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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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제목을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숫자 9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도 생각해야 했다. 구라고 읽을 수도 아홉이라 읽을 수도 있겠는데 둘의 뉘앙스는 또 다르지 않는가. 구 번이라 하면은 보통명사로 특정한 무엇을 지칭하는 듯하다. 아홉 번이라 하면은 횟수가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숫자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이것은 에 관한 소설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사실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데 내용이 온통, 지독하게 일 얘기뿐이다. 주인공은 일만 하나? 그래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한몫한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마트에서 2교대로 근무하는 아내. 대학 진학을 목표로 독서실을 나다니는 아들. 하지만 저성과자로 찍혀 회사로부터 은근히 퇴직을 강요받는 주인공.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아프시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몸이 성치 않다. 다시 말해 이런 상황에서 보통 일은 부수적인 기능, 요컨대 자아실현이라든지 직무 능률 향상 따위를 다 제쳐두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면 족하고 만다.


작가의 얼굴

퇴직을 요구하는 회사 측에서 주인공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감을 줄 테니 시키는 일을 하라고.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농가의 판매 부서로 발령받게 된다. 그곳이 차로 한 시간 거리든 두 시간 거리든 그로서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영업일은 본래 그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엔지니어였다. 26년 동안이나, 이곳 통신회사에서. 사실 그가 이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 적부터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해야 했다. 하지만 일찍 직감했더라도 뭔가 달라졌을까. 그는 실제로 영업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건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옹고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노동의 가치, 땀으로 번 돈, 직무를 통한 성취감을 믿었다. 오랫동안 몸담은 회사를 믿었고, 그토록 회사가 매몰차게 자기를 내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새 업무를 받을 때에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상 그에게 부여된 영업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만 즐비하고, 인터넷에 관심 없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통신 기기를 팔라니. 그래도 그가 최선을 다 한 이유는, 그 일 또한 회사에서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문과 첫문장. 돌이켜 보면 참 씁쓸한 문장 같기도 하다

그런 면이 그와 주변 동료들의 가장 큰 차이었다. 발령 받은 뒤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 말고 다른 동료들은 통성명하기를 거부했다. 어차피 다들 한철 벌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신세라고 한탄하면서. 그가 보기에 동료들은 매사 부정적이고 무엇이든 제대로 할 의욕조차 비추질 않았다. 그들이 왜 저성과자로 찍혔는지 내심 알 것도 같았다 - 하지만 그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그렇게 그는 주변 동료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회사는 그의 기대를 꺾었다. 분명 일을 시킨 것은 회사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려고 했다. 비닐하우스에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기로 한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그의 계약을 검토하더니 설치 불가 통보를 때렸다. 그곳이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주인과 연락을 해가며 어찌저찌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가 비닐하우스 건을 해내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전출당할 예정이다. 이런 부당한 사실을 그는 영업 팀장에게 고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끄럽게, 물 흐르듯 상황은 잘도 처리된다.

그는 비닐하우스 주변을 돌며 꼼꼼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차를 몰고 곧장 대리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팀장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산간 오지나 열 가구 남짓한 작은 섬에까지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그곳은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고, 불가피할 땐 전신주를 빌려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팀장은 마우스를 딸깍이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모르지요. 제가 뭘 압니까. 위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 다음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p.107

그렇게 새로운 근무지로 전전하던 그는 결국 어딘가로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숫자, 그러니까 9번으로 불리며 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제목에서 품었던 의문은 보통명사 '구 번'을 뜻하는 거였다. 이제 이름마저 소속으로 대체된 그는 점차 회사와 동질화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대신 회사 입장에서 행동한다. 살아 보자고 시작한 일이 점차 자기 자신을 대체한다. 처음 일을 통한 희열과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아예 딴 사람으로 변한다 -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희한하지. 일이라는 게. 한번 손에 익고 나면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어디, 일이라는 게, 일만 하는 법인가. 사람도 만나고 세상도 배우고 하는 거지.

