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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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의 팬이었던 나는 최규석이 이 또 다른 단편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급하게 사들였다.

 

전작보다 훨씬 유쾌해지고 그러면서도 더욱 냉소적인 느낌을 주는 '습지생태보고서'

양지가 아닌 '습지'에서의 지지리궁상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 너무 괴로워하지 마. 지금은 그냥 네 꿈을 향해 달리는 수 밖에 없어...

- 그렇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냥 달려야겠지?

- 그게 아니라... 성공하고 나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보이지 않게 될 거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낄낄대고 웃다보면 저 습지가 저들만의 서식지가 아님을 깨닫고는 급작스레 침울해지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은 침울로 끝내지 않는 약간의 상투적인 결말을 짓고는 있지만

실은 침울로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습지자체가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습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보다는 개체의 태도가 어떠한가가 제일 중요하다는 뻔한 결론.

뻔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뻔한 것만큼 정당하고 어려운 것도 없다.

 

이 책이 강조하듯 '100% 공감 리얼궁상만화'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동감하며 살 것이다.

그것이 내 작은 '이상'에도 들어 맞는 것이며, 한편으로 현실적인 전략 면에서도 훨씬 실현 가능성이 큰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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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사랑
마이클 커닝햄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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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래 나는 누군가가 권하는 책을 잘 읽진 못하는 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결국 읽게 되더라도 권해줬던 그 시점으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바로 읽기 시작했다. 물론 꽤나 더디게 읽었지만.
 
이 책은 격렬한 열정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읽는데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다. 감정적으로.
 
내 평안을 위한 가학적 배려.
 
  우리의 교류는 오로지 육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우리에게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육체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한 교류를 시도했다면 아마 감상적이고, 부자연스럽고, 무분별한 짓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에는 성의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우리는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인 이기심.
 
  눈물이 흘러 넘쳤다. 바비가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한순간 조나단과 내가 남매이고, 우리 두 사람의 친구인 바비가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나는 내가 죽은 사람을 위해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자잘한 슬픔 때문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울음이 더 거세게 터져 나왔다....... 바비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슬퍼하는 것을 알고 그가 나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살아 있던 시절의 모습을 직접 기억하고 있는 반면, 내 슬픔은 전혀 낯선 사람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의 슬픈 기억들에 대한 것에 불과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감정에만 너무 빠져 있었다.
 
자기방어적 자만심.
 
  어쩌면 사람들은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은 젊음의 방종으로 인해 너무 쉽게 경솔하게 사랑을 줘 버리고 아직도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줄 사랑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조한 후회.
 
  나는 사막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내게서 받은 것이라고는 알맹이 없는 위로의 말뿐이었다. 아버지는 우편함에서 우편 판매 상품 카탈로그와 팜플렛 등을 꺼내 가지고 오다가 죽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 둔 채 부치지 않았다.
 
  특히나 앨리스와 조나단이 격한 감정으로 싸우던 장면에선 힘들어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조나단, 사랑할 사람을 찾아라."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 연약함을 잘 알고 그것을 용서해 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작게 축소시키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다면, 겁에 질리지 않는다면, 자극적인 도전과 따스함을 함께 갖춘 사랑이 나타날 것 같았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다.
 
4명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왠지 몇몇 인물의 서술 방식이 자꾸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
특히 바비의 경우(내가 가장 가깝다고 느낀 등장인물이기에 그랬을까.)
왠지 그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이런식으로 묘사하진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이나 엘리스, 클레어가 바라본 바비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봤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내가 바라본 '그 사람'와 실존하는 '그 사람'이 일치할 수 있을까, 하는.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글쎄,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을 이해해가는 과정, 즉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일말의 '가능성', 그리고 내게 아직 남아있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희망을 걸어본다.
내게 남은 능력은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지만
정말
정말 다행스럽게도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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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광인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5
루쉰 지음, 정석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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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쉰 선생의 단편소설집. 총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편집상의 몇몇 오류가 눈에 띄긴하지만 번역은 괜찮은 것 같다.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아Q정전'이 대표작이라 그것에 치중해서 봤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광인일기'에 관심이 갔다.
당시 루쉰 선생이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소설은 현재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는 말 그대로 미친 자의 일기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생각을 하는.
그저 미친자의 일기로 볼 수도 있고, 당시 봉건도덕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아름다운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 글이 다른 맥락으로 읽혔다.
 
......무려 4천 년 동안이나 늘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 역시 그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4천 년 간이나 사람을 잡아먹은 경력을 가진 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아직도 사람 고기를 못 먹어본 어린이가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미친 자'의 일기가 이리도 섬뜩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덜 섬뜩한가.
 
그래도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고향'.
드디어 사람에게서 20년만의 고향을 찾은 것 같았던 주인공에게
'주인님....'이라는 한 마디. 현실의 벽이 차갑게 부딪혀 오지만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생각한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요구할 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한시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른 점이라면 그의 희망은 절박한 것인데 비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라는 점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눈 앞에는 해변가의 푸르른 모래밭이 떠올랐다. 짙은 남색 하늘에 바퀴처럼 둥근 황금의 보름달이 떠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번역자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어쨌든 이 구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두움 속에서 담담하게 희망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저 구절.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있다'라는 말보다도 저 구절이 더 와닿고, 또 내게 힘을 준다.
희망의 원동력은 '부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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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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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이 2001년 초여름이었던가.
당시 듣던 강의, '죽음의 사회학'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된 책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권유가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
하지만 이 책은 그 강의와 더불어 내게 '죽음'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던가. 이번이 세번째 읽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교훈과 그 속에 넘치는 위트, 그리고.... 사람들 간의 따뜻함.
이번에 읽으면서 너무나도 동감했던 구절은 바로 이 부분. 내가 평소에 그렇다고 믿던 것.
 
