되려 거부감만 들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특강'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런 거부감을 일소에 없애버릴만큼 재미가 있다.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배웠다'라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그림을 볼 때 알고 있어야할 기본적인 요령을 알고 그림을 보니, 정말 저자의 말대로 보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왼쪽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림을 훑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즉 옛사람들의 방식대로 그림을 보니 감상 또한 물흐르듯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안목'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아야 그리고 사랑해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볼 시視 자에 볼 견見 자,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청이불문聽而不聞', 들을 청聽 자, 들을 聞 자,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고 듣는데 왜 안 보이고 안 들릴까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애초 찬찬히 보고 들을 마음에 없이 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앞 글자 둘을 합하면 시청각 교실이라고 할 때 시청視聽이 되죠? 뒤 글자를 합하면 체험한다는 견문見聞이 됩니다. 아무리 시청각 교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다.

 

꼼꼼이 뜯어보고 곱씹어보고, 그러면서 그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저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이제 나의 근거 없는 거부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의 냉소가 선생의 애정에 비할 가치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때문에 강좌의 끝맺음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이십대 후반에 호암미술관에서 큐레이터(박물관 학예연구직)로 근무했을 때 일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때 중국회화사의 세계적 대가인 제임스 캐힐James Cahill 박사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오셨어요. 당시 나이가 벌써 육십이 넘으셨는데 정말 세계적인 학자이기 때문에 "아, 그분은 우리나라의 명화들을 과연 어떻게 감상하실까? 대학자니까 뭔가 보는 눈빛부터 다르겠지"하고는 2,3일 전부터 잔뜩 긴장해 가지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옷도 쫙 빼입고, 그러고서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적어도 한 두세 시간은 꼬박 그림을 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분이 그림을 별로 오래 보지 않는 겁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동안에 벌써 이쪽 코너를 돌아서 다시 저쪽 구석으로 또 꺾어졌습니다. 즐비한 국보, 김홍도의 <군선도>며 정선의 <금강전도>며 <인왕제색도>며, 그야말로 눈부신 우리 명작들을 너무 짧은 시간에 대충 보고 지나가고 또 보곤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서화실을 거의 다 둘러봤을 무렵에는 제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지고, 정말이지, 막말로 쌍시옷 자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중국 그림은 그렇게 대단하고, 우리 것은 하찮다는 것이냐?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그림을 지나쳐서 도자실로 막 넘어가기 직전에, 이분이 갑자기 우뚝 섰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정색을 하고는 마지막 그림을 꽤 긴 시간 유심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 저의, 불같이 솟았던 화가 눈녹듯 싹 풀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그림이었느냐 하면 추사 선생님의 제자 중에 고람 전기(1825~1854)라는 분이 그린 <귀거래도>라는 그림인데, 이 작품은 그 전시실 안에 있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국풍이 두드러진 그림이었어요. 가장 중국적인 그림, 말을 뒤집으면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그림! 캐힐 박사 이 양반은 중국 그림을 연구하는 분이니까 바로 그것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박사의 눈에는 오직 중국 그림과 닮은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분에게 마냥 주눅이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그림은 이러저러한 풍토와 역사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우리 옛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이러저러한 독특한 장점이 있는 예술품이다, 하고 오히려 가르쳐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나이는 어렸지만, 마땅히 또 당당히 그렇게 설명 드렸어야 했어요.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흔히 음악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카라얀이야 서양 음악의 제왕이면 제왕이지, 판소리의 제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저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옛 그림을 보고도 느끼셨겠지만 건축이며, 도자기며, 옷이며, 춤이며,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의 전통 문화는 중국, 일본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실은 완전히 속내가 다릅니다. 춤을 춰도 춤사위가 아주 걸지고 씩씩하며, 음악도 삼박자에 농현이 출렁출렁해서 속 맛이 아주 깊습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술 세계입니다. 사실 세상에 예술이며 문화만큼 울타리가 높은 것은 없습니다.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습니다.

 

얼핏 단순한 국수주의자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림 하나를 꼼꼼하게 '공부'하고 '분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느끼는 태도.

또 그것을 쉽게 풀어내는 오주석 선생의 '강의'를 듣다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정말 재미있게, 천천히 곱씹으면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편집 또한 굉장히 맘에 든다.

