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가가 4월 27일 우리나라를 시작으로 월드투어 한다길래

티켓예매날(2월27일 12시)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내내 이날을 잊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애들 학원 데려다주고 데려오면서

오늘이 티켓예매일인걸 까먹었어.

부랴부랴 인터파크에 들어가면서 설마 그 많은 자리가 꽉 찼겠어,

라고 생각하며 지금 들어갔더니

맙소사~ 자리가 없어==;;

아, 어떡하지, 어떡해.

B석이 있긴 있지만..난, 난 가가를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스탠딩을 원했단 말이야.

 

아, 가가 좋아, 좋아 미쳐버리겠어 ==;; 가가 울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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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한국문학은 잘 안 읽는다.

일년에 한 두권이던것이 이젠 몇 년에 한 권정도.

최근에 이상문학상 빼고는 몇 년동안 읽는 적이 없는 듯.

그나마 이상문학 단편소설 읽고 이제 한국 문학은 완전 접어야겠다는

결심 아닌 결심.

 

오늘 구글 들어갔다가 본 이효석 탄생 105주년 기념 두들

메밀꽃이 저렇게 생겼나.

 

지금까지 본 구글의 두들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들은

작년 할로윈데이날 본 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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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4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작가의 사적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건조하고 깔끔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소설들이다. 작가의 사적 감성이나 감정은 캐릭터의 성격에 대입해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며, 소설에서 작가의 감정을 위임 받는 것은 캐릭터의 몫이다.

 

그래서 캐릭터를 다룰 때는 작가는 조심해야 한다. 작가의 감정이 과잉으로 캐릭터에 대입되었을 때는 과도한 자기 연민으로 이야기가 흐를 수 있고, 감정이입을 거의 하지 않을 땐 캐릭터가 이야기에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잘 짜여진 이야기의 힘으로 소설이 이끌여 나가는데, 개인적으로 과잉으로 소설이 이끌려 나가는 것보단 차라리 이야기의 힘만으로 전개되는 것도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캐릭터보다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 아주 독특한 캐릭터가 아닌 이상,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량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프 린제이의 소설속 인물 덱스터는 좀 다르다. 아마 그는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정말 특이하고 독특한 캐릭터일 것이다. 나는 미국스릴러나 미스터리물을 읽긴 하지만, 정말 좋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히나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다 좋다고 말하는, 할렌 코벤,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같은 거물급 작가들의 미스터리물을 읽고 난 후의 그 텁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계산된 장면, 거듭되는 반전의 반전의 트릭과 악의 클레쉐적인 설정등. 재미는 있지만 매력을 느낄 수 없다.

 

덱스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의 직업은 경찰내부에서는 공개적으로 혈액분석가이지만,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직업이 있다. 그건 바로 연쇄살인범. 그것도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 말이다. 그는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하는 사람들을 한동안 지켜보고 죽일 기회를 찾는다. 자신의 살인 본능을 선량하고 일반적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 없어져도 무방한 사람들, 연쇄살인범에 촛점을 맞춰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덱스터는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캐릭터이다. 과연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그의 연쇄살인 행위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처벌해야하는가? 그의 그런 캐릭터로 비춰볼 때 사람은 환경에 지배 받는 것이 아니고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선이나 악을 집단적(성선설, 성악설)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인 그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법적인 면에서는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사회적 통념상 암묵 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제프 린제이가 창출해 낸 덱스터의 본능이다. 그의 살인행위는 사실 정의로운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수 많은 연쇄살인범들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살인 본능을 타고 났다. 그래서 그의 양부 해리가 그의 본능을 알아채고 그에게 사람 대신 동물들을 죽이도록 인도해 주었지만, 결국 그의 본능을 잠재울 수가 없어 타깃이 된 것이 바로 연쇄살인범인 것이다.

 

제프 린제이의 이 소설에서 만들어낸 교활한 장치는 덱스터가 연쇄살인범을 죽인다는 것 때문에 침묵의 공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연쇄살인범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용기 없는 우리 대신 그가 칼을 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살인 본능을 타고 났다면 차라리 그런 사람을 죽이도록 부추기고 침묵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을 소리 높여 비난 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제프 린제이는 덱스터의 살인 본능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을까? 우리는 대체로 사람은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윈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한 인간을 형성하는데 있어 유전자(우생학)과 환경결정론,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분하다.

 

제프리가 만들어 낸 덱스터의 살인본능은 환경보다는 유전자쪽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그의 살인 본능이 전적으로 유전자의 무게중심으로 쏠리지 않는다. 그는 그의 살인본능, 양부모지만 번듯한 부모밑에서 자랐고, 그의 양부 해리는 그가 살인에 대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무단히도 그의 살인본능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선 환경적인 요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환경적인 요소는 그가 연쇄살인범만을 죽이도록 도덕적인 라인을 제시한 것이기.

