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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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스무 살 시기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

 

이런 홍보 문구와 야시시한(?) 표지라면, 이 책은 그야말로 마케팅의 실패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런 악플로 리뷰를 시작하는 것은 이 책이 적어도 이런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건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좋게 봤다는 뜻)

어떤가? 표지와 홍보 문구만을 봤을 때,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이 소설의 내용은?

 

  "야 이 나쁜 놈들아, 우리 언니 잡아가지 마아, 야 이 나쁜 놈들아, 우리 언니 잡아가지 마아......"

  피 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너의 슬픔에 내 슬픔이 공명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금, 2번 시다 판님이가 3번 미싱사 경자를 잡아가지 말라 외치는 것은 수경이 경애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이제라도 화답해야 한다. 내가 인간이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우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 쪽으로 돌려놓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런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네가, 어디 그 시대를 현재와 비교하느냐고.

그러나 백이면 백,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거나, 혹은 그 시대를 '아픔'으로 지내지 않은 자이다.

혹은, 그 '아픔'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파렴치한이거나.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단순한 '청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정신의 청춘', '마음의 청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이 책의 홍보문구에 더 화가 난다.)

'저' 인간의 슬픔과 아픔, 고통을 내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적어도 그것에 냉소를 보내지 않는 것.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미안해, 수경아, 미안해.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해......"

  그건 진심이었다. 그 순간 수경이 화를 냈다.

  "왜, 왜, 니가 미안한 건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진짜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은 가만있는데에, 왜, 왜 그러는 건데에. 내가 말했잖아. 난 단지 이상할 뿐이라고. 이상하고 이상해서 숨쉬기가 힘들 뿐이야. 나도 숨을 크게 쉬며 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숨을 크게 쉬려면 가슴이 너무 아파. 여기 이 가슴 한가운데가 터져버릴 것만 같단 말야"

 

나는, 숨쉬기가 힘들만큼 아픈 적이 있었던가? 하다못해 나를 위해서라도?

... 고통을, 아픔을, 슬픔을. 그것을 알아야 뭐하냐고 냉소짓기 전에 눈물부터 흘리리라.

사내 눈에서 찔찔 흘러내리는 눈물 자욱보다도, 쿨한 냉소가 훨씬 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싶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이라면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시인이 혼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병원 현관을 나섰지만,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집에 가면, 집이 주는 안락함이 내 고통을, 내 아픔을 모른 체할 것이 나는 겁났다. 집에 들어간면 나만 편해질 것이 나는 두려웠다.

 

나도 겁이 난다. 나도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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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5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5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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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시리즈는 2권까지만 사서 보고 그 다음은 뭐 나오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있었는데, 어느덧 5권이 나온 모양이었다.

또 '아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려는데, 이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DVD를 준다는 말에 혹해서 사버렸다.

그러나 백과사전을 주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사서 볼만했다라는 결론. (앞서 사서 봤던 1, 2권도 꽤 좋았다)

 

3, 4권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이번 5권은 이전의 책과 형식이 조금 다르다.

주제에 상관되는 국내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붙여놓은 것. 꽤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교육제도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얼마 전 학원 광고로 논란이 있었던 신해철 씨와의 인터뷰도 있었는데 여러 모로 생각해볼 글이었다.

물론 마치 자신이 공교육을 비판하기 '위해서' 광고를 찍은 것'처럼' '보이게' 된 것에는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지적은 그가 연예인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되새겨볼만한 말이다.

 

  한번은 라디오에서 아동과외 문제를 다루면서 아동 사교육과 조기교육에 대해 극렬하게 성토한 적이 있다. 적어도 어린애들을 과외 열풍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사교육 반대론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런데 게시판에 한 청취자가 글을 올렸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하나 둘 셋! 하면서 동시에 그만두기 전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그 글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호응하더라. 나는 그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동시에 그만두는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다 그렇게 해도 나는 내 자식 그렇게 안 키운다고 해야 끝날 문제다. 이것은 내가 쫄지 말아야 끝나는 문제다. 우리나라 교육문제는 집단적으로 위협받거나 집단적으로 쫄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만들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산 참사 피해 유가족과의 인터뷰는 정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잊어서도 안된다. 결코.

