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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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의 일환으로 읽기로 했던 책이었는데 빠르게 읽히지는 않아서 이제야 다 읽은 책.

그러나 더딘 독해 속도와는 별도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물론 제목만 보고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식의 서술을 기대해선 안된다.

 

저자는 나치 시대에 살았던 '작은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다. 밑에서부터의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접근으로 그는 우리가 거시적으로 볼 때 명확해보이는 많은 부분이 사실은 너무나도 복잡한 양상을 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사에 접근할수록 연구자의 이론적 방법론적 확실성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개별자의 경험과 행위를 이해하고 복원하는 과정 속에서 도덕적 가치 기준마저도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될 당시(1982년) 꽤나 논란을 빚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근대화'의 개념을 제시한다.

왜 한국의 경우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근대화"는 낡은 권력 관계를 유지한 채 사회가 재조직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때 근대화는 사회주의적인 의미에서 가장 "반동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나치혁명'은 오버센스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결국 나치의 등장은 서구 근대의 중간에 뜬금 없이 등장한 '괴물'이 아니라 서구가(혹은 우리가) 맹신하고 있었던

근대가 발전(?)할 수 있는 병리학적인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청소년의 동원과 거부'라는 부분인데

저자는 이 부분에서 작은 사람들이 소요할 수 있었던 미시적인 전략 공간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학교와 청소년단이라는 두 권위 조직의 관계는 결코 근원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 사이의 경쟁은 갈등의 공간을 낳았고, 청소년들은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학교를 핑게로 히틀러 청소년단 모임에 빠지기도 하고, 거꾸로 나치당과 청소년단이라는 "보다 높은" 대의를 들이대며 교사들을 괴롭히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사료를 읽는 방법 혹은 관점에서도 저자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치의 공식적인 보고서들은 스윙 청소년들의 혼숙, 그룹 섹스, 미성년 섹스, 특히 나치가 황폐화로 간주하던 성애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이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현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 보고서가 선택한 단어와 강조점을 보면, 보고서는 통상 청소년들의 행태보다 오히려 보고서를 쓰고 읽는 자들의 관점을 드러낸다. 작성자는 자신의 불안과 억눌린 소망을 청소년들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채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허풍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어쩌다 발생한 개별적인 "사건"을 일반화했다.

 

그와는 별개로,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약 21만 9천명의 집시가 살해되었고 그들의 '재생산'을 막기 위하여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사람은 1945년까지 20만 내지 35만 명에 달한다는 부분에서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논리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 그 좋다는 (신)자유주의를 겹쳐보게 된다.

 

나치들은 사회적 현상을 병리적 관점으로, 즉 전염병처럼 바라보면서 확산을 두려워하며 근절을 외쳤고

결국은 사회적인 일탈을 인종주의의 시각(선천적인 유전획득)에서 파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삐뚤어진 관점은 과학이라는 화려한 탈을 쓰고 유래 없는 대규모 학살을 낳았던 것이다.

여기서 왜 나치를 그 아름다운 자유주의와 겹쳐서 바라보느냐하는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질문을 비교해보라.

 

"환경은 완벽한데 대체 왜 저런 족속들이 나타나는 것인가? 역시 저 놈들은 태생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자유가 만연한 평등 사회에서 대체 왜 저렇게 낙오하는 것인가? 저들은 미숙아이거나 게으름이 병처럼 몸에 박혀있을 뿐이다."

 

결론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이든 도덕적 관점이든, 그것은 모두 개인이 초래한 것이며 잘못은 그들의 유전자에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저들은 이 사회의 조건이 무균질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유주의'가 현상을 왜곡하여 제시하고 결론을 이끌어 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무척이나 많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책. 그리고 분명 한 번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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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길이다 - 루쉰 아포리즘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이철수 그림 / 예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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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에도 써있지만 말 그대로 루쉰의 아포리즘. 자기 반성의 기록이 왜 중요한가를 느끼게 해준 책.

 

죽은 자가 산 자의 마음 속에 묻히지 않을 때 그는 참으로 죽고 만다.

 

돈이란 말은 매우 귀에 거슬린다. 고상한 군자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의견이란 것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식전과 식후가 왕왕 다른 법이다. 무릇 밥은 돈을 줘야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저하면서도 돈 소리 하는 것은 비천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

 

공자가 그랬다. "여자와 어린애들은 다루기 힘들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여자와 어린 아이를 함께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자기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훗날 도학자 선생들은 표면적으로는 어머니를 존경하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중국에서 어머니가 된 여성들은 자기 아들 이외의 모든 남자들의 경멸을 받고 있다.

