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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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이용하여 새로운 창작을 시도한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

무인도라는 이 작품들의 배경상, 작품에서 중요한 컨셉이 되는 것은 '타자의 부재'라는 주제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이 주제를 더 심오한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 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 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어려보게 된다. ....(중략)....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

 

투르니에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디포의 로빈슨은 일방적인 회고담이다. 이미 '승리'한 자의 후일담인 것이다.

반면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작품 속 현실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이 로빈슨은 더욱 비극적으로 묘사된다.

디포의 로빈슨처럼 현실에 닥친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인간'상'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사실 그는 섬에 아주 정착하기 위한 작업 비슷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섬에 장기간 머무를 리 없다고 애써 믿으려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 섬 안에서 생활을 설계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면 그것은 곧 빠른 시간 안에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섬 안의 땅 쪽으로는 고집스럽게 등을 돌린 채 그는 머지 않아 구원이 찾아올 저 불룩하고 쇠붙이 같은 바다의 수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독으로 인하여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은 감정의 표현 같다 싶은 것과 마주치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상처를 입었다. 손일을 하지 않으면 점차로 손에 박혀 있던 못이 풀리듯이 인간들이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관심과 무지의 갑옷이 그에게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전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디포의 로빈슨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지루하다.

시점의 차이도 두 작품의 차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투르니에의 로빈슨이 누렸던 풍부한 잉크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다시 '타인의 부재'라는 전체의 주제와도 연관이 된다.

풍부한 잉크는 철저히 혼자였던 로빈슨에게 새로운 타자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타인에게는 지루한, 자신이라는 심연에 빠져들었다.

타인의 부재. 그러나 결코 타인은 부재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 없이 타자를 생산하며, 문자와 언어는 그 생산을 부추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끊임없이 타인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슬프고도 기쁜 운명에 대한 찬사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기쯤에서, '최초의 타인'이 되는 방드르디의 등장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총독으로서의 만족감,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의식들, 그럼에도 로빈슨의 '문명'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드르디.

폭발, 충격, 서서히 발견해가는 '다른 방드르디'. 서서히 드러나는 '본래의 로빈슨'.

 

  로빈슨은 뱃속이 뒤집히는 듯하여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논리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느끼는 예민한 구역질 등 그 모든 백인 특유의 신경 반응이 과연 최종적이며 고귀한 문명의 보증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삶에 접어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죽은 찌꺼기일지를 자문해 보았다.

 

  로빈슨은 이 의문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반추해 본다. 처음으로 신경에 거슬리기만 하는 이 천하고 바보 같은 혼혈아의 모습 저 속에 어떤 다른 방드르디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해본다. 마치 그가 옛날에, 동굴과 골짜기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통치된 섬 속에는 다른 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듯이.

 

이렇게 비록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로빈슨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디포의 프라이데이와는 또 전혀 다른 방드르디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무게 중심은 결코 방드르디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여전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로빈슨은 여전히(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혼자 결정하여 배를 떠나보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방드르디의 세계를 다시 이상화했다.

이것은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삼고 또 그렇게 묘사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류학자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타자화 하는 순간이야 말로 가장 진지하고도 고독한 고통의 순간이다.

타자의 '없음'보다도 이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섬에 격리된 로빈슨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우선 이런 소설을 기획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창작보다도 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렇게 단순히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결과물이 중요한 셈이다. -_-..)

김화영의 번역에는 불만이 없지만, '문학평론'이라는 것에는 역시나 거부감이 생긴다.

왜 한 작품을 평론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이, 원작을 읽을 때 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뒷부분의 '논문'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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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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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마조워의 저작, 『암흑의 대륙』은 ‘논쟁적인 문제작’이라는 책의 홍보와는 달리 유럽 현대사의 개설서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개설서가 논쟁적인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의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이 ‘충격’을 주거나 혹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정반대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마조워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93년이다). 그러나.