김혜진, 『9번의 일』,

한계레출판, p.180

우리는 왜 일하는가? 누군가는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일이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그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일이 그토록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놔둬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도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일에는 그런 면이 분명 존재하고, 저자 김혜진 씨도 이 점을 지적한다. 늘 하고 익숙한 것. 잘 하게 되는 것. 때론 습관처럼 떼어내기 힘들어 그냥 규칙적으로 찾게 되는 것.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곧 나의 성질이 되는 것.

이 말고도 『9번의 일』에서는 노동과 이를 둘러 싼 여러 문제들을 다루지만 나는 딱 두 가지에 집중해서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일하며, 그 일은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 중 한 가지 주제만 잘 담어내도, 그래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돋울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얇은 책이지만 쉬이 읽기에는 찝찝한 책이었다.





#소설 #김혜진 #9번의일

#한겨레출판사 #한국문학 #장편소설


: 이 사실은 소설 첫 문장에서 바로 밝혀진다. 자세히 보면 소설의 매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그의 소속이 밝혀지곤 한다.

: 본책,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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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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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큰 화두를 던진 게 아닌가 싶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그래, 우리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런데 이 짤막한 인생의 이치를 나란히 두고 보자니 팔짱을 낀 자세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오히려 나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이 문구에 호감을 느껴서(이건 내 병이다) 이 책을 읽게 됐다. 예상한 대로 내용은 빤했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 소설은 - 편견이라 해도 좋겠다 - 불륜 소설이 많았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저 사람을 사랑하고 쟁취하고 싶다는 열망. 내 곁에 애인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끌리는 현상.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유효할 문제 아닌가. 그런 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그러니까 이번이 네 번째인가. 이 책을 다시 펼쳐든 횟수 말이다. 이런 빤하디 빤한 이야기를 네 차례씩이나 읽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용은 빤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빤하지 않고 미묘해서. 예전에는 그 느낌이 어떤 충만한 만족감을 준다고 스스로 여겼지만 그게 무어냐 물어보면 잘 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는 음악을 남들에게 추천할 때 최선의 방법이 그냥 들어보라 하는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이번에 나는 그 어려움을 파헤치고자 이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 결과 썩 시원치 않은 결론이 나올까 봐 걱정됐지만 그래도 뭔 말이라도 지껄일 순 있을 것 같다.

/

한 남자가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화면에 찍힌 이름은 노라. 노라는 자신이 파리에 찾아온 경위를 짤막하게 밝히고는 남자가 몇 마디 꺼내보기도 전에 통화를 끊는다. 남자는 허탈해 한다. 그는 이 전화를 이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또 다른 남자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푼다. 불현듯 나쁜 직감에 휩쓸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 급히 짐을 싸서 떠난 흔적만이 역력하다. 이 일이 한두 번도 아니긴 하나, 남자의 허망한 심정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소설의 일부

맨 처음 소개한 남자는 블레리오, 그다음으로 소개한 남자가 머피다. 두 남자는 사는 곳도 다르고 각기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볼품없는 남자이기도 하다.

블레리오는 부모님께서 큰 뜻을 이루라는 의미로 프랑스의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셨(더랬)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의약품이나 전자 기기 따위에 붙은 설명서, 과학 기사에 쓰인 자잘한 영 문장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그의 아내 사빈은 예술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말하자면 인텔리다. 모든 면에서 그녀가 블레리오를 앞섰다. 그녀는 그보다 나이도 많았고, 이혼 전적도 있었고, 지적인 데다 성적 매력도 있(었?)고, 사교적인 성격 덕에 사람들과 두루 친했다. 언제나 아내를 볼 때마다 그는 알게 모르게 부채감을 느꼈다. 그 부채감은,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머피는? 미국인 머피는 하버드 출신의 인텔리이자 런던의 증권중개인으로 일하는, 다소 고지식한 남자다. 사교적인 편도 못 돼서 직장 동료들과 원활히 지내지도 않고 금융인답게(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만) 낭만보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갖췄다. 따라서 노라가 간혹 그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다름 아닌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금전적으로 그녀를 돕는다. 하지만 자꾸만 그녀는 떠나는데. 정말 머피는 돈이 궁해서 그녀가 이곳저곳 손 벌려야 했다고 생각한 걸까?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에서도 얄팍한 운명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머피의 법칙>: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


