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
데이비드 블랙번.제프 일리 지음, 최용찬.정용숙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책이라기 보다는 두 학자의 논문 하나씩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책보다도 완결성이 있고 명확하다.

근대 역사의 '발전'에 있어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과는 다른 '특수한 길'을 걸어왔다는 기존의 신화를 비판한 글이다.

그 '특수한 길'은 '잘못된' 특수한 길로서, 이런 해석이 후에 등장하는 파시즘을 보는 관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학자가 이야기 하는 바는 굉장히 명확하다. '특수한 역사 발전을 거치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는가?'

즉, 프랑스나 영국의 역사 진행과정이 비교의 '중심'에 서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던 시절만 하더라도(1980년), 그것은 전혀 당연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같은 논지를 전개하는 것 같은 두 학자의 '차이'를 음미하는 것에 있다.

조곤조곤 씹어가며 밥 알갱이의 단맛을 느껴가는 것 같은 데이비드 블랙번에 비해,

제프 일리는 냉면을 한 젓가락에 삼켜버리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제프 일리의 스타일에 좀 더 끌린다.)

이런 '스타일'의 차이는 두 학자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도 해본다.

(제프 일리는 2002년에 유럽 좌파의 역사를 조망하는 매우 두꺼운 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더 레프트'로 번역.

이 책의 저자인 두 학자 사이에는 부르주아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여기에는 번역의 문제를 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스타일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스타일의 차이가 또 다시 글의 논지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너무나 흥미롭다.

 

'프랑스혁명은 너무도 거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일 수가 없었다'는 E.P 톰슨의 지적과 함께,

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리고 여기 멀리 한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서술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과 식민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을 둘러싼 '근대화' 논쟁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의 오버일 뿐인 걸까?

 

그런데도(독일의 역사가들이 시민혁명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음에도: 인용자) 독일 제국은 부르지아지에게 별 볼일 없는 지위만을 허락했던 "전산업적 지배"였다는 특이한 해석이 또 다시 나온다. 이는 "시민혁명"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민주주의 수준과 나란히 놓기 때문이다. 즉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라는 척도로 과거를 되돌아보기 때문에 제정 독일은 어쩔 수 없이 "후진" 국가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를 유럽의 역사 전개에 내재된 주요 목표로 보는 한, 진보된 사회구조와 퇴행적 정치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하는 일은 계속된다. …… 이 테제에는 "올바른" 발전이라는 관념, 즉 "근대적"인 사회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적 이해가 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 자유주의의 성숙이나 반동성 여부를 확인하는 데 외국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수상쩍다. 도대체 왜 한 나라에서 특별한 정치적 전통이나 정치운동이 형성될 때 그것들이 어떤 이상형과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영국이든 독일이든 입헌 정부형태의 정치적 모델에 해당하는 자유주의가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필연적 이해 내지는 자본의 관철로부터 직접 나와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영국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승된 도그마의 문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개념상의 혼란을 부추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민주화에 관한 모든 공식적 기준에 의하면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립과는 직접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관계가 없었다. …… 달리 말하며 민주주의 정치로 가는 기회들은 부르주아지의 성공을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불거진 모순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호 적대 세력들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제프 일리. 이 다음부터는 데이비드 블랙번.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라는 랑케의 유명한 글귀는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역사가들이 19세기의 독일 역사를 서술해 온 방식은 "실제 일어나지 않은 그대로"라는 말로 특징짓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취급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핵심은 자유방임정치나 영국의 길을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상업이윤을 통한 자본의 장기적인 축적, 완전히 자본주의화 되고 상업화된 농업부문, 그리고 기업방식에 대한 전문지식의 점차적인 성장이란 특징을 갖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역사적으로 볼 때 도리어 흔하지 않은 경우였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의식적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부르주아지라는 발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그 발상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이념형을 상정하고 그것과 대조하여 일정한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행동을 평가하려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이 이행된 것과 시민혁명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유럽 부르주아지의 정치를 간단히 주가株價 우위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연속성과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는 연속성의 "유무"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각에서" 이 문제를 고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학사'라는 분야는 정말 한 단계 위의 지적 놀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책. 이제 '파시즘'을 읽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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