 

끝없이 끓어오르는 증오감과 억누르지 못할 혈기가 지배하는 인간의 물결. 종종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서 호전적인 합창이 이어진다. 곧이어 단상 위에 누군가가 올라서자 주변은 침묵에 젖어든다. 이 종족의 족장으로 보이는 그 인물은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하고서 열정적인 목소리로 좌중의 흥분을 배가시킨다. 주문과 같은 선언, 아니 선언과 같은 주문. 이 ‘의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종족이 얼마나 강한지를 재차 확인하고서 척결해야할 이웃 종족의 마을로 향한다. 전사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의 종족은 태생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패배란 없다. 그런데, 이 전사들의 손에는 창이나 활, 칼이 아닌 Kar 98k가 들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족장은 검갈색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콧수염을 기른 사내다.

 

종족간의 싸움, 내전, 민간인 학살, 야만.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주로 아프리카에 적용시킨다. 물론 그 적용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법. 100년도 채 되기 전, 암흑의 대륙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유럽이었다. 마크 마조워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도 매우 꼼꼼하게.


이 대륙에 드리운 암흑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소위 ‘싸이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 극단에 서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에는 이미 ‘야만적’인 인종주의가 하나의 보편이었다. 그리고 그 보편은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이 전체주의는 억압과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방조 때로는 적극적인 협조에 의해 더욱 강성해졌다.

 

제3제국은 단지 억압 위에서만 세워진 것도 아니었으며, 법 제도의 작용으로만 유지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인 대다수가 히틀러를 지지한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 저항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받아들였고, 이 체제는 정상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65쪽)

 

서구 사람들은 이런 대학살에 치를 떨었지만, 애초에 근동[아라비아, 북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발칸 등을 포함하는 지역]의 다민족 사회에 민족국가라는 서구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대량 학살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95쪽)

 

그러므로 ‘당시에는 나치 정권이 특별히 비정상적인 정권이 아니었으며, 인종 청소라는 정책을 최초로 시도한 정권도 아니었다’(93쪽)라는 마조워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민주주의 승리도 아니었다. 결과로서 민주주의가 도래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 책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분열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Band of Brothers’가 묻는 ‘Why we fight’(이 드라마 시리즈의 9편), ‘Medal of Honor’와 같은 전쟁 게임이 보여주는 추축국과 연합군의 이미지, 그리고 불타는 교회의 입구를 막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행했을 뿐이라는 순진한 표정의 가련한 여인(영화 ‘더 리더’ 中)을 보라. 어쩌면 마조워는 유럽인들이 ‘그러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환상을 깨부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들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마조워의 ‘파괴행위’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분열’일 뿐이다.


이 책은 개설서에 가깝지만, (옮긴이의 평대로) 거시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마조워는 세세한 사료들을 섭렵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간다. 게다가 거대 구조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거시적 움직임 또한 생동감 있는 사료와 인용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결핍’은 당의 지배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당 권력의 기본 요소였다. 당에 가입하거나 협조하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족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378쪽)

 

1960년대 초가 되면 광고는 한발 더 나아가 여성들을 ‘젊은 어머니’와 나이 든 부인들, 그리고 젊고 섹시한 세련된 미혼 여성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410쪽)

 

  고발이나 사찰의 공포가 가족, 심지어 잠재의식에까지 침투했다. 1934년 45세인 한 독일인 의사의 꿈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저녁 9시 정도 된 것 같다. 진찰이 모두 끝나고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더니, 곧 아파트가 사라져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두렵게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아파트 벽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벽을 제거하라는 이번 달 17번째 포고령에 따라......".

 

꿈을 기록한 뒤에 그 의사는 또 한 번 이 꿈을 기록한 사실 때문에 고발당하는 꿈까지 꾸었다. 이제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62쪽)

 

전후의 시기를 넘어 마조워는 유럽의 민족국가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세계화가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538쪽)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속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민족주의는 더이상 유럽의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럽이 현실적 겸양만 갖춘다면, 굴곡이 심한 이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만약 유럽인들이 유럽에 대한, 작동 가능한 하나의 정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만 포기한다면, 그리고 세계에서 좀 더 소박한 지위를 수용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있을 다양성과 차이를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540쪽)

 

