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지승호 인터뷰어, 김수행 대담 / 시대의창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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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창'에서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인터뷰 시리즈.

이 책은 얼마전 서울대에서 은퇴한 서울대의 경제학 교수, 김수행과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인터뷰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깊은 논의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는 부분을 쉽게 풀어낸다는 점이 장점.

'자본론'이야 워낙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있고 나도 읽지도 못했지만, 김수행의 주장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명확하다.

그만큼 현재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내주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은 해보라'는 것, 그리고 '국가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면 자유로워야 될 거 아녜요? 시장에 맡겨서 놔두자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구요. 시장에 맡겨서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공기업을 민영화했단 말입니다. 가스, 전기, 철도 같은 것을 전부(영국의 경우를 말하고 있음). 사기업이 그것을 인수했으니 이윤을 보려고 하잖아요. 단기간에 이윤을 많이 뽑으려고 하니까 결국은 배당을 많이 해야 돼죠. 그렇게 하면 실질적인 설비개선은 안 된다구요. 그런 과정을 거쳐 철도 같은 것이 다 망했잖아요. 서비스의 질은 낮아지는데 요금은 자꾸 올라가니까 사람들이 '무슨 짓이냐, 민영화하면 서비스는 좋아지고 가격은 낮아진다고 했지 않느냐?'고 나서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규제하기 위해서 정부 기구를 다 만들었다니까요. 수도관리는 오피스 오브 워터, 가스는 오피스 오브 개스, 철도는 오피스 오브 레일로드, 이런 식으로 다 만들었다구요. 이처럼 시장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개념이 실제로는 안 돼요. 이명박 같은 사람은 경찰서까지 뛰어가는 사람이잖아요. 전두환 하듯이 여기저기 쫓아다닐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엄청나게 독재를 할 가능성이 많다구요.

 

시장에 상품이나 화폐만 있을 수는 없어요. 시장이 혼자서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사고팔 때는 하나의 법규가 있어야 돼요. 시장에는 정부가 개입을 하게 되어 있다구요. 그게 법적인 개입이든지, 어떻든지 말이에요. 가령,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안내면 잡아내야 할 것 아녜요? 사기를 쳤다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구요. 이렇게 보면 시장이라고 하는 곳은 언제나 정부가 개입을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시장과 정부를 대립시키는 것은 말이 안 돼죠. 그런데 주류경제학자들은 시장과 정부가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얘기하고, 규제를 없애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처럼 얘기하니까 문제가 생겨요.

 

이처럼 그가 보는 '현실'도 굉장히 '상식적'이다. 어려운 숫자나 공식 따위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기본적으로 자기의 세력권이 부자하고 대기업이기 때문에 이놈들한테 세금 인하해주고, 상속세 낮춰주고 분명히 그럴 거라구요(이 인터뷰는 이명박 정권 초기의  것이다). 그러면 세입이 줄어드는데, 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적은 세입을 가지고 일반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쓸 가능성은 별로 없다구요. 그런데다 자꾸 북한하고 대결구도가 지속되면 안정을 위한답시고 무기 사와야 하고, 일반 시민들 생활은 분명 더 나빠질 겁니다. 그런데다가 교육을 학원에서 전부 할 수 있게 해버리니 사교육비 지출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더 궁핍해지겠죠. 아파트 값을 올리는 것을 가만히 둔다든지 그러면 더 그렇겠죠. 서민들의 미래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독재를 하면서도, 정부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자유주의'라는 말로 손을 놔버리는 상황.

 

정부가 돈이 없어서 뭘 못한다고 하면 그건 직무유기에 해당해요. 돈이 왜 없어요? IMF 때 공적자금이 160조였어요. 그걸로 은행들 다 구제해줬잖아요. 은행장들, 이사들이 잘못한 것을 국민 혈세로 해결했다구요.

 

'상식'이야 분명 필요한 기본조건이지만, 사회의 담론이 '상식을 지키자'의 수준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분명한 위험의 증거다.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연대를 하지 않으면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

소비를 살린다면서 최저임금을 깎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는 걸까?

고소득층의 면세를 추진하면 소비가 살아난다고? 웃기시네. 그들의 그 돈이 어디 생필품 사는 데 들어가던가?

 

원론적이고 또 일면으로는 계몽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김수행 교수의 말은 오히려 2000년대에 너무나 적절하다.