 

양부 해리의 노력에도 불과하고, 그의 잠재적인 살인본능을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살인에 대한 쾌감은 마침내 발현되었고, 그 대상이 연쇄살인범으로 유도되었을 뿐. 그러고 보면, 도킨스가 말한 우리는 유전자의 대를 이어주는 수단(껍데기)에 불과하는 말은 소름끼칠 정도로 맞는 말일 주도 모르겠다.

 

덱스터나 여타의 살인자들(테디 번디나 김길태 같은)과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살인본능은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 못하지만,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선악을 집단적으로 몰아부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이며 고유의 바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덧 : 리뷰 제목은: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에서 별빛의 바코드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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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키튼 1 - 사막의 카리만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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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오기 전에 뭔가 좀 끄적여 보려고 했는데, 아침에 지하철에서 오가며 생각한 것들이 생각한 만큼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다.

 

요 며칠동안 존 하트의 <라스트 차일드>와 레이 브레드베리의 <일러스트레이트맨>을 읽었고, 세이초의 을 읽고 있는데, 

 

한동안 소설이 안 읽혔던 것에 비하면 위의 소설들은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읽었고 읽고 있는 중이다.

 

이왕 소설에 매진하는 거 작년에 1,2권만 읽다가 때려치운 킹의 <언더 더 돔>이나 마저 읽을까,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갑작스레 들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말이다. 킹은 드라마복도 많다. 쓰는 족족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니 말이다. 마지막 권을 읽어야 개운하고, 1,2권만 읽었으니 저 책을 읽었다고 할 수도 없고...마지막이 궁금해서라도 읽어야하는게 맞은데, 1,2권 읽으면서 킹의 주인공 캐릭터 답지 않게 무진장 갑갑해서 나와서 3권은 또 얼마나 답답하게 나올까 싶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킹의 트레이드,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힘이 발산되어 뭔가 좀 깡그리 때려부수고 깔아 뭉개야 시원한데, 이번 소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주인공이 아무 힘(초능력은 커녕 캐릭터의 매력도)이 없었다. 적어도 2권까지는. 마을이 돔이 갇혀 우왕좌왕하는 꼴만 보고 있으려니 속이 타서 더 이상 읽은 것은 무리겠다 싶어 내려놓았던 것이다. 내가 킹을 좋아하는 이윤가 뮌데? 순문학 독자들은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주류에 비껴나 있는, 혹은 소외된 주인공의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발산해서 세상을 들었나났다하는, 거기에서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느끼는 거니깐.

 

 

 

이 소설 처음 나왔을 때, 이야기 소재가 심슨의 극장판 영화와 유사하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방응에 킹은 위의 심슨 영화를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자, 킹의 팬들이 닥달같이 달려들어 당신같은 팝문화광이 이 영화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심슨 영화의 크리에이터인 Matt Groening와 함께 밴드를 만들어 무대에 활동했는데, 이 영화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라고 몰아부치자, 킹은 1978년에 비슷한 상황을 설정한 소설을 생각해 냈고 1985년쯤엔 <카니발>이란 제목으로 미발행 소설로 썼다고 자신의 웹사이트에 IBM 타자로 친 60여 페이지의 초고를 올려, 영화 심슨을 표절했다는 오해는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심슨을 제작한 측에서도 킹의 소설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변호사의 나라에서, 게다가 소설가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상상을 초월하는 그에게 표절 고소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봐서), 심슨의 크리에이터 Matt Groening가  킹의 미발표 원고를 보고 심슨영화의 소재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여하튼, 한바탕의 표절 소동이 어떻게 끝나든, 이 소설에서 맘에 드는 것이라고는 소설적 상황과 제목뿐. 언더 더 돔이라는 갇혀 있는 상황이 어떤 소설적 소재로 단순히 치부되기 보다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 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면서 정말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 구태의연한 인식의 폭,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세상을 보는 시각과 갈등과 투쟁 등등.

 

나를 둘러싼 세상이 돔 안에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돔이 둘러쳐져 있지 않다 뿐이지. 내 삶이 돔 밖의 세계에 있다고 그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냐 말이다.  흔히 말해 갇힌 세계, 혹은 체제에 대한 저항은 수 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이고 익히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돔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나의 일상이 갇힌 세계이고 닫혀 있는 세상이다. 돔 밖으로 나가야한다면 투쟁을 저항을 해야 하는데, 내 삶의 에너지가 과연 그 돔을 깰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언더 더 돔만한,  갇힌 세계에 대한 비유와 상징만한 것도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3권에서 돔을 누가 깼을까 싶다. 과연 그 닫힌 세계를 내부에서 깨졌는지 혹은 외부에서 깨고 들어갔는지 말이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살고 思考 하는 세상 그리고 인식의 틀을 돔처럼 내부에서 서서히 깨고 좀 더 밖의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나가고 싶다. 외부에서 깨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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