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광인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5
루쉰 지음, 정석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루쉰 선생의 단편소설집. 총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편집상의 몇몇 오류가 눈에 띄긴하지만 번역은 괜찮은 것 같다.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아Q정전'이 대표작이라 그것에 치중해서 봤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광인일기'에 관심이 갔다.
당시 루쉰 선생이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소설은 현재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는 말 그대로 미친 자의 일기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생각을 하는.
그저 미친자의 일기로 볼 수도 있고, 당시 봉건도덕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아름다운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 글이 다른 맥락으로 읽혔다.
 
......무려 4천 년 동안이나 늘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 역시 그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4천 년 간이나 사람을 잡아먹은 경력을 가진 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아직도 사람 고기를 못 먹어본 어린이가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미친 자'의 일기가 이리도 섬뜩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덜 섬뜩한가.
 
그래도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고향'.
드디어 사람에게서 20년만의 고향을 찾은 것 같았던 주인공에게
'주인님....'이라는 한 마디. 현실의 벽이 차갑게 부딪혀 오지만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생각한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요구할 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한시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른 점이라면 그의 희망은 절박한 것인데 비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라는 점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눈 앞에는 해변가의 푸르른 모래밭이 떠올랐다. 짙은 남색 하늘에 바퀴처럼 둥근 황금의 보름달이 떠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번역자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어쨌든 이 구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두움 속에서 담담하게 희망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저 구절.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있다'라는 말보다도 저 구절이 더 와닿고, 또 내게 힘을 준다.
희망의 원동력은 '부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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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이 2001년 초여름이었던가.
당시 듣던 강의, '죽음의 사회학'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된 책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권유가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
하지만 이 책은 그 강의와 더불어 내게 '죽음'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던가. 이번이 세번째 읽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교훈과 그 속에 넘치는 위트, 그리고.... 사람들 간의 따뜻함.
이번에 읽으면서 너무나도 동감했던 구절은 바로 이 부분. 내가 평소에 그렇다고 믿던 것.
 
"나는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땐,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를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
 
온 몸의 근육이 죽어가는(그러면서도 통점은 잃지 않는 참 아이러니컬한) 루게릭 병을 않으면서도
모리는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답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또한 진정 삶을 사랑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한다면.
죽음 또한 진지하게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조용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이 책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죽어가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방송사에 대해 경계하는 글쓴이에게 모리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미치, 그들은 드라마틱한 쇼를 위해 나를 이용하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어쩌면 나도 그들을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수백만 명에게 하도록 도와주잖나.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안 그래? 그러니까 이건 공모라구."
 
공모. 그렇다. 사회학이나 역사학은 경영학이나 경제학보다 효율적으로 부를 창출할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잊고는 방향을 잡지 못하기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참 뜬금 없는 소리가 나도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관심과 애정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과감성도 필요한 학문이다.
내가 그렇게도 전공하고 싶어하던(중학교 때부터지 아마) 사회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역사학 쪽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 타 여러 이유들이 있기도 하지만
사회를, 그리고 인간을 그저 재미있는 분석거리로 보는 사회학의 일단면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건대, 이건 그저 '일단면'만을 보고 심하게 왜곡시킨 나의 탓이긴 하다.)
 
사회현상이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는 또 많은 눈물과 피가 숨겨져 있다.
그 사실을 그저 재미있게 현미경 들여다보듯, 외부자의 시선을 유지하기엔
난 학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기뻐해야할 일엔 기뻐하고, 슬퍼해야할 일엔 슬퍼하며, 분노해야할 일엔 분노하는 것.
그것이 배운 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 땅에서 '더 많이 배웠다'라는 것조차 착취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내 삶을 변명하는 그 순간. (네 환경이, 조건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증오하던 일들을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행하고 있게 되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이면 나는 드디어 '죽음'을 두려워하겠지. 아니 분명히 잊으며 살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리를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약간의 언어유희. ㅎㅎㅎ)
 
P.S. 살면서 이런 프로젝트 하나쯤 해보는 것.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그리고 옆에서 그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따스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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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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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61년 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고 97년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받아 유명인이 된 저자.
그는 현재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환경, 반핵, 반세계화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 저자가 쓴 2편의 시론을 묶은 책. (그녀는 인도극우주의자들에게 '빨갱이 잡년'으로 불린다.)
한편은 인도에서 무차별, 무계획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댐건설 반대에 대한 글이고
다른 한편은 핵무기의 전쟁억제력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핵에 대한 글이다.
 