작가의 얼굴

욕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소설 속 인물을 무어라 상징하는 짓을 내가 제일 싫어하긴 하지만,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구도다. 블레리오는 욕망의 주체고 머피는 책임의 주체다. 가정에서 누가 봐도 가장 자격을 상실한 블레리오는 아내를 어려워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서 벗어날 자신도 없다. 암울한 부부 관계는 온통 그의 책임 같아서 괴롭다(하지만 해결은 어떻게?). 그런데 한때 그와 정반대로 건장했던 아버지조차 다 늙어서 어머니한테 맞고 사는 처지 아닌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긴 하루를 잊게 해주는 찰나의 쾌락이다. 그 쾌락은 아내가 아닌 노라가 충족해 준다.

하지만 욕망을 절제하는 삶 또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머피는 블레리오와 정확히 대척점에 선 이다. 여전히 블레리오가 부모님과 배우자(이 경우에는 거의 이들을 묶어 '보호자'라고 해야 낫겠다)에게 손 벌리는 것과 다르게 머피는 꽤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근면 성실한 일상을 유지하고자 힘쓴다. 그라고 욕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노라가 떠났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훌쩍 떠날 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그게 낭만이라 한다면 말이지만.

두 남자 사이에서 노라는 자유롭게 사랑을 갈구한다. 노라는 그렇다면 자유의 상징이다. 그녀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블레리오를, 머피를 - 그리고 소설에서 잠깐 등장하거나 그러지도 못하는 숱한 남자들을 - 선택하고 취한다. 어쩌면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블레리오와 머피가 그녀, 노라라는 한 사람에게 단단히 매인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노라와 같은 자유가 없었으니까. 아내에게, 깨뜨릴 수 없는 일상에, 탈출구 없는 제 자신의 욕망에, 안정적인 삶의 추구에 얽매어 있었으니까. 연극에 비유하자면, 되고 싶은 배역을 받지 못할 때 블레리오는 질투하고, 머피는 다른 대역에 안주하고, 노라는 어떻게든 그 배역을 따낸다. 그러니 두 사람 다 노라를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내가 만든 등장인물 관계도

왜 노라는 그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했을까? 소설 속에서 머피 곁으로 돌아간 노라는 그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 왜 떠났던 거야? 그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는 나지막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돌아와 자기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야.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느껴야만 하지. 그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갈색 눈을 아주 크게 뜨면서 그녀가 속삭인다.

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165

자유로운 노라답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대답은 그저 형식적인 말뿐일지도 모른다. 노라에게 머피는 블레리오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주지 못한다. 동시에 블레리오는 머피만큼 안정적인 헌신을 보이지 못한다. 노라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아무하고나 사랑했다고? 천만에. 사실 두 남자 모두 노라에게 어느 하나 확신할 만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노라가 정식적인 교재를 제안했을 때 블레리오는 아내 핑계를 대며 둘러댔고 머피는 평소 그녀의 행실을 떠올리며 못 들은 척했다 - 내가 앞서 두 남자 모두 볼품없는 남자라고 폄하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갈팡질팡한다. 자유로웠던 노라는 사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외로운 사람 아니었을까?

/

여태 실컷 떠들었지만 나는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했다(적어도 이 같은 줄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심지어 글쓰기에 돌입할 당시 목표했던 욕망의 의미조차 못 밝힌 것 아닌가. 원체 개인적인 선호는 그런 건가 보다. 설명해보라 하면 그냥 느껴보라 답하고 싶은. 그래도 설명하려 하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이 책은 플롯으로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얘기지만, 이를 문장으로 구체화하는 작가의 시선과 통찰력은 놀랍다. 아니, 놀랍지 않을지도 몰라도 그런 시도들이 내 취향에 부합한다. 허투루 읽히는 문장이 없고, 장면 장면이 생생하다. 이것도 사실 내 눈에만 그래 보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렇게 말해 보자.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단 한 문장이 내게로 꽂혔다고. 나는 욕망을 설명하는, 이보다 정확한 문장은 별로 만나지 못했다. 하나는 시어도어 드라이저 소설에서 봤고 다른 하나는 이거다.

