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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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름만으로도 굉장한 힘을 가지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참여한 책.

사실 이 책은 83년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의 논의가 현재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고전'하나를 읽는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가 어떻게 시작됐느냐를 확인한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책.

 

이 책의 역자인 박지향 교수는 이제 역사학이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이렇게 풀어낸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기억'이라는 것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오늘의 역사학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저 말이 '이분법'으로 인식된다면 큰 문제점이 발생하기는 한다.)

 

홉스봄의 서론에 이어 6명의 학자가 스코틀랜드, 웨일스, 영국, 인도, 아프리카, 유럽전역에서 있었던 '전통의 창조'에 관해

각각의 서술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글의 배치상 스코틀랜드가 가장 재미읽게 읽히는 부분이다.

한국인들조차 '전통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스코틀랜드 특유의 복장이 사실 그리 오래된 전통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또한 '전통'이라 불릴만큼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그 전통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지도 이야기하고 있다.

 

고지대 의복은 본래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라졌다. 한 세대 동안 바지를 입어 온 고지대의 소박한 농민들로서는 굳이 예전에 그토록 값싸고 유용했던 혁대 맨 어깨걸이나 격자무늬 천을 다시 입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안성맞춤의 편리한' 새 킬트는 찾지도 않았다. 반면에 이전에 그 '천한' 옷을 박대하던 중상류층은 이제 전통적으로 입었던 사람들이 마침내 벗어던진 그 복장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가끔 매체를 통해보는 영국왕실도 마찬가지다.

 

"근대 사회는 여전히 신화와 의례를 필요로 한다. 국왕과 그 가족은 그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이전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관객들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지게 거행되는 기념식을 보며 마치 언제나 그러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이제 왕실은 새롭게 이용되며, 그들 스스로도 그 지위에 적당히 적응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해낸다.

 

이렇게 군주정의 실질적인 권력이 약화되면서, 군주정이 장엄한 기념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더욱 증대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의례의 강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영향력을 배가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동일한 의례들이 점증하는 왕실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잉글랜드의 그것은 권력의 무대가 다시 펼쳐졌음을 알리기보다는 무능의 행렬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또한 미디어의 발달로 왕실의 행사가 '전국적이고 가족적인 사건'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전통의 발명은 식민지에서도 계속된다.

 

'다양성은 열흘간의 제국회의 내내 마련된 연설들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고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인도인들과 프록 코트와 제목을 빼입은 영국인들이 함께 참석한 회의 전야의 연회에서, 리튼은 제국 칭호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면 단지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된다고 선언했다. 그럼으로써 "거의 무한한 다양성을 간직한 인종들과 그들의 성격을 특징짓는 신조들로 이루어진 거주민들뿐만 아니라 그 전통에서도 역시 다종다기한" 제국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시대 이전의 사회들은 확실히 관습과 연속성을 귀하게 여겼지만, 관습은 느슨하게 규정되었고 한없이 유연했다. 관습은 일체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자생적이고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어 그런 관습이 있다는 것조차 종종 잊어 버릴 지경이었다. 더욱이 '전통적' 아프리카의 특성이라고 이해된 자기완결적인 통합적 합의체제라는 것도 사실상 있어본 적이 없었다.

 

이 전체의 연구를 에릭 홉스봄의 서론 부분을 빌려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 '전통'과 실용적인 인습 및 관례는 길항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자유주의적 성향의 유태인들은 고대 헤브루 인들이 순전히 위생상의 이유로 돼지고기를 금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음식 금지 조항을 실용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는데, 바로 여기서 '전통'은 예의 약점을 노출한다. 거꾸로 어떤 대상과 관행들은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에야 비로소 상징과 의례로 온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럼 한 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것은 과연 왜 '전통'(존경의 뜻을 담은 단어)인가?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유용하기 때문인가.