이 책을 사서 보지는 않더라도 혹시 서점에 가서 볼 기회가 있다면, 이 인터뷰만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병원에서 망연자실 있으려니 용산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유족의 서명날인을 맏아야 하니 경찰서로 빨리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기에 대고 악을 썼습니다. 야, 이 개자식아, 서명을 받을 일이 있으면 너희가 와야지 유족더러 오라 가라냐! 그랬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시신이 경찰서에 있는데 유족이 서명날인을 해야 시신을 인도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분이 솟아도 시신이 거기 있다는데야 안 가고 어쩌겠어요. 부리나케 용산경찰서로 달려갔지요.

  참, 어이가 없습디다. 서명을 다 받고 나더니 시신이 여기 없다는 거예요. 눈이 뒤집어졌지요. 야, 이놈들아, 사람 죽이고도 모자라 유족들 데리고 장난하냐! 시신이 여기 있다고 해서 허위허위 달려왔더니 이제와서 시신이 없다고? 책임자 나와라! 그러고 한 10분쯤 있으려니 책임자라고 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래요? 누가 그랬지? 누가 그랬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기가 막힙디다. 시신이 전부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 있다는 거예요. 시신이 왜 국과수에 가 있다는 거예요. 시신이 왜 국과수에 가 있냐고 물으니 부검 때문에 보낸 거랍니다. 유가족 동의도 없이 누구 맘대로 부검을 하느냐고 악을 썼더니, 원래 경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나요.

  저녁 8시쯤 되니 국과수에 갔던 시신들이 순천향대병원에 도착했다는 거예요. 달려갔지요. 그때부터 새벽 2시가 넘도록 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위에서 지시가 안 떨어져서 시신 확인을 못시켜준다지 뭡니까. 2시 30분이 되어서야 유족 대표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대요. 그런데 먼저 들어갔던 삭람이 내 손을 꼭 잡더니 안 보는 게 좋겠다고 해요. 그래도 내 남편인데 안 볼 수 있느냐고 우겨서 들어갔지요.

  두 사람은 얼굴 형체가 그대로 있어서 누군지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세 구의 시신은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내 남편이 있다는데도 말이지요. 손목과 발목이 잘려 있고, 두개골이 열려 있고, 뱃가죽이 벌어져 있고, 손가락들이 잘려 있고, 살점이 여기저기 뜯겨져 있고, 치아가 줄줄이 부러져 있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을까요.

  시신 한 구를 확인할 때마다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면서도 나는 다섯 구의 시신을 모두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결국 금니 하나와 체구를 보고 남편을 미루어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가 벌어진 바로 그날 유족들에게는 아무런 상의나 통보조차 없이 시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부검의 흔적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결코 불에 타 죽은 시신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화재에선가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지요. 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화염 속에서 사람들을 구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을 영웅으로 치하하고 포상했던 공권력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분도 지난 대선 때 저 괴물을 지금 저 자리에 올려놓는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쨌거나 사람 죽이라고 뽑은 것은 절대 아닌데.

정말 가슴이 턱턱 막히는 일들이 가득한 요즘이다.

하지만 분노는 할지언정, 체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사소한 일 하나라도 행동하고 저항할 것이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비웃는 것 따위 이제 완전히 무시하겠다. 그런 것 따위, 지금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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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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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책을 산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인데 '불한당의 세계사' 이후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사실 '불한당의 세계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지 잘 몰라서 공부 좀 하고 읽으려던 것이 이렇게 왕창 늘어져 버린 것. -_-...