하지만 마조워의 낙관론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마조워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유럽의 열강은 서로 군사적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의심이 든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세계 1차대전 또한 발발하지 않을 ‘그만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현재의 위험요소를 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마조워는 이런 ‘과장’들을 종종 비판하고 있다),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특히 그것이 결과론적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역사가의 속편함’이 또 다시 도마에 오를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낙관론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순한 비관보다는 그 비관을 바탕으로 한 낙관이 훨씬 낫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마조워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치의 제국주의는 유럽인들이 과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특히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폭력과 인종차별을 유럽에 가져왔다’(251쪽)는 마조워의 반성/비판을 효과적으로 소화한다면,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놓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기억력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모두 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억력을 위해서는 역사가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 기타 문제제기

1. 마조워가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 ‘영국의 가치는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또한 분명 인종주의가 존재했지만, 영국의 인종주의는 생물학보다는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114쪽)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문화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생물학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보다는 낫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150~151쪽에서 제시되는 헉슬리의 관점을 살펴보자면, 그가 숭배한 우생학은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3.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 39쪽. 파편화가 파시즘을 부추긴 요인이라면, 파시즘은 어떻게 파편화를 극복하였는가?
4. 민족주의 혹은 민족국가에 대한 이중관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묘사할 때 마조워는 민족이 허상에 가깝다는 의견을 넌지시 내비친다. 그러나 그가 현재의 상황을 묘사할 때와 같이 개념이 ‘허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 영국 노동당의 승리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패배인가? (이것은 이미 그렇지 않다고 증명된 것이기는 하지만)
6. '효율적인 살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것이 비판의 중심에 설 수 있는가? '비효율적인 살인'은 효율적인 살인보다 나은가?

 

이 역시 전체 페이지가 600이 넘는 책. 요새 두꺼운 책들을 연달아 읽어 좀 지치기는 한데... 이렇게 많은 분량, 긴 호흡의 글을 지치지 않고 끌어 갈 수 있는 저자의 힘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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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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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동안 진행됐던 '로빈슨 크루소 읽기'의 마지막 단계.

근대적 인물인 로빈슨 크루소에 대비되는 인간형 방드르디를 내놓았던 트루니에와는 또 다르게, 쿳시는 해체와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원작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원래 아버지의 성이 Foe였는데, 대륙의 플랑드르 가문이었던 점을 의식해 지은 필명이 Defoe라고 한다.

불어의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것이자 영어에서는 또한 부정(not)의 의미도 있다고.

 

포를 통해 그(쿳시)는 작가로서의 한계와 의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마지막 4장에서는 포의 목소리와 어떤 사실적인 목소리마저 지우고 있는데, 이는 사실주의를 대치하려는 실험이자 하나의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는 내러티브가 가능한가를 시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말라. 약자가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 이른바 마이크를 주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최근의 논지들을 극화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포>이다.

 

조금은 지루했던 중반부에 비해, 막판에 와서 왜 그렇게 멍한 느낌을 줬는지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 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주인공과 벙어리 프라이데이의 등장이다.

침묵과 고집으로 일관하는 남성 크루소와는 달리, 주인공은 '다르게' 사고한다.

(하지만 그 '다름'이 여성성인가, 혹은 여성성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 부분은 이번 학기 여성사 수업을 듣는 나로써는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이라는 존재. 소설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 여성.

 

  당신은 나의 침묵과 프라이데이와 같은 존재의 침묵을 구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실수를 범하고 있어요. 프라이데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매일매일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방어할 힘이 전혀 없지요. 제가 그를 식인종이라 하면 그는 식인종이 되지요. 제가 그를 세탁부라고 하면 그는 세탁부가 되는 거지요. 진실로 프라이데이는 누구인가요? 이렇게 대답하시겠지요. '그는 식인종도 아니고 세탁부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정수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 또한 의미 있는 실체이고, 그는 그 자신으로서,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든 간에(도데체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기나 한가요? 그가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그가 세상에서 무엇이 되는지는 바로 제가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 프라이데이의 침묵은 어찌할 수 없는 침묵이죠. 그는 침묵의 자식이고, 태어나지 않은 자식, 태어날 수 없는데도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식이에요. 하지만 바이아와 다른 일에 대해 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선택한 것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에요. 바로 스스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지요.

