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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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전공한 세 명의 여성이 쓴 조선시대 14명의 여성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사실 이런 류의 책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를 안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여성은 이옥봉.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          天入雁愁長

 

  번역하기 어려운 시란 이런 시일 것이다. 어려운 글자도 없건만, 번역을 해놓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비문이거나 반쪽이 된다. 워낙 교묘하게 말을 놓았다. 강이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이 기러기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이 강과 하늘에 들어와 담기는 것을 수도 있는 문법구조이다. 그래서 넓고 먼 것이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강과 하늘일 수도 있게 만들어놓았다. 넓고 먼 강과 하늘은 철새인 갈매기나 기러기와 사슬처럼 얽히며 더욱더 넓고 멀어진다. 동시에 물에 젖은 꿈도, 하늘에 번진 슬픔도 아득히 넓고 멀어진다. 가을 하늘에 깔리는 깃털 구름처럼 여러 겹의 정서적 결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며 잔잔히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법구조 속에 짜 넣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시적인 애매성으로 기막히게 살려낸 경우이다. 가를 모를 쓸쓸함과 맑고 유장한 호흡이 이런 의도적 모호성과 다의성 속에 녹아 있다. 이런 시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말 밖에 무한한 정취가 있다고 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낼 문재가 있었던 여성은, 그러나 조선의 여성이었다. 하긴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테지만.

저자는 이옥봉의 도도함 속에서 컴플렉스를 발견해낸다. 아니, 직접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옥봉은 그(정실의 아들 조희철)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도 놀래키고, 내 시는 귀신도 울린다고, 그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나란히 부각시킨다. '귀신도 울린다'는 것이 애당초 이태백의 시를 지칭하는 말이니, 그녀 자신, 이태백에 필적하는 시인이라는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소실이지만 예술적 재능으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 도도한 선언에서는 역설적으로 옥봉의 신분적 컴플렉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교유한 인물들과 조원(남편)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옥봉은 조원과 나이 차가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세대로는 조희철의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명예가 모두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적자를 향해 '모자'라고 내세우는 그녀의 힘겨운 자존심이 안타깝다. 소실을 자처해 예술가로서 삶을 선택했던 그녀의 자의식에 놓인 분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밖에 열녀의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풍양 조씨의 '자긔록'이나, 현실과 욕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김삼의당의 경우도 매우 흥미롭다.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한듯 싶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의식은 언제나 진지하고, 보통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법.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타인들의 동감을 얻어내기에도 쉬운 방법인 셈이다.

 

책 표지를 검은색으로 하는 것은 종종 도박일 때가 많다. 그만큼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그런 의미에서 표지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쉬운 것은 제목. 내용에 비해 다른 그런저런 책들과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섹시한 제목을 뽑으려 노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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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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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놓은지 백만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읽게 된 책.

 

어느새 '한국의 미', '우리 문화의 힘' 따위의 말에 근거 없는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도 그닥 와닿지 않았었다. '월드컵 4강',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 '자긍심' 따위의 단어들은 되려 거부감만 들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특강'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런 거부감을 일소에 없애버릴만큼 재미가 있다.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배웠다'라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그림을 볼 때 알고 있어야할 기본적인 요령을 알고 그림을 보니, 정말 저자의 말대로 보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왼쪽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림을 훑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즉 옛사람들의 방식대로 그림을 보니 감상 또한 물흐르듯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안목'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아야 그리고 사랑해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볼 시視 자에 볼 견見 자,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청이불문聽而不聞', 들을 청聽 자, 들을 聞 자,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고 듣는데 왜 안 보이고 안 들릴까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애초 찬찬히 보고 들을 마음에 없이 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앞 글자 둘을 합하면 시청각 교실이라고 할 때 시청視聽이 되죠? 뒤 글자를 합하면 체험한다는 견문見聞이 됩니다. 아무리 시청각 교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다.

 