 

저자는 16살 때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를 위해 책을 읽어주곤 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를 회고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보통 안내서나 2차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보르헤스는 왠지 그렇게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

어쨌거나 내겐 이 책이 꽤 도움이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칠일 밤'을 읽고나서 다시 보르헤스를 잡아볼 생각이다.

 

내가 보르헤스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우선 '지적인 소설'에 그리 익숙치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보수주의자'라는 근거 없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는 '흠. 그래도 꽤나 멋있는 보수주의자인걸'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아파트 책꽂이에서 보이지 않는 건 그가 쓴 책들이었다. 누가 와서 이런저런 책의 초판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확실히 잊어도 그만인" 이름이 찍힌 책은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한번은 내가 있는데 우체부가 커다란 소포를 가져왔다. 그 소포에는 이탈리아의 프랑코 마리아 리치가 호화롭게 만들어 보낸 '의회 El Congreso'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양장본에 케이스까지 검은 비단으로 싼 다음 금박으로 글씨를 입혔고, 수제작한 푸른색 브리아노 지(紙)에 인쇄를 하고 삽화도 전부 수작업으로 간지를 끼워넣었으며(탄트라 경전의 그림을 책의 삽화로 썼다), 책마다 일련번호를 매겼다. 보르헤스는 내게 책의 모양세를 묘사해달라고 했다. 유심히 듣던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책이 아니야! 초콜릿 상자지!"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우체부에게 그 책을 선물로 줘버렸다.

 

  "나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과 정반대야."

  그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믿지만 관심은 없지. 그런데 나는 관심은 있는데 믿지는 않거든."

 

거장으로 불리는 한 작가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는 자랑할만한(?) 경험에도, 이 책의 저자는 칭찬만을 늘어놓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이 읽을만하다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책 뒷부분에는 보르헤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 짧은 글과 함께 그의 어록이 실려 있다. 이것도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

마치 사전처럼 ㄱ~ㅎ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광고 : 우리는 아주 순진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지만, 그 물건이 우수하다는 말은 바로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진함의 대표적인 증거이다.

 

여튼 분량도 굉장히 적기 때문에 가볍게 읽고서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을 조금 좁힐 수 있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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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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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그것을 보는 이의 감정이 실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 뒷모습에도 앞모습 못지 않은 것들이 드러난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내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었다.

(그런거 보면 내가 참 따뜻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겁이 많은 인간이던지.)

 

등은 거짓이 없다라는 화두에서 시작하는 투르니에의 포토 에세이.

한 장의 사진에서 저렇게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것에 감탄을 하면서 읽게 된다.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 우정은 이 두 장의 사진에서처럼 타인들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에 의해서 그 본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낸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가 휘두르는

가장 잔인한 폭거. 나는 나를 위해 세수하고

옷을 차려입지만 머리는 너를 위해 매만진다.

그와 반대로 스님과 병사와 죄수의

까까머리는 비인간적인 규율의 질서를 위해 타자와의 자연스럽고 사회적인

관계의 단절을 나타낸다.

 

뒷모습은 정직하며, 골똘하다는 역자 김화영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모습을 볼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고는 하는데, 등을 밀기 위해 아버지의 등을 대면하는 순간이 조금씩 서글퍼진다.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 뒷모습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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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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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의 총수 김어준. 아마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3학년 때던가. 그때부터 딴지일보가 무지 유행했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딴지일보 사이트에 들어가본 적도 없고, 글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다.

기본적으로 '졸라', '씨바'와 같은 문체가 나랑 맞질 않아서 그랬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요즘엔 한겨레 esc에서 인생상담(?)을 연재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몇몇 글은 읽어도 봤다.

그래도 예전의 선입견이 강해서인지 '뭐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_- 도서관에 간 김에 이 책도 빌려왔다.

역시나 그의 글은 따꼼따꼼하다. 좀 많이.