지승호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는 더 강력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다든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힘을 모아서 이 사회에 대해서 도전을 해야 하고, 그것을 지식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야 한다'는 겁니다.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자꾸 임금 인상에만 매몰되면 그 운동은 결국은 망한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새로운 사회가 안 온다는 말이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될 때 새로운 사회가 온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원론적인 말들이 되풀이되는 경향이 좀 있고, 중간 부분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보다 말이 더 많은 점이 좀 불만이기는 했다.

하지만 맨 뒷부분에 우석훈이 대화에 참여하면서 논의가 활성화되는 부분은 좋았다.

깊이 있는 논의를 기대하기보다는, 문제의식의 촉발점을 찾는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

어렵지 않으니 읽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애덤 스미스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보이지 않는 손'? 김수행 교수의 말에 의하면 '국부론'에 그 말은 단 한 번 나온다고 한다.

겨울 방학 때 '자본론'의 선수학습으로 '국부론'부터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원론'이 짜증난다면, 다시 한 번 마르크스의 '원론'을 제시해본다. 짜증만 낼 것이 아니라, '원론'이 왜 '원론'인가를 생각해봐야할 때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강도를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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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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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의 인터뷰를 모은 책. 방학 동안 '시의성'이 떨어지면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을 우선 '처리'(?)하기로 하고 읽은 첫 번째 책.

표지에 나와있는대로 총 7명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이 책이 2007년도에 출간되었고 인터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판의 날은 주로 개혁세력, 노무현 정권을 향해 있다.

때문에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지금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과오 중에 하나라면, 바로 '빨갱이'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빨갱이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정권은 큰 틀에서 한나라당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정책들을 밀어붙여서 관철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정치적인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오른쪽의 두 세력이 경쟁하면서 그 나머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내지는 진보로 인식되거나 실제 그렇게 자처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감각이 없는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는 개혁적 보수라든지 자유주의 보수라든지 이렇게 규정해야 하는데요. 기존의 보수, 진보 이런 나눔, 그런 것에 매몰되면서 잘못된 현상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진보의 가치가 퇴색해 버리는, 동반해서 퇴락해 버리는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구요. (홍세화)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김규항)

 

유연한 진보, 중도, 신진보, 이런 다양한 수식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수식어야말로 진보답지 않은, 진보로부터 뭔가 얻으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 형식적 민주주의는 YS, DJ를 거치면서 사실은 공고화된 것입니다. 탈권위나 지역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 없고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표를 준 다수 서민들의 가장 핵심적인 요구와 기대였느냐?'라는 점에서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그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다수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한 것이구요.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오히려 자본의 전면적인 자유화를 도모하면서 서민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하는 '유연한 진보'는 사이비 진보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대변자로서 진보의 카운터 파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상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후,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정반대로 왜곡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싶어했으나, 그는 진보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다.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진보의 핵심 개념인 '계급'을 생각한다면, 노무현 정권을 '진보' 혹은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상식이하'의 일이다.

(여기서 북한을 들먹거릴 수도 있겠는데, 훗. 그가 과연 '친북주의자'였을까? 아니, 그 전에. 북한이 어디 '빨갱이 국가'인가, 왕조국가지)

그럼에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진보였다고 규정해버리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그는 진정성을 가진 자유주의자였으며, 그들을 둘러싼 일파들은 그보다도 못한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 일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나름의 진정성을 수없이 왜곡시키고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랬던 현실을 그의 죽음으로 다 묻어버리고, 살아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함께 묻으려 하고 있다.

그, 혹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죽음'이라는 엄숙함을 내세워 인신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 이명박 대통령 같은 괴물과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집단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선을 더욱 분명히 그어야하고, 내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터뷰 모음집이다 보니 쉽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인터뷰 대상에 따라 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홍세화 씨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여기 그의 인터뷰를 읽는 것은 왠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면 김규항의 인터뷰는 100% 동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웃기도 했다. ^^;

 

뭐... 지금 굳이 사서 보길 권할 그런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오히려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은 틀렸다. '두 개의 대한민국, 하나의 현실'일뿐.

 

글은 제가 보기에는 불편해야 돼요. 그리고 사람이 글을 잘 쓰자면 위험해야 돼요.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이미 죽은 학문입니다. 학문이 위험해야 재미가 있죠. 독자들이 실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의 문제인데 위험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글은 안 쓰는 게 더 낫죠. 자기 연구나 하는 게 낫습니다. (박노자)

 

'시민 사회가 얼마만큼 이 모순 구조를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느냐, 같이 동참할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고 나서 비판을 하든지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홍세화)

 

부모들은 아이들 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진짜 인생을 위한 준비기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인생은 매순간이 중요하고 매순간 세계와 나의 소통이 있는 것이죠.