 

니체는 피로 쓴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피로 쓴 문장은 아마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쓴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변색되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루쉰은 뒤에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전해지기만 하면 좋은 문학이요, 소실된 것은 나쁜 문학이다. 천하를 빼앗으면 왕이고, 빼앗지 못하면 역적이다. 중국인의 이런 역사관이 문학에까지 그대로 연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루쉰 선생의 날카로운 통찰 또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름을 붙여 분류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은 국민입니다"이고, 하나는 "당신은 세계인입니다"이다. 전자는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하게 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명에 위배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을 살펴보건대, 비록 일관된 주장은 없지만 모두 인간의 자아를 압살하고 획일화하여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대중들 속에 매몰시키려는 것이다..... 두 가지 주장이 상반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개성을 말살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역시 내 마음을 울리는 구절은 소설 '고향'의 저 구절. 지겹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결코 지겨워서는 안된다.

혹시 저 구절은 알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일독을 권한다. 분량도 아주 적으니까.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 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에 MSN 대화명이 선생의 유언 중 한 구절로 바뀌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를 말하기엔 아직 나는, 증오조차 하지 못했다.

진정 그러하다. 부끄러운 줄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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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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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름만으로도 굉장한 힘을 가지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참여한 책.

사실 이 책은 83년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의 논의가 현재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고전'하나를 읽는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가 어떻게 시작됐느냐를 확인한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책.

 

이 책의 역자인 박지향 교수는 이제 역사학이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이렇게 풀어낸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기억'이라는 것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오늘의 역사학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저 말이 '이분법'으로 인식된다면 큰 문제점이 발생하기는 한다.)

 

홉스봄의 서론에 이어 6명의 학자가 스코틀랜드, 웨일스, 영국, 인도, 아프리카, 유럽전역에서 있었던 '전통의 창조'에 관해

각각의 서술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글의 배치상 스코틀랜드가 가장 재미읽게 읽히는 부분이다.

한국인들조차 '전통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스코틀랜드 특유의 복장이 사실 그리 오래된 전통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또한 '전통'이라 불릴만큼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그 전통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지도 이야기하고 있다.

 

고지대 의복은 본래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라졌다. 한 세대 동안 바지를 입어 온 고지대의 소박한 농민들로서는 굳이 예전에 그토록 값싸고 유용했던 혁대 맨 어깨걸이나 격자무늬 천을 다시 입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안성맞춤의 편리한' 새 킬트는 찾지도 않았다. 반면에 이전에 그 '천한' 옷을 박대하던 중상류층은 이제 전통적으로 입었던 사람들이 마침내 벗어던진 그 복장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가끔 매체를 통해보는 영국왕실도 마찬가지다.

 

"근대 사회는 여전히 신화와 의례를 필요로 한다. 국왕과 그 가족은 그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이전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관객들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지게 거행되는 기념식을 보며 마치 언제나 그러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이제 왕실은 새롭게 이용되며, 그들 스스로도 그 지위에 적당히 적응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해낸다.

 

이렇게 군주정의 실질적인 권력이 약화되면서, 군주정이 장엄한 기념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더욱 증대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의례의 강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영향력을 배가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동일한 의례들이 점증하는 왕실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잉글랜드의 그것은 권력의 무대가 다시 펼쳐졌음을 알리기보다는 무능의 행렬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또한 미디어의 발달로 왕실의 행사가 '전국적이고 가족적인 사건'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전통의 발명은 식민지에서도 계속된다.

 

'다양성은 열흘간의 제국회의 내내 마련된 연설들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고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인도인들과 프록 코트와 제목을 빼입은 영국인들이 함께 참석한 회의 전야의 연회에서, 리튼은 제국 칭호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면 단지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고 선언했다. 그럼으로써 "거의 무한한 다양성을 간직한 인종들과 그들의 성격을 특징짓는 신조들로 이루어진 거주민들뿐만 아니라 그 전통에서도 역시 다종다기한" 제국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시대 이전의 사회들은 확실히 관습과 연속성을 귀하게 여겼지만, 관습은 느슨하게 규정되었고 한없이 유연했다. 관습은 일체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자생적이고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어 그런 관습이 있다는 것조차 종종 잊어 버릴 지경이었다. 더욱이 '전통적' 아프리카의 특성이라고 이해된 자기완결적인 통합적 합의체제라는 것도 사실상 있어본 적이 없었다.