 

'장애우란 신조어를 보자. '장애자'나 '장애인'이란 호칭엔 비하의 뉘앙스가 있다며 몇 년 전부터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홀대해왔다는 죄책감을 담고 있다. 애초 선의에서 출발한 게다. 그러나 이 호칭은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만다.

  이 호칭은 장애인을 스스로 주체가 아니라 비장애인의 친구로서, 그러니까 상대적 객체로서만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장애우'는 장애인 스스로는 쓸 수가 없는 말이다.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비장애인의 친구다', 라고 말하는 거니까. 게다가 장애인들더러 모든 비장애인들이 나서서 당신 친구가 되어주는 걸 바랄 거라 여기는 건가. 그들은 불쌍한 존재니까? 이런 단어를 만든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신체 기능 일부가 고장 났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친구가 정말 되고 싶은가? 이 무슨 시건방진 은혜인가?

 

분명, 그의 어조는 강하다. 하지만 '장애우란 말, 좀 생각해 봐야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저분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느낌이예요'

라는 말투로는 이 글을 읽고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전혀.

물론 이건 나만의 지론이지만, 글은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내용이 충실할 때, 그 좋은 표현이 그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다.

(이런 의미로 나는, 김훈의 '멋진 글'이 결코 좋은 글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에 '문학'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문학을 모독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경우에 처해서 상담을 요청하는데 딴지총수의 답변들은 이러하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친과 헤어져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 질문, 남에게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이렇게 바꿔,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기꺼이 감당할 만한 가치가, 그 남친에게 과연 있는 건가. 그 남친은 경제적 불안을 감수할 만한 행복을 내게 주고 있는 건가. 그 남친과 함께라면 삶의 불확실성을 함께 맞서겠단 결의가 생기는가. 그러니까 그는, 그 양복인가.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렇게 스스로 따져볼 당신만의 5분인 게다.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면, 결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결혼보다 급한 건, 세계관이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뉴턴은 이걸 작용-반작용이라고 했다. 근데 이 말 가만 뒤집어보면, 비용 지불한 건, 온전히, 자기 거란 소리다. 이 대목이 포인트다. 공짜가 아니었잖아.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존재할 수 없어야, 종교가 산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간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 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일수록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게 실제 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질문은 나에게 하지 말고 당신에게 하라. 당신이 지금 더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잃기 싫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원하는 것을 택할 용기는 있는가. 고로, 나는 누구인가?

당신을  알게 되었다면, 당신을 존중하라. 물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고. 또 물론,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요즘 '루저'니 뭐니 소란스러운데, 듣다보면 아주 짜증이 난다. 그래서 관련 기사도 보지 않고 그냥 치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키가 180 안되는 사람일 뿐인가? 그거 없으면 미치도록 화날, 그런 인간 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게 따지면, 당신이 수없이 마음 속으로(혹은 대놓고) 매긴 외모 기준의 점수는 어떻게 할텐가?

왜 '당신 같은 여자 나도 싫거등요~!!'라고 해버리지 못하는가? 공중파? 풋. 당신도 나가서 말하라. 왜 못하는가?

왜 당신이 할 땐 쿨하고, 왜 남이 할 땐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정말 내가 볼 땐 요새말로 '열등감 쩐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그리고 그 열등감의 기저엔, 딴지총수도 강조하는 자존감의 결핍(자존심이 아니다!)이 자리잡고 있다.

남의 일에 신경 좀 그만 써라. 제발 좀.

아, 사회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열폭하는 거라고? 웃기시네. 당신이 언제부터 정의의 사도였다고. 사회에 분노할 일이 그렇게나 없던가?

인터넷에 검색해서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찬찬히 읽어보라.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작은가?

 

어쨌거나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이 상담집을 읽다보면 나도 함께 욕먹고 두드려 맞는 기분인데, 이상하게 '건투를 빈다'로 느껴진다.

아주 금방 읽을 수 있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물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이 항상 총수와 같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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