그건 아주 강렬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게다가 놀라운 건 그게 그토록 강렬하다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파트리크 라페르,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p.27

원래 좋아하는 이유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게 나다.

#소설 #파트리크라페르

#인생은짧고욕망은끝이없다 #이현희_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모던클래식 #민음사모던클래식 #페미나상 #프랑스문학 #장편소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여명』,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외 다수. 이에 관해 프랑스 문학의 시초가 배우자 몰래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해성사한 고백록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듣긴 했으나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질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 소설가 정지돈 씨는 한 에세이(『영화와 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남들에게 설명하려 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외려 좋았단 것조차 싫어지게 되므로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 실존 인물이다.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1970년 처음으로 단엽기를 제작하였고, 1909년 11호기(25마력)을 조종하여 37분의 비행 끝에 최초의 영국 해협 횡단이 성공하였다"(두산백과 인용)

: 두산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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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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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를 읽었다. 나는 이 책을 무책임한 성인 남자의 뒤늦은 방황기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만으로 주인공 레빗의 성격과 행적을 묘사하려는 나도 참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쓸 때도 사소한 감상이나 줄거리,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한 단위로 종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레빗이라는 이 친구를 보면서 떠올린 인상들을 나는 글로 풀어쓰고자 시도했지만 참 쉽지 않다고 느꼈다. 애초에 그는 이해하기는커녕 호의적으로 보기 힘든 면모가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한때 잘나가는 농구 선수 출신에 임신 중인 아내를 둔, 그러니까 이제 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해리 레빗 앵스트롬¹. 어느 날 그는 어머니께 아들 넬슨을 맡겼다는 아내의 말에 부모님 댁으로 간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덫에 걸렸다고 느낀다. 그는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횡단한다. 어디로 갈지 본인도 모르는 채로 - 그렇게 정처 없이 미국 대륙을 횡단하다가 레빗은 옛 농구 감독인 마티 토세로를 만난다. 그들은 여자 둘을 만나고 거기서 레빗은 루스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존 업다이크는 소위 말하는 '레빗 시리즈'를 10년 주기로 발표했다². 레빗은 말하자면 업다이크의 생애를 - 그게 한 사람으로서의 생애든 전업작가로서의 생애든 - 함께 한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레빗이 업다이크, 업다이크가 레빗이라고 표하기란 아무래도 비약이 심할 테지만 미국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레빗에게 투영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래서 레빗의 눈에 비친 미국은 업다이크가 생각한 미국 그 자체였을 것이다 -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래빗의 눈으로 본 것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이야기할 가치가 더 크지만, 사실 둘 사이의 차이는 미미하다.(본책, p.444 작품 해설 참고)" 내가 생각한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가 있고 그 둘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내가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 또한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미국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샴페인과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홀로 와인 한잔 기울이는 이. 내가 생각한 개츠비와 미국은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가 그런 내용도 아닐뿐더러 미국의 이미지와 동떨어졌음을 안다. 이건 내가 순전히 미국을 떠올리면서 연상하는 이미지이자 환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업다이크가 바라본 미국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미국이다. 그것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한 사람과 장면 속에 담겨 있다.³ 사람들은 일상 속에 걸어들어가 알아서 괴로워한다. 이유 모를 괴로움에 잠식당하고 불안감에 짜증을 부린다. 마찬가지로 처음 레빗의 일탈 행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아내 재니스가 아이에게 무심하고 남편이 오기 전에 현관문을 걸어 잠가두며 임신 중에도 술과 담배에 찌든 모습에서 뭔가 그의 가정이 삐거덕거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불쾌함이 레빗을 나가게 한 걸까. 말 그대로 덫에 걸린 느낌이 그를 도망가게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레빗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올 등장인물은 목사 잭 에클스다. 