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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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이용하여 새로운 창작을 시도한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

무인도라는 이 작품들의 배경상, 작품에서 중요한 컨셉이 되는 것은 '타자의 부재'라는 주제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이 주제를 더 심오한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 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 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어려보게 된다. ....(중략)....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

 

투르니에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디포의 로빈슨은 일방적인 회고담이다. 이미 '승리'한 자의 후일담인 것이다.

반면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작품 속 현실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이 로빈슨은 더욱 비극적으로 묘사된다.

디포의 로빈슨처럼 현실에 닥친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인간'상'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사실 그는 섬에 아주 정착하기 위한 작업 비슷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섬에 장기간 머무를 리 없다고 애써 믿으려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 섬 안에서 생활을 설계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면 그것은 곧 빠른 시간 안에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섬 안의 땅 쪽으로는 고집스럽게 등을 돌린 채 그는 머지 않아 구원이 찾아올 저 불룩하고 쇠붙이 같은 바다의 수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독으로 인하여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은 감정의 표현 같다 싶은 것과 마주치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상처를 입었다. 손일을 하지 않으면 점차로 손에 박혀 있던 못이 풀리듯이 인간들이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관심과 무지의 갑옷이 그에게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전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디포의 로빈슨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지루하다.

시점의 차이도 두 작품의 차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투르니에의 로빈슨이 누렸던 풍부한 잉크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다시 '타인의 부재'라는 전체의 주제와도 연관이 된다.

풍부한 잉크는 철저히 혼자였던 로빈슨에게 새로운 타자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타인에게는 지루한, 자신이라는 심연에 빠져들었다.

타인의 부재. 그러나 결코 타인은 부재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 없이 타자를 생산하며, 문자와 언어는 그 생산을 부추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끊임없이 타인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슬프고도 기쁜 운명에 대한 찬사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기쯤에서, '최초의 타인'이 되는 방드르디의 등장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총독으로서의 만족감,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의식들, 그럼에도 로빈슨의 '문명'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드르디.

폭발, 충격, 서서히 발견해가는 '다른 방드르디'. 서서히 드러나는 '본래의 로빈슨'.

 

  로빈슨은 뱃속이 뒤집히는 듯하여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논리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느끼는 예민한 구역질 등 그 모든 백인 특유의 신경 반응이 과연 최종적이며 고귀한 문명의 보증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삶에 접어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죽은 찌꺼기일지를 자문해 보았다.

 

  로빈슨은 이 의문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반추해 본다. 처음으로 신경에 거슬리기만 하는 이 천하고 바보 같은 혼혈아의 모습 저 속에 어떤 다른 방드르디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해본다. 마치 그가 옛날에, 동굴과 골짜기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통치된 섬 속에는 다른 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듯이.

 

이렇게 비록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로빈슨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디포의 프라이데이와는 또 전혀 다른 방드르디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무게 중심은 결코 방드르디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여전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로빈슨은 여전히(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혼자 결정하여 배를 떠나보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방드르디의 세계를 다시 이상화했다.

이것은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삼고 또 그렇게 묘사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류학자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타자화 하는 순간이야 말로 가장 진지하고도 고독한 고통의 순간이다.

타자의 '없음'보다도 이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섬에 격리된 로빈슨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우선 이런 소설을 기획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창작보다도 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렇게 단순히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결과물이 중요한 셈이다. -_-..)

김화영의 번역에는 불만이 없지만, '문학평론'이라는 것에는 역시나 거부감이 생긴다.

왜 한 작품을 평론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이, 원작을 읽을 때 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뒷부분의 '논문'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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