이런 질문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전통은 그리 단순한 정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 단순하게 '이용'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왕실적 전통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거세된 대한민국의 경우

구성원들이 어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냐는 것. 그것을 비교사적으로 연구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의문 나는 점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살짝 언급하자면,

영국 신문의 상업성이 짙어지면서 왕실의 풍자가 사라졌다는 부분이 있는데(왕실에 관련된 기사는 폭증한다.),

상업성과 강한 비판적 성격을 띤 풍자가 함수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님에도 왜 이것을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느냐하는 점이다.

신문이 대중에 반응을 한 것인지(상업성이 강하다면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고려하는 수준이 더 높아질테니까)

아니면 대중이 신문에 반응을 한 것인지 그것이 좀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상호작용을 하였습니다.-_-라고 해버리면 할 말은 없다만;)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 꽤나 고생했던 책이었고 부분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책은 다들 뭔가 이유가 있다는 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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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의 이유
하워드 진 지음, 앤소니 아르노브 인터뷰,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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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Terrorism and war'인 이 책은 하워드 진의 대담집이다.

두께가 아주 앏은 핸드북 수준의 책이고 형식 또한 대담집이라 쉽게 읽히지만, 매우 강렬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책.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은 자신이 왜 '행동'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뭔가를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테러리즘'을 넓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당한 전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전쟁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고의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비전투병력이라고?

 

제 생각으로는 일종의 제한전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군사 행동이 원래부터 자체 내에 제한을 두지 않는 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술의 기초만 알더라도 저따위 단어는 쓰지 않을텐데도 버젓이 저따위 말을 지껄이면서 '국군'을 파병했다.

무능함이든 뻔뻔함이든, 둘 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의 '연대'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희망이 없어보이는 이 시기에 희망을 본다'고 얘기한다.

부시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책은 2002년도에 출간됐다)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아르노브의 질문에 하워드 진은 이렇게 대답한다.

 

누가 백악관에 앉아 있는가가 아니라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가, 그리고 누가 거리에, 노천 카페에, 정부 청사에, 공장에 있는가가 실제로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사람들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시위를 벌이고, 누가 관공서를 점령하고, 누가 집회를 벌이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곧 일어날 사태를 결정해주는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살기 빠듯한데 신경 좀 끄고 살면 안되냐라고 하는 안이한 반응에 니묄러 목사가 나치에 대해 남긴 말을 인용해 본다.

개인적으로도 이것이 진정 '연대'를 해야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니묄러 목사는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의 함장이었으나 전후 성직자가 되어 나치에게 저항하다

 37년부터 45년까지 집단수용소에 수용됐고, 전후에는 서독의 군비 확충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의 지도자로 크게 활약했다.

 이 부분의 언급은 1968년 10월 14일 독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자 그들은 노동조합 운동가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노동조합 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유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저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에는 저를 지켜줄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다른 책, '폭격의 역사'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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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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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저작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대담집.

이 한 권의 책은 선생의 인생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갖가지 국면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때문에 대담집이라는 꽤나 책장이 잘 넘어갈 것 같은 형식을 취한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말 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더디게 읽었다.)

 

비록 부분부분 선생의 강한 자존심이나 자긍심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충분히 그럴만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그 세월을 살아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부제가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던 시절(하긴 누가 저 시대를 살기 쉬웠다고 하겠냐마는.)

선생은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건방스럽게 선생에게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면,

이 책 내내 '현실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나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정치판이라는 거. 더럽고 비열한 무대라는 것.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저런 더러운 판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들은 저 '더러운' 판에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직접 저 더러운 판에 뛰어들어 정치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저들을 계속 바라보고 감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더러운 정치인들.. 이렇게 혀를 차고 돌아서는 것은.

하지만 돌아선다고 해서 당신 등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자. 내가 이렇게 쉽게 돌아서는 순간, 그리고 쉽게 잊을 수 있는 순간에

나처럼 쉽게 돌아서지도 못하고, 돌아설 힘조차 없고, 잊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쨌거나 선생의 저작 '베트남 전쟁'을 읽고 싶어졌다.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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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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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의 팬이었던 나는 최규석이 이 또 다른 단편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급하게 사들였다.

