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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딴지일보의 총수 김어준. 아마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3학년 때던가. 그때부터 딴지일보가 무지 유행했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딴지일보 사이트에 들어가본 적도 없고, 글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다.
기본적으로 '졸라', '씨바'와 같은 문체가 나랑 맞질 않아서 그랬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요즘엔 한겨레 esc에서 인생상담(?)을 연재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몇몇 글은 읽어도 봤다.
그래도 예전의 선입견이 강해서인지 '뭐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_- 도서관에 간 김에 이 책도 빌려왔다.
역시나 그의 글은 따꼼따꼼하다. 좀 많이.
'장애우란 신조어를 보자. '장애자'나 '장애인'이란 호칭엔 비하의 뉘앙스가 있다며 몇 년 전부터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홀대해왔다는 죄책감을 담고 있다. 애초 선의에서 출발한 게다. 그러나 이 호칭은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만다.
이 호칭은 장애인을 스스로 주체가 아니라 비장애인의 친구로서, 그러니까 상대적 객체로서만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장애우'는 장애인 스스로는 쓸 수가 없는 말이다.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비장애인의 친구다', 라고 말하는 거니까. 게다가 장애인들더러 모든 비장애인들이 나서서 당신 친구가 되어주는 걸 바랄 거라 여기는 건가. 그들은 불쌍한 존재니까? 이런 단어를 만든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신체 기능 일부가 고장 났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친구가 정말 되고 싶은가? 이 무슨 시건방진 은혜인가?
분명, 그의 어조는 강하다. 하지만 '장애우란 말, 좀 생각해 봐야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저분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느낌이예요'
라는 말투로는 이 글을 읽고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전혀.
물론 이건 나만의 지론이지만, 글은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내용이 충실할 때, 그 좋은 표현이 그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다.
(이런 의미로 나는, 김훈의 '멋진 글'이 결코 좋은 글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에 '문학'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문학을 모독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경우에 처해서 상담을 요청하는데 딴지총수의 답변들은 이러하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남친과 헤어져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 질문, 남에게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이렇게 바꿔,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기꺼이 감당할 만한 가치가, 그 남친에게 과연 있는 건가. 그 남친은 경제적 불안을 감수할 만한 행복을 내게 주고 있는 건가. 그 남친과 함께라면 삶의 불확실성을 함께 맞서겠단 결의가 생기는가. 그러니까 그는, 그 양복인가.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렇게 스스로 따져볼 당신만의 5분인 게다.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면, 결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결혼보다 급한 건, 세계관이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뉴턴은 이걸 작용-반작용이라고 했다. 근데 이 말 가만 뒤집어보면, 비용 지불한 건, 온전히, 자기 거란 소리다. 이 대목이 포인트다. 공짜가 아니었잖아.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종교의 구속력은 그 목표의 도달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거기 도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존재할 수 없어야, 종교가 산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간다. 종교의 음모다. 우린 이기적인 건 곧 죄악이라 믿도록 훈육되었다. 하지만 이기심은 모든 생명의 존재 원리다. 배타적으로 삼투압하지 않는 나무는 말라 죽는다. 여기까진 기본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기적이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우리 모두의 원죄가 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건 정치의 음모다.
이기적 권리가 충돌할 때 그 갈등을 해결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이기적 욕구는 당연히 기본이라 인정하고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 질서를 조직하느냐 고민하기 보다, 욕구 그 자체를 공격해 전체의 자유도를 관제하는 방식, 혼란 비용을 지불하느니 죄책감으로 갈등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 이 근본주의적 통제 방식이 바로 우리 정치의 발명품이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일수록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게 실제 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질문은 나에게 하지 말고 당신에게 하라. 당신이 지금 더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잃기 싫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원하는 것을 택할 용기는 있는가. 고로, 나는 누구인가?
당신을 알게 되었다면, 당신을 존중하라. 물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고. 또 물론,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요즘 '루저'니 뭐니 소란스러운데, 듣다보면 아주 짜증이 난다. 그래서 관련 기사도 보지 않고 그냥 치웠다.
당신은 누구인가? 키가 180 안되는 사람일 뿐인가? 그거 없으면 미치도록 화날, 그런 인간 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게 따지면, 당신이 수없이 마음 속으로(혹은 대놓고) 매긴 외모 기준의 점수는 어떻게 할텐가?
왜 '당신 같은 여자 나도 싫거등요~!!'라고 해버리지 못하는가? 공중파? 풋. 당신도 나가서 말하라. 왜 못하는가?
왜 당신이 할 땐 쿨하고, 왜 남이 할 땐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정말 내가 볼 땐 요새말로 '열등감 쩐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그리고 그 열등감의 기저엔, 딴지총수도 강조하는 자존감의 결핍(자존심이 아니다!)이 자리잡고 있다.
남의 일에 신경 좀 그만 써라. 제발 좀.
아, 사회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열폭하는 거라고? 웃기시네. 당신이 언제부터 정의의 사도였다고. 사회에 분노할 일이 그렇게나 없던가?
인터넷에 검색해서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찬찬히 읽어보라.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작은가?
어쨌거나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이 상담집을 읽다보면 나도 함께 욕먹고 두드려 맞는 기분인데, 이상하게 '건투를 빈다'로 느껴진다.
아주 금방 읽을 수 있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물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이 항상 총수와 같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