꼼꼼이 뜯어보고 곱씹어보고, 그러면서 그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저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이제 나의 근거 없는 거부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의 냉소가 선생의 애정에 비할 가치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때문에 강좌의 끝맺음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이십대 후반에 호암미술관에서 큐레이터(박물관 학예연구직)로 근무했을 때 일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때 중국회화사의 세계적 대가인 제임스 캐힐James Cahill 박사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오셨어요. 당시 나이가 벌써 육십이 넘으셨는데 정말 세계적인 학자이기 때문에 "아, 그분은 우리나라의 명화들을 과연 어떻게 감상하실까? 대학자니까 뭔가 보는 눈빛부터 다르겠지"하고는 2,3일 전부터 잔뜩 긴장해 가지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옷도 쫙 빼입고, 그러고서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적어도 한 두세 시간은 꼬박 그림을 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분이 그림을 별로 오래 보지 않는 겁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동안에 벌써 이쪽 코너를 돌아서 다시 저쪽 구석으로 또 꺾어졌습니다. 즐비한 국보, 김홍도의 <군선도>며 정선의 <금강전도>며 <인왕제색도>며, 그야말로 눈부신 우리 명작들을 너무 짧은 시간에 대충 보고 지나가고 또 보곤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서화실을 거의 다 둘러봤을 무렵에는 제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지고, 정말이지, 막말로 쌍시옷 자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중국 그림은 그렇게 대단하고, 우리 것은 하찮다는 것이냐?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그림을 지나쳐서 도자실로 막 넘어가기 직전에, 이분이 갑자기 우뚝 섰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정색을 하고는 마지막 그림을 꽤 긴 시간 유심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 저의, 불같이 솟았던 화가 눈녹듯 싹 풀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그림이었느냐 하면 추사 선생님의 제자 중에 고람 전기(1825~1854)라는 분이 그린 <귀거래도>라는 그림인데, 이 작품은 그 전시실 안에 있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국풍이 두드러진 그림이었어요. 가장 중국적인 그림, 말을 뒤집으면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그림! 캐힐 박사 이 양반은 중국 그림을 연구하는 분이니까 바로 그것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박사의 눈에는 오직 중국 그림과 닮은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분에게 마냥 주눅이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그림은 이러저러한 풍토와 역사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우리 옛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이러저러한 독특한 장점이 있는 예술품이다, 하고 오히려 가르쳐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나이는 어렸지만, 마땅히 또 당당히 그렇게 설명 드렸어야 했어요.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흔히 음악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카라얀이야 서양 음악의 제왕이면 제왕이지, 판소리의 제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저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옛 그림을 보고도 느끼셨겠지만 건축이며, 도자기며, 옷이며, 춤이며,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의 전통 문화는 중국, 일본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실은 완전히 속내가 다릅니다. 춤을 춰도 춤사위가 아주 걸지고 씩씩하며, 음악도 삼박자에 농현이 출렁출렁해서 속 맛이 아주 깊습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술 세계입니다. 사실 세상에 예술이며 문화만큼 울타리가 높은 것은 없습니다.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습니다.

 

얼핏 단순한 국수주의자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림 하나를 꼼꼼하게 '공부'하고 '분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느끼는 태도.

또 그것을 쉽게 풀어내는 오주석 선생의 '강의'를 듣다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정말 재미있게, 천천히 곱씹으면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편집 또한 굉장히 맘에 든다.

 

대상을 사랑하는 진지한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3자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 틈틈이 선생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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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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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만화로 그려낸 최규석의 최근작. 역시나 나는 출간 소식을 신문에서 보자마자 구입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제안을 받아 그린 작품인만큼, 이런 류의 만화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있지만, 잘해야 본전이고 거기다 하나마나한 작업이 되거나 자칫 교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했던)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커녕 연예인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설정이다.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수입 때문에 선생님을 꿈꾸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눈다.

  이런 것들이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계가 없는 거라면 그럼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지배층과 대거리를 할 만큼 똑똑해서 그들의 통치에 대해 훈수나 비판을 던질 수 있는 수존 높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황당한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 민주화란 말인가. 민주화란 게 겨우 그런 거라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흐름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이 만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만화 뒷 부분에는 '학습만화'가 포함되어 있다(말은 학습문화인데 킥킥대면서 봤다).

 

녹용씨 : 여튼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런 말 한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괜히 들떠서 설레발치다가 인생 말아먹기 딱 좋지.

촛농 : 재수없어!!

나레이터 : 그러게요. 재수없습니다. 녹용씨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가 존재하고, 여성은 투표권이 없고, 하루 16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불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을 겁니다. 타인의 피로 얻은 과실을 따먹고 계시다면 감사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빈정대지는 말아야죠.

 

학습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가?

6월 항쟁으로 얻어낸 투표지 한 장이 있다고 해서, 시스템의 정당성이 갖추어졌다고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겹다는 말을 할만큼 학습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보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답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지금이야말로 학습이 필요한 때다.

 

항상 그렇지만, 최규석의 미덕은 그의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댄다는 것이다.

절대 롱샷으로 가지 않는다. 사람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대신 롱샷이 아닌 롱테이크로 간다.

한없이 심각하면서도, 피식하는 웃음이 있다.

그럼에도 동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여기가 바로 최규석이 빛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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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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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더군다나 목적지마저 알 수 없는 그런 길.

 

초기에는 실에 수의 같은 옷을 걸친 난민들이 우글거렸다. 몰락한 비행사처럼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넝마를 걸친 채 도로 가에 앉아 있었다. 밀고 가는 손수레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뒤에도 수레나 카트를 끌고 있었다. 두개골 속의 눈은 반짝거렸다. 열(熱)의 나라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는 신념 없는 껍데기 같은 사람들. 마침내 만물의 덧없음이 드러났다.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쟁점들이 무와 밤으로 해소되었다.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극한의 상황에서는 인간이 인간이 되지 못하고 시간마저 시간이 되지 못한다.