 

전작보다 훨씬 유쾌해지고 그러면서도 더욱 냉소적인 느낌을 주는 '습지생태보고서'

양지가 아닌 '습지'에서의 지지리궁상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 너무 괴로워하지 마. 지금은 그냥 네 꿈을 향해 달리는 수 밖에 없어...

- 그렇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냥 달려야겠지?

- 그게 아니라... 성공하고 나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보이지 않게 될 거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낄낄대고 웃다보면 저 습지가 저들만의 서식지가 아님을 깨닫고는 급작스레 침울해지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은 침울로 끝내지 않는 약간의 상투적인 결말을 짓고는 있지만

실은 침울로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습지자체가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습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보다는 개체의 태도가 어떠한가가 제일 중요하다는 뻔한 결론.

뻔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뻔한 것만큼 정당하고 어려운 것도 없다.

 

이 책이 강조하듯 '100% 공감 리얼궁상만화'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동감하며 살 것이다.

그것이 내 작은 '이상'에도 들어 맞는 것이며, 한편으로 현실적인 전략 면에서도 훨씬 실현 가능성이 큰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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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사랑
마이클 커닝햄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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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나는 누군가가 권하는 책을 잘 읽진 못하는 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결국 읽게 되더라도 권해줬던 그 시점으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바로 읽기 시작했다. 물론 꽤나 더디게 읽었지만.
 
이 책은 격렬한 열정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읽는데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다. 감정적으로.
 
내 평안을 위한 가학적 배려.
 
  우리의 교류는 오로지 육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우리에게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육체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한 교류를 시도했다면 아마 감상적이고, 부자연스럽고, 무분별한 짓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에는 성의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우리는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인 이기심.
 
  눈물이 흘러 넘쳤다. 바비가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한순간 조나단과 내가 남매이고, 우리 두 사람의 친구인 바비가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나는 내가 죽은 사람을 위해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자잘한 슬픔 때문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울음이 더 거세게 터져 나왔다....... 바비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슬퍼하는 것을 알고 그가 나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살아 있던 시절의 모습을 직접 기억하고 있는 반면, 내 슬픔은 전혀 낯선 사람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의 슬픈 기억들에 대한 것에 불과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감정에만 너무 빠져 있었다.
 
자기방어적 자만심.
 
  어쩌면 사람들은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은 젊음의 방종으로 인해 너무 쉽게 경솔하게 사랑을 줘 버리고 아직도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줄 사랑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조한 후회.
 
  나는 사막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내게서 받은 것이라고는 알맹이 없는 위로의 말뿐이었다. 아버지는 우편함에서 우편 판매 상품 카탈로그와 팜플렛 등을 꺼내 가지고 오다가 죽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 둔 채 부치지 않았다.
 
  특히나 앨리스와 조나단이 격한 감정으로 싸우던 장면에선 힘들어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조나단, 사랑할 사람을 찾아라."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 연약함을 잘 알고 그것을 용서해 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작게 축소시키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다면, 겁에 질리지 않는다면, 자극적인 도전과 따스함을 함께 갖춘 사랑이 나타날 것 같았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다.
 
4명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왠지 몇몇 인물의 서술 방식이 자꾸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
특히 바비의 경우(내가 가장 가깝다고 느낀 등장인물이기에 그랬을까.)
왠지 그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이런식으로 묘사하진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이나 엘리스, 클레어가 바라본 바비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봤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내가 바라본 '그 사람'와 실존하는 '그 사람'이 일치할 수 있을까, 하는.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글쎄,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을 이해해가는 과정, 즉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일말의 '가능성', 그리고 내게 아직 남아있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희망을 걸어본다.
내게 남은 능력은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지만
정말
정말 다행스럽게도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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