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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이 2001년 초여름이었던가.
당시 듣던 강의, '죽음의 사회학'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된 책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권유가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
하지만 이 책은 그 강의와 더불어 내게 '죽음'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던가. 이번이 세번째 읽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교훈과 그 속에 넘치는 위트, 그리고.... 사람들 간의 따뜻함.
이번에 읽으면서 너무나도 동감했던 구절은 바로 이 부분. 내가 평소에 그렇다고 믿던 것.
"나는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땐,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를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
온 몸의 근육이 죽어가는(그러면서도 통점은 잃지 않는 참 아이러니컬한) 루게릭 병을 않으면서도
모리는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답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또한 진정 삶을 사랑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한다면.
죽음 또한 진지하게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조용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이 책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죽어가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방송사에 대해 경계하는 글쓴이에게 모리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미치, 그들은 드라마틱한 쇼를 위해 나를 이용하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어쩌면 나도 그들을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수백만 명에게 하도록 도와주잖나.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안 그래? 그러니까 이건 공모라구."
공모. 그렇다. 사회학이나 역사학은 경영학이나 경제학보다 효율적으로 부를 창출할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잊고는 방향을 잡지 못하기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참 뜬금 없는 소리가 나도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관심과 애정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과감성도 필요한 학문이다.
내가 그렇게도 전공하고 싶어하던(중학교 때부터지 아마) 사회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역사학 쪽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 타 여러 이유들이 있기도 하지만
사회를, 그리고 인간을 그저 재미있는 분석거리로 보는 사회학의 일단면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건대, 이건 그저 '일단면'만을 보고 심하게 왜곡시킨 나의 탓이긴 하다.)
사회현상이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는 또 많은 눈물과 피가 숨겨져 있다.
그 사실을 그저 재미있게 현미경 들여다보듯, 외부자의 시선을 유지하기엔
난 학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기뻐해야할 일엔 기뻐하고, 슬퍼해야할 일엔 슬퍼하며, 분노해야할 일엔 분노하는 것.
그것이 배운 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 땅에서 '더 많이 배웠다'라는 것조차 착취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내 삶을 변명하는 그 순간. (네 환경이, 조건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증오하던 일들을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행하고 있게 되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이면 나는 드디어 '죽음'을 두려워하겠지. 아니 분명히 잊으며 살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리를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약간의 언어유희. ㅎㅎㅎ)
P.S. 살면서 이런 프로젝트 하나쯤 해보는 것.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그리고 옆에서 그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따스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