 

계급이라는 말은 어떤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바라보자는 말일 뿐이예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불편함과 똑같은 양의 위로를 주는 글을 나는 혐오한다. 내 글이 담는 불편함은 '과시'가 아니라 '권유'다. '글이나 읽고 해소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함께 실천을 고민해야죠' 하는 권유 말이다. (김규항)

 

꼭 누굴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처벌하려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너무 쉽게 했단 말이죠. ……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처벌이 안 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하는 개념이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책임지지 못했을 때 그 가족들은, 남아 있는 당사자들은 그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가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보복하지 마라. 대신 사회가 처벌해준다'고 하니까 비로소 막을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걸 포기해놓고 뭘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화해를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홍구)

 

최종적으로 해방된 사회의 상을 그리고 나머지 운동들을 그쪽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진중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생들이 워낙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보수화를 걱정하기에 앞서서 교수들의 보수화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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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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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었던 건축 관련 책. '꽤 괜찮다'라는 말만 듣고 사놓았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부제가 '인문적 건축이야기'인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사람일진데, 어찌 건축이 인문적이지 않을 수 있으랴.

 

  운동장 주위에는 이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동상이 나열되어 있다. 이 동상으로 세종대왕보다 이순신 장군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한동안 이 땅의 정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의 배경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반공교육이 중요할 때는 이승복 동상이 세워지곤 했고 민족 자주성이 강조되면서 단군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학교는 건축으로 구현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아.. 여의도의 폭파대상 1호 건물 근처의 다른 건물들 높이가 왜 낮은지에 대한 설명도 이 책에서 처음 읽었다.

(제기랄. 그딴식으로 하면 없는 권위가 세워진대?)

 

저자는 건축의 인문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건축이 치밀한 계산으로 명확한 한계를 벗어나는 작업임을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건축이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외치는 방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도 큰 성과.

 

  <경희대학교 건축조경전문대학원>은 체육관을 개조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낡은 건물을 개조하여 건축 교육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을 맡게 된 건축가는 건축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 교육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도제 수련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접촉과 토론이 더욱 중요한 건축 교육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건축가의 이런 가치관은 계단, 복도를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만들었다. 건물 곳곳을 종횡무진 뚫고 지나가는 이 동선 공간들은 결국 사람들의 움직임을 서로에게 노출시킨다. 그리고 호객과 흥정이 떠들썩한 시장처럼 끊임없는 접촉과 토론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그 장치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생각 없이 타고는 했던 에스컬레이터 등의 수단이 상징적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흥미진진.

 

  움직임과 관련하여 건축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소도구로는 에스컬레이터만한 게 없다. 에스컬레이터는 엘리베이터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송능력과 개방감을 가진 발명품이다. 이 신기한 물건은 자신이 움직이는 물체이면서 어디에 가져다 걸어도 3차원의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걸려야 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박력을 주는 데는 더 없이 좋은 물건이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이해 또한 빠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눈으로 본 건축을 설명하되, 이제 당신의 눈으로 좋은 건물을 찾아내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맘에 들었다.

10년 후에 강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인가 내 인생에 중요한 강의였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경험이랄까.

 

사실 건축과 건설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 다른 영역의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건축 없는 건설'을 하는 단순한 삽쟁이라는 것도 더욱 명확해진다.

 

  교각과 상판으로 이루어진 다리는 간단하다. 이런 값싼 다리가 가장 가치 있던 시대가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 간단함은 만들기 쉽다는 의미에서의 간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드는 이가 지닌 사고의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의 명쾌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것은 건너자는 의지 이외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없다. 문화라는 덕목으로 거론할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들은 '대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후손에게 물려주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다. 가장 값싼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값싼 문화가 만들어진다.

 

  <교보생명 사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인도라는 한정된 부분에만 서 있지 않는다. 건물 앞의 마당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앞의 넓은 공터는 언제나 누구나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사무소 건물 앞에 으레 있기 마련인 계단도 없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대지는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그 지하에 들어가서 책을 사고 친구를 만난다. 누구나 책을 살 수 있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건물은 주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 되었다. 이 지하가 1주일만 문을 닫으면 한국의 지식 산업계는 비상사태에 돌입하여야 한다. 그 개방은 지명도로 곧 치환되었다. 이를 통하여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이는 그 바닥 넓이만큼의 임대료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보상을 받고 있다. "아, 그 왜, 누렇고 옆으로 줄쳐진 바로 그 건물 15층"과 "교보 15층!"이 어찌 비교될 수 있으랴.

