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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으로 읽었던 건축 관련 책. '꽤 괜찮다'라는 말만 듣고 사놓았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부제가 '인문적 건축이야기'인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사람일진데, 어찌 건축이 인문적이지 않을 수 있으랴.
운동장 주위에는 이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동상이 나열되어 있다. 이 동상으로 세종대왕보다 이순신 장군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한동안 이 땅의 정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의 배경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반공교육이 중요할 때는 이승복 동상이 세워지곤 했고 민족 자주성이 강조되면서 단군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학교는 건축으로 구현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아.. 여의도의 폭파대상 1호 건물 근처의 다른 건물들 높이가 왜 낮은지에 대한 설명도 이 책에서 처음 읽었다.
(제기랄. 그딴식으로 하면 없는 권위가 세워진대?)
저자는 건축의 인문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건축이 치밀한 계산으로 명확한 한계를 벗어나는 작업임을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건축이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외치는 방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도 큰 성과.
<경희대학교 건축조경전문대학원>은 체육관을 개조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낡은 건물을 개조하여 건축 교육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을 맡게 된 건축가는 건축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 교육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도제 수련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접촉과 토론이 더욱 중요한 건축 교육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건축가의 이런 가치관은 계단, 복도를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만들었다. 건물 곳곳을 종횡무진 뚫고 지나가는 이 동선 공간들은 결국 사람들의 움직임을 서로에게 노출시킨다. 그리고 호객과 흥정이 떠들썩한 시장처럼 끊임없는 접촉과 토론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그 장치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생각 없이 타고는 했던 에스컬레이터 등의 수단이 상징적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흥미진진.
움직임과 관련하여 건축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소도구로는 에스컬레이터만한 게 없다. 에스컬레이터는 엘리베이터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송능력과 개방감을 가진 발명품이다. 이 신기한 물건은 자신이 움직이는 물체이면서 어디에 가져다 걸어도 3차원의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걸려야 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박력을 주는 데는 더 없이 좋은 물건이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이해 또한 빠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눈으로 본 건축을 설명하되, 이제 당신의 눈으로 좋은 건물을 찾아내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맘에 들었다.
10년 후에 강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인가 내 인생에 중요한 강의였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경험이랄까.
사실 건축과 건설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 다른 영역의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건축 없는 건설'을 하는 단순한 삽쟁이라는 것도 더욱 명확해진다.
교각과 상판으로 이루어진 다리는 간단하다. 이런 값싼 다리가 가장 가치 있던 시대가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 간단함은 만들기 쉽다는 의미에서의 간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드는 이가 지닌 사고의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의 명쾌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것은 건너자는 의지 이외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없다. 문화라는 덕목으로 거론할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들은 '대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후손에게 물려주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다. 가장 값싼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값싼 문화가 만들어진다.
<교보생명 사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인도라는 한정된 부분에만 서 있지 않는다. 건물 앞의 마당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앞의 넓은 공터는 언제나 누구나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사무소 건물 앞에 으레 있기 마련인 계단도 없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대지는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그 지하에 들어가서 책을 사고 친구를 만난다. 누구나 책을 살 수 있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건물은 주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 되었다. 이 지하가 1주일만 문을 닫으면 한국의 지식 산업계는 비상사태에 돌입하여야 한다. 그 개방은 지명도로 곧 치환되었다. 이를 통하여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이는 그 바닥 넓이만큼의 임대료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보상을 받고 있다. "아, 그 왜, 누렇고 옆으로 줄쳐진 바로 그 건물 15층"과 "교보 15층!"이 어찌 비교될 수 있으랴.
여기서 건축가는 다시 '누구를 위한?'이라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도로와 건물 사이가 계단으로 분리되어 있다면 그 '누구'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은 제외된다. 주차장이 있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제외된다. 자동차가 있어도 기사가 없는 사람은 제외된다. 담이 있으면 거리의 시민은 모두 제외된다. 그만큼 건물은 배타성을 띠게 된다.
삐까뻔쩍한 '광장'을 지으면 뭘하는가. 폐쇄되고 포위된 광장은 광장이 아닌 것을.
'그들'이 세금으로 지어대는 그 '기념물'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들인가. 누구를 위한 '삽질'인가.
어쨌거나, 저자의 인문학적 소양과 글솜씨까지 더해진 굉장히 멋진 책이다.
뒷부분에 한 건물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부분이 생각보다 짧아 아쉬움이 계속 남았지만, 이제 건물을 보는 것은 나의 몫이니.
각주나 미주, 각종 부록까지 다 읽고야마는 변태같은 성격으로-_-,
저자가 이 책의 출판사인 효형출판의 건물을 건축설계한 사람인 것도 알 수 있었다. ㅎㅎ
언제 건물 구경하러 파주출판단지나 한 번 가볼까. 거기 특이하게 생긴 건물들 많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