 

대상을 사랑하는 진지한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3자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 틈틈이 선생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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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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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만화로 그려낸 최규석의 최근작. 역시나 나는 출간 소식을 신문에서 보자마자 구입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제안을 받아 그린 작품인만큼, 이런 류의 만화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있지만, 잘해야 본전이고 거기다 하나마나한 작업이 되거나 자칫 교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했던)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커녕 연예인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설정이다.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수입 때문에 선생님을 꿈꾸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눈다.

  이런 것들이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계가 없는 거라면 그럼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지배층과 대거리를 할 만큼 똑똑해서 그들의 통치에 대해 훈수나 비판을 던질 수 있는 수존 높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황당한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 민주화란 말인가. 민주화란 게 겨우 그런 거라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흐름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이 만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만화 뒷 부분에는 '학습만화'가 포함되어 있다(말은 학습문화인데 킥킥대면서 봤다).

 

녹용씨 : 여튼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런 말 한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괜히 들떠서 설레발치다가 인생 말아먹기 딱 좋지.

촛농 : 재수없어!!

나레이터 : 그러게요. 재수없습니다. 녹용씨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가 존재하고, 여성은 투표권이 없고, 하루 16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불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을 겁니다. 타인의 피로 얻은 과실을 따먹고 계시다면 감사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빈정대지는 말아야죠.

 

학습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투표지 한 장이 있다고 해서, 시스템의 정당성이 갖추어졌다고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겹다는 말을 할만큼 학습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보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답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지금이야말로 학습이 필요한 때다.

 

항상 그렇지만, 최규석의 미덕은 그의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댄다는 것이다.

절대 롱샷으로 가지 않는다. 사람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대신 롱샷이 아닌 롱테이크로 간다.

한없이 심각하면서도, 피식하는 웃음이 있다.

그럼에도 동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여기가 바로 최규석이 빛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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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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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더군다나 목적지마저 알 수 없는 그런 길.

 

초기에는 실에 수의 같은 옷을 걸친 난민들이 우글거렸다. 몰락한 비행사처럼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넝마를 걸친 채 도로 가에 앉아 있었다. 밀고 가는 손수레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뒤에도 수레나 카트를 끌고 있었다. 두개골 속의 눈은 반짝거렸다. 열(熱)의 나라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는 신념 없는 껍데기 같은 사람들. 마침내 만물의 덧없음이 드러났다.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쟁점들이 무와 밤으로 해소되었다.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극한의 상황에서는 인간이 인간이 되지 못하고 시간마저 시간이 되지 못한다.

그 와중에도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걸까.

 

다른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랬죠. 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그런데 어디 있는 거예요?

숨어 있지.

뭘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서로를 피해서.

많은가요?

모르지.

하지만 있기는 있죠.

있기는 있지.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알았어요.

내 말을 안 믿는구나.

믿어요.

그럼 됐다.

언제나 믿어요.

안 그런 것 같은데.

믿어요. 믿어야 해요.

 

그래. 극한이 아닌다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존재하기 위해 믿는 것인가, 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젠 존재 자체가 버거운가?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매카시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너무도 건조하게 서술을 해버려서, 그의 자세한 묘사와 설명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정도다.

비가 방수포를 후두둑 때리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엔 사막이 그려지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 습기라고는 하나 느낄 수 없는, 그런 건조함. 허공에서 손을 모아쥐면 무엇인가 바스라질 것만 같은 건조함.

그렇다고 찌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암흑만이 '보일' 뿐.

 

글을 나누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가버리기 때문에, 읽는 것이 엄청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쉽게 '희망' 따위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암흑의 사막'이 그저 암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정말 모를 일이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소년'에게 짜증이 울컥울컥 났다. 지금 '그따위' 소리를 지껄일 때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그렇다고 이 소년에게 '배가 고프니 갓난아이를 구워먹자'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음의 한 마디가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다.

 

남자는 소년과 소년의 관심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에 남자가 말했다. 네 말이 맞을 것 같다. 아마 죽었을 거야.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 걸 뺏는 게 되잖아요.

 

정말 간만에 읽었던 소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었던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는 소설치고 너무 힘겨운 소설을 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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