저자가 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서(물론 흥분할만한 일이지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찌 이리도 낯설지가 않을까.
 
인도에서는 세계은행의 무차별적인 대출(요새 광고 많이하는 사채회사나 뭐가 다른가)로
수많은 동식물과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집을 물 속으로 잠기게 하는 댐건설을 해댄다.
문제는 이주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배려는 전혀 없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효과도 전혀 얻지 못한다는 것.
그들(인도의 위정자들과 세계은행)은 이것을 '효율성'이라 부른다.
20만명의 안정적인 급수를 확부하기위하여(혹은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4천만명의 거주지를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한 후 그들을 내던져버리는 일.
글의 제목처럼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공공'은 누구이고 '큰 이익'은 누구의 것인가? 희생자는 누가 결정했는가?
생존의 비용. '생존'의 의미는 천차 만별이다...
 
이것은 전혀 낯선 장면이 아니다. 올림픽 당시 미관(누구 입장에서의 미관인가)을 위해
사람들을 한 겨울에 허허벌판으로 두들겨 패 내쫓고
청계천에서의 하루의 휴식과 그 휴식하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힘을 만끽하는 자들을 위해
그곳이 삶의 현장이었던 사람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쫓는 모습.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아룬다티 로이는 이야기한다. 희망을 위해 당신의 믿음을 깨뜨리라고.
슬프지만 그 믿음의 파괴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고.
우리가 믿는, 아니 믿고 싶어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저자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단순한 '믿음'이 어떠한 힘을 가지는 지를 정확히 지적한다.
인도... 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정신적으로 고양된 장소? 평화로운 장소?...
 
도사인 체하는 사람들은 강연을 하면서 진짜 인도, 인도의 정신은 시골에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무슨 허튼 소리란 말인가. 손가락만 한 무화과 잎 하나로 색색의 화려한 물건들이 터질 듯 꽉 들어찬 정부의 수납장을 가려 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인도가 시골에 살아 있다고? 그렇지 않다. 인도는 시골에서 죽어가고 있다. 인도는 시골에서 학대를 받는다. 인도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인도의 시골은 오로지 도시를 섬기기 위해 산다. 인도의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고, 계속 살아 있되 겨우, 그리고 간신히 살아가야만 한다.
 
최근 뉴라이트(젠장 이게 대체 뭐냐!) 쪽에서 교과서를 냈다던데, 참 가관이었다.
체제의 맨 꼭대기에서 온갖 수혜를 받고 커온 그들이 본 역사란 게 바로 저렇다.
자.. 어떤가. 아직도 저들이 이야기하는 '민족'이나 '국가'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환상을 가지는가?
촘스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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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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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
자신이 '디아스포라'인 저자가 다른 디아스포라들을 바라보며 쓴 일종의 기행문.
이 기행문은 매우 우울하고 착찹한, 그런 기행문이다.
특히나 1장과 2장을 읽을 때는 정말 그 우울함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저 감상적인 우울함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러나오는 우울함이랄까.
정작 그 우울함을 되뇌이는 사람은 아주 무감정해보이는 그런.
그리고 그 우울함 뒤에는 '국가'와 '민족'과 '전쟁'이라는 음침한 것들이 흐물거리고 있다.
 
책 자체도 매우 깔끔하지만, 정성들인 것이 드러나는 깔끔한 번역 덕에 더 인상 깊게 본 책이다.
인상 깊은 구절이라기 보다는... 이 책의 서문은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왜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디아스포라일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의 국적이 3가지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번쯤 시간을 내서 읽어보길 권한다.
 