그는 작중에서 레빗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레빗이 잠깐 차를 두고 옷가지를 챙기려 집에 들른 틈을 타 에클스는 그에게 도망간 이유를 묻고 함께 골프 약속도 잡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에클스가 레빗의 마음을 다잡고 한 가정에 평화를 깃들게 해야 하는데. 그런데 나중 가서 에클스도 레빗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해리는 분명히 돌아올 겁니다(본책, p.222)" 레빗의 장모를 만난 에클스는 말하지만 그 말을 본인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의 도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꼬여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문제가 감정의 부족이라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감정 과잉이기 때문에 섣불리 재결합을 하도록 밀어붙이면 안 돼요(본책, p.244 변형해서 인용)"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주 웃기는 소설이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던져 놓고 독자들은 그걸 가지고 씨름하는 꼴이니 말이다. 차라리 레빗의 삶을 하나의 담론 거리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레빗은 그 가출 행위를 제외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잡하고 무책임하며 충동적이다. 어쩔 때는 오만하고 금방 풀이 죽으며, 지나치게 소심하고 응석받이다. 그의 다른 점은 가정을 벗어났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를 가정을 파탄 낸 무뢰한이자 파렴치한이라 부른다. 우리가 레빗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거기 있다. 다 큰 평범한 성인이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면 그것은 책임의 문제지 일탈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도 여전히 찝찝한 앙금이 남는 건 왜일까. 그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살면서 방황하지 않는 존재란 없으며 사실 인생에서 방황하기 좋은 시기란 따로 없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레빗을 옹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레빗은 네 번 도망친다. 네 번의 도망은 곧 네 번의 덫이다. 그리고 그 덫은 갈수록 실체를 가지고 절망스럽게 그의 목을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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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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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마음이 숙연해지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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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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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럴 줄 몰랐다. 내가 한트케의 책을 감명깊게 읽을 줄은. 감명은커녕 그가 쓴 글을 읽고 이해나 할 수 있었으면, 그래서 어떤 견해랄 것을 가져봤으면 좋을련만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여담이지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새해보다 연말이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한기 소설가가 말했다. 결국 우리는 생애의 어떤 순간과 동일시할 수 있는 책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까? 이 책이 그랬다, 얼마 전 타계하신 허수경 시인은 말했다. 이런 말마따나 작년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두는 시점에 이 책을 덮었던 나는 약 일 년 만에 같은 책으로 한트케를 다시 만났다. 사실 그 사이 그의 다른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을 읽긴 했다. 이번 책을 읽으며 나는 21년 연말과 20년 연초를 거쳤다. 변화라면 한 해가 종말을 고했고 나도 한 살을 더 먹었을 뿐, 그 외에 특별히 변할 게 우리에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시기를 거치는 동안 내 안에 무언가가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고도 장황한 문장들이 읽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불과 일 년 전보다 내가 텍스트를 인식하는 능력이 향상된 듯한 인상을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여기 글에 쓰인 화자의 말과 나와 나의 인간 관계를 대입하며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국을 간접적으로 횡단함으로써 한 차례 성장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이다. 한트케가 말했듯이. "나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통해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한트케의 말 인용)"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추정되는 소설 속 화자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발신인은 아내였고 편지 내용은 짧고 간명했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본책, p.11)" 그리고 화자는 아내를 찾아 미국 대륙을 횡단한다.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도 지껄이고, 새로운 공간에 내던져진만큼 스스로 변화를 꿈꾸기도 하고, 낯선 이들과 풍경을 마주하면서 뜻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아내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탐색하면서 자신이 아내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자신이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아내의 눈에 비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을지 화자는 자문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자신을 향해 돌아서면서 결국 자신이 자신에 대해 자신과 이야기하는 꼴이 된다. 