 

소설가 포 앞에서 주인공은 침묵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라는 배려가 실은 굉장히 가증스러운 폭력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하지만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모두에게 '말하게 하라'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마이크를 넘기는 것만으로 가능한가?

모두가 '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몸의 언어가 기존 체계의 완벽한 성을 넘어설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해체'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문제제기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니.

 

사실 독백으로 진행이 되거나, 혹은 대화속에서 일방적인 장황설이 이어지는 소설은 개인적으로 좀 힘들다.

이 책의 설정 자체는 괜찮았지만, 늘어지는 중간 부분의 내용과 서술은 좀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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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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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최규석의 팬이다.

둘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그의 상상력(?)에도 감탄하고, 그 특유의 우울함과 문제의식을 좋아한다.

때로는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는 그의 그림체나 색감도, 솔직히 내 취향이다.

'한겨레21'이었던가, 그가 연재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아끼고 아껴서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한꺼번에 보겠다는 욕심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했다.

 

올해 여름에 단행본이 나왔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보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바로 구입했다.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77년생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화석 같은 이야기들. 그의 이야기에는 가난과 외로움과 자기연민이 묻어있다.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자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만화를 꺼리는 분이 아니라면, 일독을 권한다. 짧은 단편들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장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잊혀져가는 원주민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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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최재봉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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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Marx's Concepts of Man'.

1961년 초판이 나왔던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일소시키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목표와 그가 꿈꾼 사회주의의 내용이라며 제시되었던(즉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이 제시했던) 象이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중략)...더욱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 철학을 '유물론'이라며 가장 맹렬하게 비난하는 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동기가 물질적 이득을 향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이라 공격한다는 사실이다.

 

이 왜곡과 오해는 비단 자본주의를 주장한 이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소련 공산당뿐만 아니라 개혁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믿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것이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유물론자로 불리기 보다는 이상론자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개인들이 표현하는 삶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누구인가는 그들의 생산,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中)

 

에리히 프롬의 주장대로 '사적 유물론은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그의 생각과 욕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인간의 주된 욕망이 최대한의 물질적 이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보면 '소유냐, 존재냐'를 고민했던 에리히 프롬이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했던 것이 이해될 수 밖에 없다.

프롬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이 비판이 단순히 부의 집중과 노동자의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화폐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전유하며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풍요이다. 하지만 화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창출하기만을, 자신을 구입하기만을 욕망한다. (<경제학 철학 수고> 中)

 

이 욕망은 결국 인간을 화폐라는 수단에 종속시키며, 화폐를 창출하기 위한 노동에서도 '소외'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노동을 하면서 '비인간화'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외친 '노동의 해방'은 일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을 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논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고 소외되며 의미 없는 것으로 노동을 왜곡시키고, 따라서 인간을 "불구적 괴물"로 변형시킨다는 데 있다.

 

이 짧은 소고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중국이 건재하던(물론 미국도 건재하던) 냉전의 시기에 출간되었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프롬은 주로 '독일 이데올로기'와 '경제학 철학 수고'를 중심으로 하되 '자본'의 일부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을 설명한다.

조금 아쉬운 것은 대체 '왜' 마르크스가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왜곡이 자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궁금해진다.

 

친구에서 선물로 받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그 보답으로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선물했다.

조로증의 시대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는 나이 서른의 남성들이 모이면 그들은 주로 주식와 펀드, 그리고 '좋은 곳'을 이야기한다.

이 조로증의 시대에 맥주를 한 잔 따라 놓고 에리히 프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녀석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으로 느껴진다.

 

왜 우리는 이상을 외면하려고만 할까? 너무 쉽게, 그리고 빠르게 늙어버렸기 때문에? 이상을 보며 노력할 힘은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린 너무 무리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덜, 힘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인내력은 생각보다 참 강하다. 하지만 인내가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인내로서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한다.

 

까딱했다가는 번역이 아주 엉망일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읽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어릴 때 별로 와닿지 않았던 에리히 프롬이 나이가 들 수록 와닿는다. 나의 문제일까, 시대의 문제일까?

무리하며 살지 말자. 새해들어 가장 많이 하게되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런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빨리 늙어버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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