 

  여기서 건축가는 다시 '누구를 위한?'이라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도로와 건물 사이가 계단으로 분리되어 있다면 그 '누구'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은 제외된다. 주차장이 있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제외된다. 자동차가 있어도 기사가 없는 사람은 제외된다. 담이 있으면 거리의 시민은 모두 제외된다. 그만큼 건물은 배타성을 띠게 된다.

 

삐까뻔쩍한 '광장'을 지으면 뭘하는가. 폐쇄되고 포위된 광장은 광장이 아닌 것을.

'그들'이 세금으로 지어대는 그 '기념물'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들인가. 누구를 위한 '삽질'인가.

 

어쨌거나, 저자의 인문학적 소양과 글솜씨까지 더해진 굉장히 멋진 책이다.

뒷부분에 한 건물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부분이 생각보다 짧아 아쉬움이 계속 남았지만, 이제 건물을 보는 것은 나의 몫이니.

 

각주나 미주, 각종 부록까지 다 읽고야마는 변태같은 성격으로-_-,

저자가 이 책의 출판사인 효형출판의 건물을 건축설계한 사람인 것도 알 수 있었다. ㅎㅎ

언제 건물 구경하러 파주출판단지나 한 번 가볼까. 거기 특이하게 생긴 건물들 많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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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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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소란을 일으키고 다니는, 현재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 점장의 '공짜로 사는 법'.

하지만 이 '공짜로 사는 법'은 누구에게 빈대를 붙거나 아끼고 아끼는 그런 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힘으로 멋대로 살아가기'라는 이 책의 기본 원칙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한테 신세만 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빈대 붙는 것도 지나치면 폐만 될 뿐이다. 게다가 남에게 얻어먹기만을 기대한다면, 지금처럼 바가지를 씌우는 경제의 포로로 잡혀 있는 얼간이 소비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돈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그놈이 그놈인 셈이다.

  폐만 끼치는 구두쇠가 되는 것은 인간 말종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까 돈이 좀 생기거나 먹을 것이 남으면 곤란에 처해 있는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잡힌다!

 

그가 재활용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인데, 어쨌거나 구의원 선거까지 나온 그의 여러 작전이나 데모를 보고 있으면 포복절도.

찌개 투쟁, '내 자전거 돌려줘' 데모, 3인 데모, 바람맞히기 데모 등. 그 중에도 '3인 데모'는 진짜 웃겼다.ㅋㅋㅋ

그가 구의원 선거에 나온 것도 당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다.

 

소리를 중시하는 이유는 우선 우리가 즐겁게 하기 위해서지만 주변의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질서정연하게 데모를 해봐야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게 뭔 데모람. 모처럼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쌓이고 쌓인 불만을 터뜨리려고 작정했다면 틈만 나면 음향을 꽝꽝 울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교통을 마비시켜 조금이라도 세상을 들썩거리게 해야 보람이 있다. 이게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거다. 까불지 말라는 경고를 귀청이 떨어지게 알리려면 마냥 예의 바르게 굴 수가 없는 법이다. 대혼란 만만세!

 

종종 '합법적' 집회 운운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데.

그 '합법'이 어떤 '합법'인지나 알고나 얘기하는 건가? 매미 소리보다도 작게 소릴 내면서 인도로 걸으라고? 푸훗.

'합법적'으로 하면 관심이나 가져줄 것처럼 얘기하는 그들의 위선에 이젠 구역질이 나온다.

선거로 당당히 뽑힌 사람을 왜 끌어내리고 욕하고 난리냐고? 당신들 기억력 참 안좋아. 당신들이 했던 건 기억 안나?

뭐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그가 쿠데타라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던가?

인터넷에서 술자리에서 그렇게 대통령 까던 거 기억안나? 근데 지금 저 놈은 그것도 못하게 하잖아. 안그래? 웃겨요, 아주.

 

어쨌거나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노동운동과 다른 점은, 어떻게 하면 돈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느냐를 고민한다는 거죠. 다시 말해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노동운동은 현존하는 체제 안에서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을 전제로 삼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대가를 받을까를 궁리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건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니까 일체 아무 것도 안하겠다고 떠들어대죠.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거야. 그냥 내 멋대로 살아갈 거야." 바로 이렇게요.

