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에 시댁 가서 읽을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볼 생각으로 동네구립도서관에 갔다가 신착도서에 이 책을 보자마자 블랑카님의 리뷰가 생각나 빌려 가지고 시댁이 있는 청주로 내려갔다.
이 책에 대한 여러 편의 페이퍼를 읽었던 터라, 성공을 눈 앞에 둔 레지던트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비극적인 이야기라 읽고 나면 기분이 묘할 것이라는 예감은 했지만, 막상 이 미완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서글픈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스탠포드 영문학과 출신답게 글을 참 잘 쓴다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다재다능함(글이면 글,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의 능력과 주변의 인정)을 가지고 있고, 신경외과 레지던트수료 후 스탠포드대학에서 교수직을 받아 들이면 지금 레지던트 때보다 6배의 연봉과 함께 누구나 부러워할 지위가 보장된 인생. 그런 인생을 코 앞에 두고 암발병으로 인해 삶이 일시 정지된 폴 칼라니티의 자전적인 이 글을 읽으면서, 최근에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안타깝고 씁쓸했던 감정이 일었던 적이 없었던 나로선, 차라리 이 책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한편의 소설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스탠포드 대학 교수직을 받아 들인 후, 이십년간은 외과의로, 그리고 나머지 이십년은 작가로 살고 싶어 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었기에, 저자 자신도 죽음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그가 죽은 후 그를 보낸 가족 또한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독자인 나 또한 고지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움과 씁쓸함으로 뒤범벅인 된 감정의 후유증을 앓았던 것처럼.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책의 제일 앞 장에 씌여진 시,
죽음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 놓으라, 라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시에 위안이 되지 않았다. 죽음은 나에게 절대 익숙하지 않고, 영혼 또한 받아 들이기 힘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영혼이란 위안보다는 보고 만지고 웃을 수 있는 실재적 존재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하기에.