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몇 개월 동안 진행됐던 '로빈슨 크루소 읽기'의 마지막 단계.

근대적 인물인 로빈슨 크루소에 대비되는 인간형 방드르디를 내놓았던 트루니에와는 또 다르게, 쿳시는 해체와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원작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원래 아버지의 성이 Foe였는데, 대륙의 플랑드르 가문이었던 점을 의식해 지은 필명이 Defoe라고 한다.

불어의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것이자 영어에서는 또한 부정(not)의 의미도 있다고.

 

포를 통해 그(쿳시)는 작가로서의 한계와 의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마지막 4장에서는 포의 목소리와 어떤 사실적인 목소리마저 지우고 있는데, 이는 사실주의를 대치하려는 실험이자 하나의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는 내러티브가 가능한가를 시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말라. 약자가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 이른바 마이크를 주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최근의 논지들을 극화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포>이다.

 

조금은 지루했던 중반부에 비해, 막판에 와서 왜 그렇게 멍한 느낌을 줬는지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 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주인공과 벙어리 프라이데이의 등장이다.

침묵과 고집으로 일관하는 남성 크루소와는 달리, 주인공은 '다르게' 사고한다.

(하지만 그 '다름'이 여성성인가, 혹은 여성성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 부분은 이번 학기 여성사 수업을 듣는 나로써는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이라는 존재. 소설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 여성.

 

  당신은 나의 침묵과 프라이데이와 같은 존재의 침묵을 구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실수를 범하고 있어요. 프라이데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매일매일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방어할 힘이 전혀 없지요. 제가 그를 식인종이라 하면 그는 식인종이 되지요. 제가 그를 세탁부라고 하면 그는 세탁부가 되는 거지요. 진실로 프라이데이는 누구인가요? 이렇게 대답하시겠지요. '그는 식인종도 아니고 세탁부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정수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 또한 의미 있는 실체이고, 그는 그 자신으로서,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든 간에(도데체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기나 한가요? 그가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그가 세상에서 무엇이 되는지는 바로 제가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 프라이데이의 침묵은 어찌할 수 없는 침묵이죠. 그는 침묵의 자식이고, 태어나지 않은 자식, 태어날 수 없는데도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식이에요. 하지만 바이아와 다른 일에 대해 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선택한 것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에요. 바로 스스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지요.

 

소설가 포 앞에서 주인공은 침묵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라는 배려가 실은 굉장히 가증스러운 폭력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하지만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모두에게 '말하게 하라'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마이크를 넘기는 것만으로 가능한가?

모두가 '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몸의 언어가 기존 체계의 완벽한 성을 넘어설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해체'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문제제기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니.

 

사실 독백으로 진행이 되거나, 혹은 대화속에서 일방적인 장황설이 이어지는 소설은 개인적으로 좀 힘들다.

이 책의 설정 자체는 괜찮았지만, 늘어지는 중간 부분의 내용과 서술은 좀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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