 

중간 중간 그가 실제로 벌였던 소동과 각종 표현들이 '푸훗!'하게 만드는 책이라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급진적인 '행동가'의 글인 셈이다.

최규석이 삽화를 넣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책을 사서 보게 되었는데, 겉으로 포장된 그 가벼움에 비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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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 한국 공론장의 위기와 전망
손석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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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손석춘 씨의 책. 미디어 비평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무래도 가장 시장 점유율이 높고 따라서 영향력도 큰 조중동 3사의 논설과 기사가 주요 비평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제점이 가장 많기 때문. -_-

저자가 줄기차게 주장하듯이, 신문의 논조는 각기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논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조를 숨기면서 악의적인 왜곡을 일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이 '찌라시'들을 언론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중앙일보는 한국교육개발원의 발표를 28일자 3면에 편집하면서 "평준화 지역 학력 더 높다?"라는 표제를 달았다. 물음표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처음부터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기사는 학계에서 "무리한 연구"라는 의견이 많다며 그 근거로 "연구에 사용된 기초 자료에 한계가 있고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중앙일보의 보도에 대해 당사자인 김기석 교수는 강력히 반발했다. 김 교수는 자신이 기자 설명회에서 '평준화가 학력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는 지난해 KDI 논문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정부가) 자료를 안 줬기 때문"으로 이유를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이를 자신의 연구에 대해 한계를 토로한 것으로 오도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종전 연구의 자료 한계를 지적한 말을 이번 우리 연구의 자료나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한 것은 명백한 오보"라며 "평준화를 깨기 위해, 신념을 보도하기 위해 이렇게 사실을 왜곡해도 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반문했으나 아마 저들은 침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냥 자기들이 의도한대로 싸지르듯이 기사를 남발한 뒤에 책임지지 않는 이 따위 것들이 무슨 신문이며 언론인가.

그리고 그런 기사들을 남발하는 것들이 무슨 기자인가.

(뉴스위크에서 이건희를 'The Hermit King'이란 타이틀로 특집보도한 것을 '수도자적 경영인'으로 옮기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논리와 분석은 없고 주장과 왜곡만 난무하는 저것들은 종이낭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때문에 철도노조 게시판에 한 노동자가 올린 글은, 저자의 말대로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찌라시. 참 반가운 단어를 들어 봅니다. 어릴 적, 논쟁의 정점에서 모두를 한방에 보내 버리는 '그거 신문(방송)에서 봤어!'를 그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보게 됩니다. 사실은 사라지고, 쟁점은 묻혀 버리는, 그래서 누구라도 쉽게 뱉을 수 있는 그 말, '시민들의 불편을 볼모로 한 파업!' 얼핏 돌이켜 봐도 20년은 들어온 것 같습니다. 2,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직위 해제한 것이 '법의 엄정 적용'이 돼 버리고 조합원 하나하나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것이 '원칙의 고수'가 돼 버리는, 충혈된 눈동자에 빰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그 참담한 심정의 노동자들을 마치 '패잔병' 취급하는 찌라시들을 오늘 다시 만나게 됩니다."

 

여러가지 분석도 좋았지만, 뒷부분에 수록된 '언론의 후보자 공개 지지'에 관련된 부분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고, 이 문제가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꼼꼼히 기사나 논설을 분석해나가는 방식은 마치 학부 수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학 초년생들이 읽어볼만한 책이다. 특히나 '난 언론에 속지 않아'라는 위험한 믿음까지 만들고 있는 요즘 더욱 그러하다.

더군다나 미디어 악법 또한 날치기 통과되지 않았던가.

 

책의 내용에 언급된 사설이 신문 이미지 그대로 스캔되어 작은 사이즈로 삽입되어 있는데, 꼬박꼬박 눈아픈거 참아가면서 읽었었다.

그러다가 반쯤 읽어가면서 이미지로 편집되어 있는 사설 전문은 포기해버렸다. 눈 아픈 것은 참겠으나 열 받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 기자도 먹고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이... 라는 말 따위, 웃기지 마라. 이젠 들어주지 않을테다.

 

이건 사족인데, 손석춘 씨가 사용하는 몇몇 단어나 문체가 좀 낯설어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강조점을 찍기 위해서인지 문단의 시작을 '그래서다.'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빈도가 너무 잦아서 오히려 방점의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내 '글버릇'도 한 번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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