"나는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땐,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를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
 
온 몸의 근육이 죽어가는(그러면서도 통점은 잃지 않는 참 아이러니컬한) 루게릭 병을 않으면서도
모리는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답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또한 진정 삶을 사랑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한다면.
죽음 또한 진지하게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조용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이 책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죽어가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방송사에 대해 경계하는 글쓴이에게 모리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미치, 그들은 드라마틱한 쇼를 위해 나를 이용하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어쩌면 나도 그들을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수백만 명에게 하도록 도와주잖나.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안 그래? 그러니까 이건 공모라구."
 
공모. 그렇다. 사회학이나 역사학은 경영학이나 경제학보다 효율적으로 부를 창출할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잊고는 방향을 잡지 못하기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참 뜬금 없는 소리가 나도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관심과 애정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과감성도 필요한 학문이다.
내가 그렇게도 전공하고 싶어하던(중학교 때부터지 아마) 사회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역사학 쪽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 타 여러 이유들이 있기도 하지만
사회를, 그리고 인간을 그저 재미있는 분석거리로 보는 사회학의 일단면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건대, 이건 그저 '일단면'만을 보고 심하게 왜곡시킨 나의 탓이긴 하다.)
 
사회현상이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는 또 많은 눈물과 피가 숨겨져 있다.
그 사실을 그저 재미있게 현미경 들여다보듯, 외부자의 시선을 유지하기엔
난 학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기뻐해야할 일엔 기뻐하고, 슬퍼해야할 일엔 슬퍼하며, 분노해야할 일엔 분노하는 것.
그것이 배운 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 땅에서 '더 많이 배웠다'라는 것조차 착취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내 삶을 변명하는 그 순간. (네 환경이, 조건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증오하던 일들을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행하고 있게 되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이면 나는 드디어 '죽음'을 두려워하겠지. 아니 분명히 잊으며 살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리를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약간의 언어유희. ㅎㅎㅎ)
 
P.S. 살면서 이런 프로젝트 하나쯤 해보는 것.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그리고 옆에서 그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따스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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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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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61년 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고 97년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받아 유명인이 된 저자.
그는 현재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환경, 반핵, 반세계화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 저자가 쓴 2편의 시론을 묶은 책. (그녀는 인도극우주의자들에게 '빨갱이 잡년'으로 불린다.)
한편은 인도에서 무차별, 무계획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댐건설 반대에 대한 글이고
다른 한편은 핵무기의 전쟁억제력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핵에 대한 글이다.
 
저자가 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서(물론 흥분할만한 일이지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찌 이리도 낯설지가 않을까.
 
인도에서는 세계은행의 무차별적인 대출(요새 광고 많이하는 사채회사나 뭐가 다른가)로
수많은 동식물과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집을 물 속으로 잠기게 하는 댐건설을 해댄다.
문제는 이주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배려는 전혀 없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효과도 전혀 얻지 못한다는 것.
그들(인도의 위정자들과 세계은행)은 이것을 '효율성'이라 부른다.
20만명의 안정적인 급수를 확부하기위하여(혹은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4천만명의 거주지를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한 후 그들을 내던져버리는 일.
글의 제목처럼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공공'은 누구이고 '큰 이익'은 누구의 것인가? 희생자는 누가 결정했는가?
생존의 비용. '생존'의 의미는 천차 만별이다...
 
이것은 전혀 낯선 장면이 아니다. 올림픽 당시 미관(누구 입장에서의 미관인가)을 위해
사람들을 한 겨울에 허허벌판으로 두들겨 패 내쫓고
청계천에서의 하루의 휴식과 그 휴식하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힘을 만끽하는 자들을 위해
그곳이 삶의 현장이었던 사람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쫓는 모습.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아룬다티 로이는 이야기한다. 희망을 위해 당신의 믿음을 깨뜨리라고.
슬프지만 그 믿음의 파괴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고.
우리가 믿는, 아니 믿고 싶어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저자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단순한 '믿음'이 어떠한 힘을 가지는 지를 정확히 지적한다.
인도... 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정신적으로 고양된 장소? 평화로운 장소?...
 
도사인 체하는 사람들은 강연을 하면서 진짜 인도, 인도의 정신은 시골에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무슨 허튼 소리란 말인가. 손가락만 한 무화과 잎 하나로 색색의 화려한 물건들이 터질 듯 꽉 들어찬 정부의 수납장을 가려 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인도가 시골에 살아 있다고? 그렇지 않다. 인도는 시골에서 죽어가고 있다. 인도는 시골에서 학대를 받는다. 인도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인도의 시골은 오로지 도시를 섬기기 위해 산다. 인도의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고, 계속 살아 있되 겨우, 그리고 간신히 살아가야만 한다.
 
최근 뉴라이트(젠장 이게 대체 뭐냐!) 쪽에서 교과서를 냈다던데, 참 가관이었다.
체제의 맨 꼭대기에서 온갖 수혜를 받고 커온 그들이 본 역사란 게 바로 저렇다.
자.. 어떤가. 아직도 저들이 이야기하는 '민족'이나 '국가'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환상을 가지는가?
촘스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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