예컨대 전화를 받으면서 화자는 생각한다. "'제대로 전화하는 법을 배우는 날이 오기는 올까.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해봤지.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많은 것을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야 경험하기 시작했어. 더이상 뭔가를 제대로 익히기 쉽지 않은 나이에 말이야.(본책, p.35 변형하여 인용)" TV가 지루해서 만화책을 볼까 고민하다 관두면서 또 이런 생각을 한다. "스누피 만화를 엮어놓은 몇 권의 모음집을 읽고 난 후 밤에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꿈들이 죄다 네 개 단위의 영상으로 끊어지고는 다시 네 개 단위의 영상으로 된 새로운 꿈이 이어지는 것이었다,(본책, p.40)"
  아내와 싸우는 이유를 생각하면서 화자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말다툼을 하다보면 나 스스로 진지함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강한 적대감을 품다가도 결국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상황, 아니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늘 서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 까닭에 소강상태나 화해의 미소까지도 단지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 위한 계기로 이해되었다.(본책, p.45)"
  가끔 이렇게 자신에게 파묻히다보면 화자가 여행의 본래 목적인 아내 찾기를 망각하고 헛발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도중 나와 우리가 겪은 공통의 일과 생각이 포개지는 순간이 있고 그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여기 내가 경험한 일이 쓰여있다고. 사람이 스스로 겪은 일을 누군가가 명징한 언어(혹은 사진과 그림)로 풀어놓은 걸 마주할 때만큼 소름 돋고 민망한 일은 드물다. 내가 화자의 긴 이별 과정에 동승하자 그때부터 한트케의 글은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 순간도 바로 이때다.
  만일 소설을 읽는 기준이 힘있고 흡입력있는 서사에 있다면, 필히 한트케를 읽는 데 무리가 따를 것이다. 나는 모든 책을 처음 읽을 때,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길 위로 나가 히치하이킹하고 술 마시고 여자 만나고 친구 사귀는 여행기보다 음모와 서스펜스로 꼬여진 박진감넘치는 장르 소설이 솔직히 더 재미있으니까. 대신 후자의 책은 한 번 읽고 말 테다. 내 방에는 책장을 삐져나온 책들이 해변가에 솟아난 바윗덩어리처럼 튀어나와있다. 아직 못 읽은 책도 많지만 언젠가 다시 읽을 책도 많다. 사실 그래도 말해 한트케는 다시 읽을 책 무더기 서열에서 비교적 저멀리 밀어놓은 워스트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의 책은 이해도 안 되고 재미도 없었으니까.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품었던 마음을 꺼뜨리고 기본 플롯만 염두에 둔 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못 했으면 이런 문장도("나는 내가 그 모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오히려 지금부터는 그 콤플렉스들을 배려하는 방법이나 생활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본책, p.105)") 이런 문장도 ("그리고 한 사람이 상대방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그것을 당장 기피하지 않고, 먼저 그것이 자기의 삶의 방식에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본책, p.117)") 만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건 뭘까? 그보다 변화라는 건 뭘까? 우리가 우리 세계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기가 실질적으로 힘들다면 성장과 더불어 변화는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이 감추려 드는 비밀 중 하나는 변화를 외면하는 데 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를 겪고 그것으로부터 밀고 나가 삶을 개척하는 것보다 지금의 나의 삶을 유지한 채로 효과적인 변화가 알아서 시기 맞춰 제 발로 들어오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체질에 맞지 않아서 관둔다. 그것이 인간의 비밀이자 저주받은 특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함부로 입맛을 취향을 개성을 태도를 자신을 바꾸질 않는 특성. 역으로 함부로 입맛을 취향을 개성을 태도를 자신을 규정하려는 특성.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가 내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로 들려주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다. 도대체 왜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어야 하는 것인가?(본책, p.58 변형하여 인용)" 스스로의 변화 방향은 스스로가 생각해보시길. 한트케도 그것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은 이토록 말하기 조심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가능성 내지 희망이라는 실오가리를 살짝 느껴본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으므로. 앞으로 내게 올 새로운 변화를 추가하자면 한트케를 더 찾아 읽을 거라는 사실이겠다.
  이것으로 지난 날도 안녕이다.

https://blog.naver.com/jaehyung137/222613775919


"그 외에 많은 것을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야 경함하기 시작했어. 더이상 뭔가를 제대로 익히기 쉽지 않은 나이에 말이야." - P35

나는 특징들만 모으기를 그만두고 인내심을 갖기 시작했다. - P69

나의 모든 관찰 행위는 아무런 긴장도 없이 그저 일어날 뿐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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