세상엔 분명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이 있다.
그래야만 '무지로 인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가식을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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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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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세미나 덕분에 읽게 된 일본인이 지은 중국사 관련 책.
 
이 책은 1950년에 출판된 책으로 한국에는 2001년에야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내용은 제목대로 청의 황제였던 옹정제의 치세에 대한 내용.
중국의 황제는 저자가 '전제군주'가 아닌 '독재군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듯이
그 절대권력이 조선은 물론 서양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특히 옹정제는 그의 선왕이었던 강희제와는 다르게 유래를 찾기 힘든 '독재군주'였다.
 
여기서 '독재군주'는 그 어휘가 풍기는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 나름대로의 소명과 책임을 바탕으로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강력한 독재를 실시했던 것이다.
옹정제의 말을 직접 빌리면 간단히 설명이 되려나.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
 
그는 자신의 이런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신료들에게 모두 엄격했고
항상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누구보다도 부단히 일하고 애쓰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이치사다는 '주비유지'라는 텍스트를 통해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주비유지'는 간단히 말하면 옹정제와 232명의 관료가 주고 받은 서간문을 출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독재군주 옹정제를 찬양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인가?
이상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책의 번역자가 번역 후기에서 적고 있듯이 이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는
중국의 사회주의가 나름의 기대를 받으며 사회를 구축해나가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필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아주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보다 더 애도할 일은 눈물이 흐를 만큼 선의에 넘치는 그의 정치가 독재군주제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보답이 의외로 적었을 뿐 아니라 예기치 않게 역효과까지 안은 점일 것이다. 생각건대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전제군주제가 지속되어 온 것은 군주제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갖고서 시대의 진보에 적응하며 발달해 온 덕분일 것이다. 만일 군주제가 아무 이상도 없이 완전히 자의적이고 무원칙하게 움직였다거나 딱딱한 껍질처럼 고정된 채 백성을 억압하기만 하였다면 아무리 참을성 많은 중국 민중이라도 이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양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역사에서는 이른바 명군(名君)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끊임없이 군주제의 이상과 실행방법을 고쳐 나갔고, 따라서 대중으로부터 무언의 신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옹정제의 독재정치는 그야말로 그 정점에 위치한다. 이렇게 해서 독재제를 신뢰하게 된 민중은 독재제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민중에게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점에서 말하자면 옹정제의 정치는 그야말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선의에 넘친 악의의 비극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거대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 그리고 그것의 현재진행.
그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학자의 예리한 통찰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정말 간만에 읽게 된 명저. 비록 전문서적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책은 어렵게 쓴다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보여주는 역작이다.
이 책이 1950년에 출판된 사실을, 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다.
(그리고 이 책은 분량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사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이산'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번역자인 차혜원씨의 성의 있는 '옮긴이의 말'도 인상 깊었다.
그 중에서 한 구절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번역자가 소개하는 필자와 관련된 에피소드.
 
  미야자키는 1949년부터 교토 대학 내에 옹정주비유지 연구반을 만들어 '주비유지'의 윤독을 시작하였고 수업교재로도 활용한다. 이때부터 구어체와 속어가 섞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비유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반에 의해 완전히 독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단순히 읽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와 법제상의 술어(術語), 지방풍속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어휘를 카드에 채록하는 색인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40여 년간 매주 거의 빠짐없이 윤독회가 이루어졌는데, 모두 99명의 인원이 참가하였던 대사업이었다.
  '주비유지'의 윤독회가 수백회 거듭되면서 연구원들 사이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빠른 결론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하여 연구반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아베 다케오라는 학자는 이렇게 일축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을 해나가는 일, 그게 바로 학문이라는 겁니다"라고.
 
"이런 일을 해나가는 일, 그게 바로 학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걸어간, 국적과 시대가 다른 한 선배의 말은 지금 내게도 유효한 말이다.
천천히 꾸준하게, 그러나 꼼꼼히 날카롭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글쓰는 재주나 시간, 아이디어 따위가 아니라, 그저 '정직한 노력'일 뿐이다.
적어도 역사가에겐 그렇다. 저 말을 평생 잊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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