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정도 두께의 책은 읽기 전부터 부담이 생겨서 잘 시작을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전체 600페이지 중에 각주 빼고 참고문헌 빼면 500페이지 정도지만.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책은 매우 읽기가 편했고 또 흥미진진했다.

 

저자인 팩스턴은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내릴 수 없으니 일단 파시즘의 행적을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책의 목표는 파시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냄으로써 파시즘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그것의 복잡한 역사적 경로, 그리고 파시즘이 지닌 극단의 공포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사실 2000년 즈음에 일었던 '일상적 파시즘' 등의 용어나, 촛불시위를 바라보는 걱정에서 언급되는 파시즘에 불만이 있었던 터라,

팩스턴의 이러한 집필 의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팩스턴의 지적대로 그렇게 '개나소나' 다 파시즘이면, 진정한 파시즘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상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중심으로 기타 지역의 파시즘을 총체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성은 '무정형성'이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 체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등장 과정과 정착 과정에 있어, 파시즘(혹은 그 지도자) 단독의 힘으로만 파시즘이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주변 정황과 타 세력들과의 관계, 그들의 반응 등을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승인을 얻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단계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중간계급을 설득해 파시스트의 폭력은 좌파의 도발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교를 통해 살펴보면 파시스트들의 집권 성공 여부는 파시즘 지식인층의 명민함이나 파시즘 지도자들의 자질보다는 위기의 심각성이나 잠재적인 동맹 세력의 절박함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파시즘은 '정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좌파만큼은 위험하지 않은' 정상적 모습을 보이는 과정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위험한 것은 과격한 네오나치나 스킨헤드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쪽은 표현 수위를 조절하고 고전적인 파시즘 상징을 버림으로써 '정상적'으로 보이는 법을 배운 극우 운동이다.

 

아쉬운 점은 실패한 정상화인 무솔리니의 모습만을 자세히 보여줄 뿐, 그들의 성공과정은 그리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팩스턴은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로 파시즘을 더듬어 간다.

한 인물이나 주변 정황만이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라는 변수도 있음을 강조하면서.

 

총통 개인의 기벽보다는 독일 국민이 그를 통해 이루려 한 것은 무엇이며 그가 거의 최후의 순간까지 수행했던 역할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포이케르트의 저작과 같은 연구들과 연결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시즘엔 미시적 연구가 필수인듯.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라는 논지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인 회피로 끝나지는 않는다.

'명목론을 피한답시고 '단계'와 '과정'이라는 또 다른 명목론에 빠져버리는 위험'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한 팩스턴의 간략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앞서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꼼꼼한 성찰을 통해 이끌어낸 탁월한 정의이기는 하지만,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팩스턴은 책의 뒷부분에서 기타 권위주의, 독재, 군부독재 등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이들이 왜 파시즘이 아닌지를 서술한다.

특히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는 부분은 '민주주의 성립 이전의 독재에는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부분이다.

팩스턴이 의도한 바는, 파시즘엔 '대중정치'가 필수적이므로 '민주주의'라는 기반이 없으면 파시즘도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 '서구중심주의'라는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파시즘이 아니라고 가지쳐낸 독재, 군부독재 정부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다.

저자가 제기하는 이유들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실 이렇게 접근하면 독재 또한 각 국가/정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남용은 막을 수 있겠으나,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극단적으로 특수화시켜 버릴 위험이 생긴다.

 

미시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적어도 최근 출판된 파시즘 연구서 중 몇 안되는 탁월한 저서임은 틀림 없다.

게다가 어렵지도 않고 재미까지 있으니 추천. 덤으로 노력에 비해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자기만족도 크니 또 한 번 추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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