그 와중에도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걸까.

 

다른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랬죠. 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그런데 어디 있는 거예요?

숨어 있지.

뭘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서로를 피해서.

많은가요?

모르지.

하지만 있기는 있죠.

있기는 있지.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알았어요.

내 말을 안 믿는구나.

믿어요.

그럼 됐다.

언제나 믿어요.

안 그런 것 같은데.

믿어요. 믿어야 해요.

 

그래. 극한이 아닌다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존재하기 위해 믿는 것인가, 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젠 존재 자체가 버거운가?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매카시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너무도 건조하게 서술을 해버려서, 그의 자세한 묘사와 설명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정도다.

비가 방수포를 후두둑 때리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엔 사막이 그려지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 습기라고는 하나 느낄 수 없는, 그런 건조함. 허공에서 손을 모아쥐면 무엇인가 바스라질 것만 같은 건조함.

그렇다고 찌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암흑만이 '보일' 뿐.

 

글을 나누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가버리기 때문에, 읽는 것이 엄청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쉽게 '희망' 따위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암흑의 사막'이 그저 암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정말 모를 일이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소년'에게 짜증이 울컥울컥 났다. 지금 '그따위' 소리를 지껄일 때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그렇다고 이 소년에게 '배가 고프니 갓난아이를 구워먹자'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음의 한 마디가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다.

 

남자는 소년과 소년의 관심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에 남자가 말했다. 네 말이 맞을 것 같다. 아마 죽었을 거야.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 걸 뺏는 게 되잖아요.

 

정말 간만에 읽었던 소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었던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는 소설치고 너무 힘겨운 소설을 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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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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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사건'을 기억하는가? 한 교수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테러'.

그 동안 언론에서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가십 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를 위한 법인가'라는 근본적이고도 회의적인 질문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를  가리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그 말은 그 사람의 심성이 착하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그런 온유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무섭고 두려운 실체다. 그들에게 법과의 대면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신세를 자칫 망치게 하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앞서 조미영 씨가 말했듯이 자신의 억울함을 법에 호소해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거나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게 한국의 법 현실이다.

 

이 책은 르포처럼 현장감 있는 장면과 목소리를 전달한다. 김 교수를 둘러싼 공판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말을 풀어간다.

글을 읽을 수록 저자의 표현대로 김교수가 '팍팍'하고 '불편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설령 누군가가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많고, 타인의 선처나 바라는 비굴한 사람일지라도, 체제로부터 부당하게 핍박받는다면 그를 옹호하는 것이 좀 더 인간적이고, 그럴 때 용기를 내는 것이 진짜 용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빡빡한 삶인가. 그러나 난 그걸 나쁘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를 대면하는 게 괴롭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가 주는 피곤함은 상식과 기본이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문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석궁을 들고 법관에게 항의를 하러 간 김 교수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진 않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그에게 그런 잘못이 있다고 해서 그가 요구하는 정당한 법적 절차를 기각할 정당성도 없다.

그것도 판결에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증거의 확인(피해자 증인 대질, 혈흔분석, 석궁의 확인, 부러진 화살의 추적)이 왜 무시되는가?

아마도 '감히'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법의 수호자들'은 '감히' 국민의 기본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건가?

 

  그러나 법이 있다고 해서, 혹은 법이 누구나 따라야 할 의무나 규범으로 부과되었다고 해서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엄정한 독재 정권 시절에도 법은 있었고, 당시의 현실과 무관하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쓰여 있는 헌법도 있었다. 1971년 전태일이 분신할 때에도 그는 무슨 '계급혁명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이승만 정권도, 박정희 정권도, 전두환 정권도 다 법치를 외쳤다.

  법의 지배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보통의 시민보다 영향력이 큰 사회적 강자 집단들과 국가의 권력 집단이 법의 지배에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보통의 시민들이 법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가족들과 오락삼아 화투를 치기도 한다. 그 때 종종 나오는 농담조의 대사 중에 '법대로 하쇼'라는 말이 있다.

피박, 광박을 모두 면한 다음에 하는 대사인데, 이번 판을 지더라도 크게 잃을 게 없다는 나름의 배짱(?)인 셈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이기는 하지만, 나는 왠지 다른 생각이 든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왠지 떳떳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아쉬울 것이 없는' 혹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하는 말 같다는 점이다.

'법치'를 강조하는 현 정부와 경찰이 그러하지는 않은가?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고?

글쎄, 그렇다면 '법대로 하라'고 똑같은 대사를 외치는 김 교수는 왜 무시되어야 하는가.

 

'김 교수의 생각대로만 책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김 교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채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그 지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순식간에 책을 다 읽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재미있는 블랙코미디 추리극을 만나게 될터이니.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고는 블랙코미디 추리극이 아니라 비극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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