 

이 전체의 연구를 에릭 홉스봄의 서론 부분을 빌려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 '전통'과 실용적인 인습 및 관례는 길항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자유주의적 성향의 유태인들은 고대 헤브루 인들이 순전히 위생상의 이유로 돼지고기를 금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음식 금지 조항을 실용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는데, 바로 여기서 '전통'은 예의 약점을 노출한다. 거꾸로 어떤 대상과 관행들은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에야 비로소 상징과 의례로 온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럼 한 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것은 과연 왜 '전통'(존경의 뜻을 담은 단어)인가?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유용하기 때문인가.

이런 질문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전통은 그리 단순한 정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 단순하게 '이용'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왕실적 전통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거세된 대한민국의 경우

구성원들이 어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냐는 것. 그것을 비교사적으로 연구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의문 나는 점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살짝 언급하자면,

영국 신문의 상업성이 짙어지면서 왕실의 풍자가 사라졌다는 부분이 있는데(왕실에 관련된 기사는 폭증한다.),

상업성과 강한 비판적 성격을 띤 풍자가 함수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님에도 왜 이것을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느냐하는 점이다.

신문이 대중에 반응을 한 것인지(상업성이 강하다면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고려하는 수준이 더 높아질테니까)

아니면 대중이 신문에 반응을 한 것인지 그것이 좀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상호작용을 하였습니다.-_-라고 해버리면 할 말은 없다만;)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 꽤나 고생했던 책이었고 부분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책은 다들 뭔가 이유가 있다는 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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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의 이유
하워드 진 지음, 앤소니 아르노브 인터뷰,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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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Terrorism and war'인 이 책은 하워드 진의 대담집이다.

두께가 아주 앏은 핸드북 수준의 책이고 형식 또한 대담집이라 쉽게 읽히지만, 매우 강렬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책.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은 자신이 왜 '행동'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뭔가를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테러리즘'을 넓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당한 전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전쟁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고의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비전투병력이라고?

 

제 생각으로는 일종의 제한전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군사 행동이 원래부터 자체 내에 제한을 두지 않는 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술의 기초만 알더라도 저따위 단어는 쓰지 않을텐데도 버젓이 저따위 말을 지껄이면서 '국군'을 파병했다.

무능함이든 뻔뻔함이든, 둘 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의 '연대'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희망이 없어보이는 이 시기에 희망을 본다'고 얘기한다.

부시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책은 2002년도에 출간됐다)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아르노브의 질문에 하워드 진은 이렇게 대답한다.

 

누가 백악관에 앉아 있는가가 아니라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가, 그리고 누가 거리에, 노천 카페에, 정부 청사에, 공장에 있는가가 실제로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사람들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시위를 벌이고, 누가 관공서를 점령하고, 누가 집회를 벌이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곧 일어날 사태를 결정해주는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살기 빠듯한데 신경 좀 끄고 살면 안되냐라고 하는 안이한 반응에 니묄러 목사가 나치에 대해 남긴 말을 인용해 본다.

개인적으로도 이것이 진정 '연대'를 해야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니묄러 목사는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의 함장이었으나 전후 성직자가 되어 나치에게 저항하다

 37년부터 45년까지 집단수용소에 수용됐고, 전후에는 서독의 군비 확충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의 지도자로 크게 활약했다.

 이 부분의 언급은 1968년 10월 14일 독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자 그들은 노동조합 운동가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노동조합 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유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저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에는 저를 지켜줄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다른 책, '폭격의 역사'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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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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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저작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대담집.

이 한 권의 책은 선생의 인생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갖가지 국면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때문에 대담집이라는 꽤나 책장이 잘 넘어갈 것 같은 형식을 취한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말 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더디게 읽었다.)

 

비록 부분부분 선생의 강한 자존심이나 자긍심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충분히 그럴만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그 세월을 살아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부제가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던 시절(하긴 누가 저 시대를 살기 쉬웠다고 하겠냐마는.)

선생은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건방스럽게 선생에게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면,

이 책 내내 '현실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나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정치판이라는 거. 더럽고 비열한 무대라는 것.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저런 더러운 판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들은 저 '더러운' 판에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직접 저 더러운 판에 뛰어들어 정치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저들을 계속 바라보고 감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더러운 정치인들.. 이렇게 혀를 차고 돌아서는 것은.

하지만 돌아선다고 해서 당신 등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자. 내가 이렇게 쉽게 돌아서는 순간, 그리고 쉽게 잊을 수 있는 순간에

나처럼 쉽게 돌아서지도 못하고, 돌아설 힘조차 없고, 잊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쨌거나 선생의 저작 '베트남 전쟁'을 읽고 싶어졌다.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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