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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평점 :
지승호의 인터뷰를 모은 책. 방학 동안 '시의성'이 떨어지면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을 우선 '처리'(?)하기로 하고 읽은 첫 번째 책.
표지에 나와있는대로 총 7명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이 책이 2007년도에 출간되었고 인터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판의 날은 주로 개혁세력, 노무현 정권을 향해 있다.
때문에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지금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과오 중에 하나라면, 바로 '빨갱이'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빨갱이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정권은 큰 틀에서 한나라당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정책들을 밀어붙여서 관철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정치적인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오른쪽의 두 세력이 경쟁하면서 그 나머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내지는 진보로 인식되거나 실제 그렇게 자처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감각이 없는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는 개혁적 보수라든지 자유주의 보수라든지 이렇게 규정해야 하는데요. 기존의 보수, 진보 이런 나눔, 그런 것에 매몰되면서 잘못된 현상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진보의 가치가 퇴색해 버리는, 동반해서 퇴락해 버리는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구요. (홍세화)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김규항)
유연한 진보, 중도, 신진보, 이런 다양한 수식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수식어야말로 진보답지 않은, 진보로부터 뭔가 얻으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 형식적 민주주의는 YS, DJ를 거치면서 사실은 공고화된 것입니다. 탈권위나 지역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 없고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표를 준 다수 서민들의 가장 핵심적인 요구와 기대였느냐?'라는 점에서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그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다수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한 것이구요.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오히려 자본의 전면적인 자유화를 도모하면서 서민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하는 '유연한 진보'는 사이비 진보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대변자로서 진보의 카운터 파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상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후,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정반대로 왜곡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싶어했으나, 그는 진보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다.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진보의 핵심 개념인 '계급'을 생각한다면, 노무현 정권을 '진보' 혹은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상식이하'의 일이다.
(여기서 북한을 들먹거릴 수도 있겠는데, 훗. 그가 과연 '친북주의자'였을까? 아니, 그 전에. 북한이 어디 '빨갱이 국가'인가, 왕조국가지)
그럼에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진보였다고 규정해버리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그는 진정성을 가진 자유주의자였으며, 그들을 둘러싼 일파들은 그보다도 못한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 일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나름의 진정성을 수없이 왜곡시키고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랬던 현실을 그의 죽음으로 다 묻어버리고, 살아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함께 묻으려 하고 있다.
그, 혹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죽음'이라는 엄숙함을 내세워 인신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 이명박 대통령 같은 괴물과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집단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선을 더욱 분명히 그어야하고, 내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터뷰 모음집이다 보니 쉽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인터뷰 대상에 따라 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홍세화 씨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여기 그의 인터뷰를 읽는 것은 왠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면 김규항의 인터뷰는 100% 동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웃기도 했다. ^^;
뭐... 지금 굳이 사서 보길 권할 그런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오히려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은 틀렸다. '두 개의 대한민국, 하나의 현실'일뿐.
글은 제가 보기에는 불편해야 돼요. 그리고 사람이 글을 잘 쓰자면 위험해야 돼요.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이미 죽은 학문입니다. 학문이 위험해야 재미가 있죠. 독자들이 실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의 문제인데 위험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글은 안 쓰는 게 더 낫죠. 자기 연구나 하는 게 낫습니다. (박노자)
'시민 사회가 얼마만큼 이 모순 구조를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느냐, 같이 동참할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고 나서 비판을 하든지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홍세화)
부모들은 아이들 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진짜 인생을 위한 준비기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인생은 매순간이 중요하고 매순간 세계와 나의 소통이 있는 것이죠.
계급이라는 말은 어떤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바라보자는 말일 뿐이예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불편함과 똑같은 양의 위로를 주는 글을 나는 혐오한다. 내 글이 담는 불편함은 '과시'가 아니라 '권유'다. '글이나 읽고 해소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함께 실천을 고민해야죠' 하는 권유 말이다. (김규항)
꼭 누굴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처벌하려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너무 쉽게 했단 말이죠. ……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처벌이 안 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하는 개념이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책임지지 못했을 때 그 가족들은, 남아 있는 당사자들은 그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가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보복하지 마라. 대신 사회가 처벌해준다'고 하니까 비로소 막을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걸 포기해놓고 뭘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화해를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홍구)
최종적으로 해방된 사회의 상을 그리고 나머지 운동들을 그쪽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진중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생들이 워낙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보수화를 걱정하기에 앞서서 교수들의 보수화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석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